문학 산책

세계의 명시/ 이하(李賀) - '진상에게 드림(贈陳商)'

라라와복래 2018. 7. 22. 14:42

세계의 명시/ 이하(李賀)

진상에게 드림 贈陳商

장안에 한 젊은이 있어 長安有男兒

나이 스물에 마음은 벌써 늙어 버렸네 二十心已朽

능가경은 책상머리에 쌓아 두고 楞伽堆案前

초사도 손에서 놓지 못하네 楚辭繫肘後

곤궁하고 못난 인생 人生有窮拙

해 질 녘이면 애오라지 술잔만 기울이네 日暮聊飮酒

지금 길이 이미 막혔는데 只今道已塞

백발까지 기다려 본들 무엇하리 何必須白首

쓸쓸하구나, 진상(陳述聖)이여! 凄凄陳述聖

베옷 입고 김매며 제사의 예를 익히고 披褐鉏俎豆

오묘한 요순의 글을 배웠거늘 學爲堯舜文

사람들은 낡은 문장이라 나무라네 時人責衰偶

사립문엔 수레바퀴 자국 얼어붙어 있고 柴門車轍凍

해 기울면 느릅나무 그림자만 앙상한데 日下楡影瘦

이 황혼에 그대가 날 찾아왔으니 黃昏訪我來

곧은 절개 지키려다 젊음이 주름지겠네 苦節靑陽皺

오천 길 태화산처럼 太華五千仞

땅을 가르고 우뚝 솟은 그대 劈地抽森秀

주변에 겨눌 만한 것 하나 없이 旁古無寸尋

단번에 치솟아 견우성과 북두칠성을 찌르거늘 一上戛牛斗

벼슬아치들이 그대를 말하지 않는다 해도 公卿縱不言

어찌 내 입까지 막을 수 있으랴 寧能鎖吾口

나도 태화산 같은 그대를 본받아 李生師太華

책상다리 하고 앉아 한낮을 바라보네 大坐看白晝

서리 맞으면 잡목 되고 말지만 逢霜作樸樕

때를 만나면 봄버들 되는 것을, 得氣爲春柳

예절은 내게서 멀어져만 가고 禮節乃相去

초췌하기가 비루먹은 개와 같네 顦顇如芻狗

눈보라 치는 재단을 지키면서 風雪直齋壇

검은 끈에 관인(官印)을 차고 있다 하나 墨組貫銅綬

노비 같은 기색과 태도로 臣妾氣態間

다만 먼지 털고 비질만 할 뿐이네 唯欲承箕帚

하늘의 눈은 언제 열려 天眼何時開

옛 검(劍) 한번 크게 울어 볼 것인가 古劍庸一吼

시를 말하다

정끝별

아름답고 빼어난 시구(詩句)를 일컬어 ‘금낭가구(錦囊佳句, 비단 주머니 안에 있는 아름다운 시구)’라 한다. 그 자체로도 아름다운 비유지만 당나라 시인 이하(李賀)의 실제 고사(故事)를 곁들이면 더욱 살갑다. 일곱 살 때부터 빼어난 문장을 짓기 시작한 이하가 낡은 비단 주머니를 등에 메고 다니며 영감을 얻으면 곧바로 시로 써서 비단 주머니 속에 던져 넣었던 데서 연유한 말이기 때문이다. 어릴 적부터 시작(詩作)에 지나치게 몰두했던 이하는, “이 아이는 심장을 토해 내야만 시 쓰기를 그만두겠구나.”라는 모친의 염려처럼 열일곱에 반백이 되었고 스물넷에 백발이 되었으며 스물일곱에 요절했다. 심장을 도려내는 고통 속에서 시어를 토해 낸다는 ‘고음(苦吟)’이란 딱 그의 시 쓰기를 두고 하는 말이었다.

