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 산책

쇤베르크 ‘펠레아스와 멜리장드’(Schoenberg, Pelleas und Melisande, Op.5)

라라와복래 2018. 8. 31. 02:14

Schoenberg, Pelleas und Melisande, Op.5

쇤베르크 ‘펠레아스와 멜리장드’

Arnold Schoenberg

1874-1951

Claudio Abbado, conductor

Gustav Mahler Jugendorchester

Grosser Saal, Musikverein, Wien

2006.04.24-25


Claudio Abbado/GMJO - Schoenberg, Pelleas und Melisande, Op.5


20세기 초반, 벨기에의 시인이자 극작가인 마테를링크(Maurice Maeterlinck, 1862-1949)가 지은 사랑 이야기에 여러 작곡가들이 한꺼번에 너도나도 곡을 붙이는 사태가 벌어졌다. 마테를링크가 1892년에 지은 희곡 『펠레아스와 멜리장드』는 같은 이름을 달고 드뷔시에 의해 오페라로, 포레와 시벨리우스에 의해 연극의 부수음악으로, 그리고 쇤베르크에 의해 단악장 교향시로 형상화되었다. 이들 중에서 음악사적 가치가 가장 큰 것은 드뷔시의 오페라이지만, 필자는 쇤베르크의 작품을 더 자주 찾아 듣는 편이다. 쇤베르크의 음악성이 뛰어나기도 하지만, 원작의 상징적인 어법을 볼 때 그저 기악음악으로 즐기는 것이 더 나은 것 같아서이다.

극의 내용은 이렇다. 알몬드 왕국의 왕인 아르켈의 손자인 골로 왕자가 사냥을 나갔다가 샘가에서 만나게 된 소녀 멜리장드를 억지로 데려와 아내로 삼는다. 그러나 멜리장드는 골로의 이복동생이자 더 젊은 펠레아스와 사랑에 빠진다. 펠레아스가 그 고장을 떠나던 날 별빛 아래 서로 껴안고 키스하던 둘은 골로에게 들키고 만다. 펠레아스는 골로의 검에 쓰러지고 멜리장드도 마음의 상처 때문에 갓난아이를 남긴 채 죽는다.

『펠레아스와 멜리장드』는 내용상으로만 보면 『트리스탄과 이졸데』와 매우 흡사하지만, 극도로 암시적이고 몽환적인 어법이 세기말의 독특한 향기를 풍기고 있다. 일단 이야기의 배경이 되는 시대와 장소가 현실적이지 않다. 알몽드란 왕국은 작가가 지어낸 것이며, 왕국 안에 설정된 숲과 샘 모두 가상의 공간인데, 마치 영화 「반지의 제왕」에 등장하는 신비로운 장면을 보는 기분이다. 그리고 캐릭터의 설정이 비현실적이다. 특히 길이가 2미터는 됨직한 멜리장드의 긴 머리카락이 작품의 트레이드마크처럼 되어 있다. 성 안의 탑 위에서 멜리장드의 황금빛 머리가 풀려 펠레아스의 몸을 덮는 설정은 그야말로 판타지와도 같다. 한 편의 감각적인 샴푸 CF를 보는 듯한 이 장면은 희곡 『펠레아스와 멜리장드』 하면 떠오르는 하나의 상징이 되었다. 드뷔시의 오페라 <펠리아스와 멜리장드> 3막 1장의 대본을 잠시 인용해본다.

펠레아스 내게 그대의 손을 줘요.

멜리장드 (탑 위에서) 여기, 여기... 더 이상 숙일 수 없어요.

펠레아스 내 입술이 그대의 손에 이르지 못하는군요.

멜리장드 더 이상 몸을 숙일 수 없어요. 탑 아래로 떨어질 것 같아요. 오! 내 머리카락들이 탑 아래로 떨어져요. (그녀가 몸을 깊이 숙이자 갑자기 머리카락이 풀려 펠레아스를 감싼다.)

펠레아스 오! 이것이 뭐죠? 당신의 머리카락, 당신의 머리카락이 내게로 오고 있군요. 당신의 머리카락 전부가 탑에서 내려와버렸어요. 내 손으로, 내 입술로, 내 목으로 느끼고 있어요. 오늘밤 당신의 머리카락에서 손을 떼지 않을 거예요.

멜리장드 놔줘요! 당신은 날 떨어뜨릴 거예요.

펠레아스 아니오. 난 당신과 같은 머릿결을 이전에 결코 보지 못했어요. 멜리장드, 봐요. 당신의 머리카락이 내려와서 내 심장을 덮고 있어요. 심지어 무릅까지도 감싸고 있지요. 하늘에서 내려온 양 너무나 부드러워요. 두 손 위에 살아 숨쉬는 새와도 같아요. 그대의 머리카락 때문에 하늘을 볼 수가 없어요. 당신은 보고 있나요? 내 손이 머리카락 전부를 잡을 수가 없어요. 그것은 버드나무 가지 위에서 퍼지고 있어요. 당신의 머리카락이 나를 사랑해요. 당신보다 나를 사랑하는 것 같아요.

