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트 살롱

[그림으로 읽는 철학] 폴 고갱 ‘신의 아이’

라라와복래 2011. 3. 14. 01:39
 

 

 

[그림으로 읽는 철학]

폴 고갱 ‘신의 아이’

불행한 ‘문제적 인간’들의 성모

이주향 | 수원대 교수ㆍ철학


폴 고갱 ‘신의 아이’, 테 타마리 노 아투아(Te Tamari No Atua)

캔버스에 유채, 92*128㎝, 1896년, 노이에 피나코테크, 뮌헨


대부분의 우리는 그럭저럭 사회에 적응하며 삽니다. 사회가 요구하는 가치관을 내재화하면서 피상적으로 사는 거지요. 그러나 그렇게 살 수 없는 사람들, 소위 ‘문제적 인간’들이 있습니다. 왜 그런 거 있지요? 잘 먹고 잘 살아도 늘 허기진 느낌, 누릴 거 다 누리고 살아도 홀가분하지 않은 느낌, 도시라는 거대한 감옥에 갇힌 죄수 같은 느낌, 그 느낌 속에서 숨 쉬는 직관의 불씨를 살리는 사람들 말입니다. 현자일 수도 있고, 예언자일 수도 있고, 예술가일 수도 있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을 보면 인생은 세계가 제기한 하나의 물음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19세기 말 고갱은 화려한 파리의 불빛을 등지고 남태평양의 작은 섬 타히티로 걸어 들어갑니다. 아마도 고갱은 세계 최고의 문명이 갑갑하고 답답했나 봅니다. 여기가 내 땅이 아니란 느낌, 원시의 자연을 찾고픈 느낌을 따라 그는 홀연히 떠납니다. 그의 몸속에 흐르고 있었던 잉카 문명의 피가 뜨거운 원시의 땅으로 그를 인도했는지도 모릅니다.


거기서 고갱은 원주민 소녀를 만났습니다. 고갱의 그림 속에 자주 등장하는 성숙한 소녀 파우라, 그녀가 고갱의 마리아입니다. 저 독특한 그림 ‘신의 아이’는 검은 피부가 아름다운 파우라가 임신을 했을 때 그린 그림이라지요.


흰 옷을 입고 아기를 안고 있는 여인이 산파겠지요? 제목이 ‘테 타마리 노 아투아(TE TAMARI NO ATUA_신의 아이)’인 걸로 봐서 아이를 낳고 누워 있는 저 여인이 동방의 현자들이 경배하고 모든 어머니들이 손을 모으는 성모인가 봅니다.


서양 예술에서 성모는 거룩하고 온화한 이미지지요? 저 그림이 독특한 것은 성모가 성스럽지도, 온화한 성품을 드러내지도 않는다는 겁니다. 오히려 아이를 낳느라 탈진한 듯 고단하게 누워 있습니다. 하늘에서 영광이 내려 온 것인데, 영광의 중심에 있는 성모는 기진맥진해 있습니다.


저 그림을 보면서 깨달은 게 있습니다. 그래, 성모는 하얀 피부의 백인처녀일 필요가 없어. 그래, 성모는 언제나 인내하는 자세로만, 고요한 자세로만, 기도하는 자세로만 존재해야 하는 게 아니야. 성모는 힘겨울 때는 힘겨운 채로 자연스러운 어머니야. 그런 의미에서 저 그림은 혁명적입니다. 나는 무엇보다도 기진맥진 아이를 낳고, 이젠 쉬어도 좋다고 생각하는 것 같은 여인의 몸의 고요가 좋습니다.


그러고 보니까 침대 아래 소와 나귀가 저 여인이 아이를 낳은 곳이 마구간임을 알려주네요. 영광의 마구간답게 날개 달린 타히티인 형상의 천사까지 아이의 탄생을 축복하고 있습니다. 외형상은 누추한 마구간이지만 신의 아이가 태어난 빛나는 곳임을 강조하기 위해 고갱은 침대에 화사한 노란색을 쓴 거 같지요. 그리고 발치의 흰 고양이까지.


성모의 발치에 흰 고양이, 재미있지 않나요? 어울립니다. 고양이는 원형적인 힘을 부여받은 최초의 동물이었습니다. 깜빡임이 없는 눈 때문에, 그리고 깜깜한 밤에도 볼 수 있기 때문에 고양이는 예지자의 상징이기도 했습니다. 한편에서 고양이는 본능적이고 파괴적인 마녀이기도 했지만 본능을 감추지 않고 억압하지 않는 자에게 고양이는 신성한 존재였습니다. 그러니까 육체를 긍정하는 자에게 고양이는 신성한 충동인 것입니다. 실제로 이집트 신화에서 고양이 여신 바스테트는 신성한 생명의 신입니다.


신의 아이는 마구간에서 태어납니다. 마구간은 화려한 궁전도 아니고, 시설이 잘 된 산부인과 병동도 아닙니다. 마구간은 동물들이나 사는 누추하고 지저분한 공간입니다. 그 마구간에서 태어난 신을 보는 순간 우리는 깨닫습니다. 진흙 속에서 연꽃이 피는 이치를. 지금 시끄럽고 어수선한 내 마음의 마구간이 신의 아이의 산실일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사실 타히티에서 고갱은 충분히 불행했습니다. 타히티까지 밀려들어온 조악한 문명 때문에 당황했고, 가난 때문에 조급했으며, 아이의 죽음 때문에 고통스러웠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상처를 입어도, 아무리 고통스러워도 그것이 엄연하게 받아들여야 할 이 땅의 ‘나’의 생이란 생각이 들면 그 상처와 고통을 값싼 안락과 가짜 행복과 바꾸지 않는 것, 그것이 문제적 인간들의 성향이라고 나는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