그러했던 이하가 숨을 거둘 적 옥황상제의 부름을 받아 백옥루에 상량문(축문)을 지으러 간다고 한 데서 유래한 ‘천상수문(天上修文, 천상에서 문장을 짓다.)’도 있다. 또한 ‘우귀사신(牛鬼蛇神, 소귀신과 뱀귀신)’이란 말도 있다. 당나라 시인 두목(杜牧, 803-853)이 이하의 시를 가리켜 “소머리를 한 귀신과 뱀몸을 한 귀신 등으로도 그의 시의 허황하고 환상적인 면을 형용하기에는 부족하다.”라고 평한 데서 따온 것으로, ‘귀재(鬼才)’라 칭송되었던 이하 시의 풍부한 상상력과 독창적인 환상성을 일컬었던 말이다.

이런 고사성어들이 생겨나고 전해진 걸 보면, 불우(不遇)했던 이하의 삶과 불후(不朽)했던 이하 시에 대한 후대 사람들의 공감과 경의를 짐작케 한다. 이하는 부친의 이름(‘晉’肅)과 과거 명칭(‘進’士試)에서 ‘진’자가동음(同音)이라는 이유 하나로 과거 응시 자체가 거부된 불운한 청춘이었다. 황당한 일이다. 그를 아꼈던 반골 기질의 한유가 “만약 부친의 이름이 인(仁)이라면 아들은 인(人)이 아닌가…… 이하를 시기하는 자들의 헐뜯음일 뿐이다.”라고 휘변(諱辯)까지 써 줬지만, 시대는 그를 버렸다. 젊은 이하! 절망했고 분노했다.

당나라가 시의 시대였다고 하지만, 기실은 가진 자의 시대고 안사(安史: 안녹산과 사사명)의 난 등 온갖 전쟁으로 민중이 도탄에 빠졌던 시대였다. 젊은 이하는, 그런 시대를 만든 위정자들이 다스리던 시대를 살았다. 질병과 생활고와 조로(早老)는 덤처럼 따라왔다. 귀기 서리고 한 서린 시를 쓰고, 무덤에서도 자고, 절간에 기어들어 가 좌선도 했다. 인간과 (귀)신, 이승과 저승의 경계를 오가며 조증과 울증으로 쏟아 낸 그의 언어들은 환상적이고 비현실적이었고, 탐미적이고 염세적이었다. 무엇보다 아름답다! 이하를 이하이도록 한 불세출의 시적 개성이었다.

시대적이고 개인적인 불행에 옴짝달싹 못하는 시인의 자화상이 잘 드러난 시가 ‘진상에게 드림(贈陳商)’이다. 진상은 이하의 절친 문우(文友)였다. 진상은 학문과 문장이 뛰어나고 인품 또한 나무랄 데 없었으나 당대의 위정자들이 그의 진가를 알아보지 못했고 중용되지 못했다. 그런 진상이 저물녘에 이하를 방문했고 이에 그에게 고마움과 위로의 뜻을 담아 보낸 시다. 동병상련했을 것이니, 진상을 묘사한 문장이 곧 이하 자신을 묘사한 것이고, 진상에게 주는 문장이 곧 이하 자신에게 주고 싶었던 북돋움이기도 했을 것이다.

“장안에 한 젊은이 있어/ 나이 스물에 마음은 벌써 늙어 버렸네”라는 구절이 집약하고 있듯, 젊고 젊은 스무 살이건만 인생길이 꺾이고 막혀 대낮부터 술에 의지할 수밖에 없음을 한탄한다. 자기부정의 해탈이 담긴 ‘능가경’과, 울분과 이상을 신비와 환상으로 달랬던 굴원의 ‘초사’를 가까이 둔 까닭일 것이다. 인적이 끊긴 집 안에서 노비 같은 행색을 한 ‘비루먹은 개’에 자신을 비유하며 스스로를 자조하고 있다. ‘자조’와 ‘자존’은 받침 하나 차이다. 성인(聖人)을 따른다는 의미를 담고 있는 ‘진술성(陳述聖)’, 높고 높은 ‘태화산’, 땅을 가르고 우뚝 솟아 단번에 ‘견우성과 북두성’ 등을 비유로 끌어온 걸 보면 이하의 자존과 긍지는 하늘을 찌르는 듯하다. “하늘의 눈은 언제 열려/ 옛 검(劍) 한번 크게 울어 볼 것인가”에서는, 진상을 위로하는 시이기에 희망을 버릴 수 없다고 말하고 있는 듯하지만 이하 스스로는 이미 그것이 비루한 희망임을 깨닫고 있는 듯하다.