멜리장드 놔줘요! 누가 올지 몰라요.

펠레아스 아니오. 오늘밤 그대를 놓지 않을 거예요. 당신은 나의 감옥 속 죄수예요. 밤새도록. ▶카를로스 슈바베, <펠리아스와 멜리장드>

쇤베르크의 교향시 <펠레아스와 멜리장드>는 그를 카바레의 노동에서 구출해준 리하르트 슈트라우스(Richard Strauss, 1864-1949)에 대한 오마주와도 같다. 4관 편성의 거대한 오케스트라, 담쟁이덩굴처럼 복잡하게 얽힌 여러 내성부를 보건대 작법이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와 매우 흡사하다. 1901년 결혼한 쇤베르크는 생계를 위해 베를린의 카바레에서 편곡자 겸 지휘자로 일하던 중 이 작품을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에게 보여주었다. 이 곡에 감명받은 슈트라우스는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여 쇤베르크가 기금 혜택을 받게 해주었고 음악원에서 작곡을 가르칠 수 있도록 주선해주었다. 덕분에 쇤베르크는 카바레 일을 그만두게 된다.

쇤베르크의 음악은 일반 음악애호가에게는 공포의 대상이다. 그가 개발한 무조음악이니 12음음악이니 하는 것은 역사적 의의가 크기 때문에 음대 재학생의 리포트 대상으로는 적절할지 몰라도 감상용으로는 무난한 음악이라 할 수 없다. 다만 그의 초기 작품들은 낭만적인 기풍으로 부담 없이 추천할 수 있는데, <정화된 밤>과 <펠레아스와 멜리장드>가 바로 그런 부류에 속한다.

<페레아스와 멜리장드>를 완성했을 때 쇤베르크는 28세였다. 이 곡은 정식 음악교육이라고는 쳄린스키(Alexander von Zemlinsky, 1872-1942)에게 대위법 수업을 3개월 받은 것이 전부인 청년의 작품치고는 대단한 완성도를 보여준다. 재능이 있는 자는 어느 누구의 지도 없이도 스스로 길을 찾아가도록 되어 있는 듯하다. 필자는 종종, 쇤베르크가 무조음악에 빠지지 않고 낭만적인 곡들을 좀 더 많이 남겼더라면 하는 아쉬움을 느낀다.

전곡은 하나의 악장으로 되어 있지만, 세부적으로 나누면, 소나타 형식의 제시부, 스케르초, 아다지오, 재현부와 피날레의 요소로 구성되어 있다. 쇤베르크는 초기에 4악장이 1곡으로 연결된 이른바 ‘4 in 1’ 형태의 구성을 좋아했다. 현악 4중주 1번, 실내 교향곡 1번이 모두 ‘4 in 1’ 형식으로 작곡되었다. 쇤베르크 자신의 해설에 의하면, 12/8박자의 도입부는 신비로운 소녀인 멜리장드의 캐릭터를, 스케르초는 멜리장드가 펠레아스 앞에서 반지를 가지고 장난하는 장면을 의미한다. 그리고 아다지오는 멜리장드의 기다란 머리카락과 두 연인이 벌이는 사랑의 장면을, 피날레는 멜리장드의 죽음을 그린 것이다.

이 곡은 음악 기법상 많은 라이트모티프*와 복잡한 폴리포니(다성음악) 스타일로 감상자의 높은 지적 수준을 요구한다. 하지만 전체를 몽환적인 하나의 상징으로 받아들인다면, 이미 곡을 제대로 파악한 것이나 다름없다.

*라이트모티프(Leitmotive): 특정 인물, 상황, 장면을 표현하는 음악적 모티프(동기)를 일컫는다. 영화나 드라마 속 특정 상황마다 흘러나오는 반복적인 선율을 생각하면 된다.

Schoenberg, Pelleas und Melisande, Op.5

Lahav Shani, conductor

Orchestre philharmonique de Radio France

Auditorium de la Maison de la Radio, Paris

2018.05.18

김문경 (변리사·음악 칼럼니스트) 서울 출생. 서울대학교 약학대학 제약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석사, 박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특허청 특허심사관으로 재직했으며 현재 심포니 해설가 및 음악 칼럼니스트로 활동 중이다. 저서로 『김문경의 구스타프 말러』, 『클래식으로 읽는 인생』, 『20세기의 위대한 지휘자』, 『천상의 방랑자』 등이 있다.

출처 : 김문경, 『클래식으로 읽는 인생』(밀물, 2006) pp. 51~5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