회재불우(懷才不遇, 재주를 가지고도 때를 만나지 못함)는 불우한 문인들의 단골 수식어다. 두보(杜甫, 712-770) 역시 “시는 시인의 운명이 완성되는 것을 증오한다.”라고 했다. 하늘은 이하에게 ‘귀재(鬼才)’를 주어 ‘시귀(詩鬼)’라 불리게 한 대신, 그의 짧은 인생을 받아 갔다. 너무 일찍 인생의 모든 것을 알아 버린 젊디젊은 이하는 이렇게 읊조렸다. “아득하여라 인간 세상 몇 점의 안개 같아/ 파도치는 바다도 술잔 속에서 출렁이네”(‘꿈속에서 하늘에 오르다(夢天)’), “이 하루 천 년처럼 길어/ 영원히 저물지 않는다”(‘후원 우물을 파는 노래(後園鑿井歌)’). “하늘도 정이 있다면 하늘 또한 늙지 않겠는가(‘금동선인이 한나라를 떠나며 부르는 노래(金銅仙人辭漢歌)’)”……. 사무치면서도 호쾌한 불후의 구절들이다. 이하는 자신의 불우를 이렇게 완성했다.

이하에게 청춘은 뭘 해도 안 되는, 뭐조차도 해 볼 수 없는 회재불우 그 자체였다. 그런 청춘에게 청춘마저 저물어 간다는 것은 얼마나 잔인한 일이었을까. “청춘은 곧 저물어 가는데/ 어지럽게 떨어지는 복숭아꽃잎은 쏟아지는 붉은 비 같아라”(‘술을 권하며(將進酒)’)라는 구절이 아픈 까닭이다. 아무리 ‘아프니까 청춘’이라지만, 불운한 청춘들이 복사꽃잎처럼 쏟아지는 시대는 고금을 막론하고 잔인한 시대임에 틀림없다. ‘88만 원 세대’, 연애․결혼·출산을 포기해야 하는 ‘삼포 세대’로 불리는 이 시대의 청춘들에게 정철(鄭澈, 1536-1593)의 ‘장진주(將進酒)’를 빌려 말하노니 “그 누가 한잔 먹자고 하겠는가?” 말하자면, 이하! 생략이다.

이하 (李賀, 790-816) 중국 당나라 시인이다. 허난성 복창(福昌) 사람으로 자는 장길(長吉)이며 당나라 황실 자손으로 알려져 있다. 한유(韓愈)에게 재주를 인정받은 연유로 한유의 문제(門弟)로 취급당하고 있으나 중당(中唐)에 있으면서 만당적(晩唐的) 시풍을 내세웠다. 색채감이 풍부하고 예리하면서도 감각적인 시를 지었고 염세주의적인 차가운 눈으로 유귀(幽鬼)를 즐겨 다루어 ‘유귀에 재주가 있다’라고 평해졌다. 의전(儀典)을 담당하는 봉예랑(奉禮郞)을 지낸 것 외에 다른 관직에는 있지 않았으며 스물일곱 살의 젊은 나이로 죽었다.

정끝별 (시인, 대학교수) 1988년 <문학사상>에 시가, 1994년 <동아일보> 신춘 문예에 평론이 당선된 후 시 쓰기와 평론 활동을 병행하고 있다. 시집으로 <자작나무 내 인생>, <흰 책>, <삼천갑자 복사빛>, <와락>, 시론·평론집 <패러디 시학>, <천 개의 혀를 가진 시의 언어>, <오룩의 노래>, <파이의 시학> 등이 있다.

출처 : 네이버캐스트> 문학 광장> 세계의 명시 2012.0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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