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트 살롱

[그림으로 읽는 철학] 밀레의 ‘만종’

라라와복래 2011. 4. 4. 03:21
 

 

 

[그림으로 읽는 철학]

밀레의 ‘만종’

생활의 힘

이주향 | 수원대 교수ㆍ철학

 

장 프랑수아 밀레, ‘만종’

1857~59년, 캔버스에 유채, 55.5×66㎝, 오르세 미술관, 파리

 

저기, 무슨 말이 필요할까요? 그저 한 번 따라해보고 싶습니다. 시야를 가리는 것이 없는 넓은 평야에 서서, 멀리서 들리는 은은한 저녁 종소리에 맞춰 홀린 듯이 손을 모아보는 일! 편안한 신발, 편안한 옷이면 좋겠습니다. 감자밭을 뒹굴어도 아깝지 않은! 일을 하고 손을 모으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를 아는, 편안한 사람과 함께라면 더 좋겠지요? 맨얼굴이 부끄럽지 않고, 격식을 차리지 않은 옷을 누추하게 느끼지 않는 좋은 사람과! 아, 땀 흘려 일한 직후라면 더더욱 좋겠습니다. 모자를 벗고 고개를 숙이고 손을 모으는 행위에 좀 더 힘이 붙을 테니까요.


저기 저 밀레의 만종엔 소박한 시골생활의 힘이 있습니다. 우아하고 품위 있게 살게 하지는 못하지만 땅을 살피고 생명들을 보살피고 종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살게 하는 힘! 그러다 보면 직관을 믿게 되고 내면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게 되고 매사 감사하게 되지요.


그래서 고흐가 그토록 저 그림을 좋아했나 보지요? 고흐가 사랑한 그림들이 있습니다. 행복으로 충만한 여자의 표정과 남자의 손동작이 인상적인 ‘유대인 여자’, 그리고 저 그림 ‘만종’입니다. 그러고보니 저 그림의 정서가 ‘감자 먹는 사람들’과 통해 있지 않습니까? 산다는 것이 가난을 뜻한다 해도, 그 누구에게도 주목받지 못하는 보잘것없는 것이라 해도 생을 아끼며 사랑하며 누리며 기꺼이 받아들이고 있는 사람들의 건강함 말입니다.

 

만종에 관한 풍문을 들었습니다. 저 감자 바구니가 원래는 아기의 관이었다나요? 누가 그런 얘기를 하나 했다니 어마어마하게도 그 근원에 살바도르 달리가 있네요. 저 그림을 본 달리는 뭔지 모를 불안감을 느꼈다고 합니다. 달리답습니다. 그 불안감은 적중해서 원래 저 바구니에 담겨 있었던 것은 감자가 아니라 배고픔을 참지 못하고 죽은 아이의 시신이었다는 거지요. 그것을 끔찍하게 여긴 밀레의 친구가 바꾸라고 조언해서 밀레가 바꾼 거라는 겁니다.


그 얘기를 읽으며 웃었습니다. 세상에, 그렇게 드라마를 만들기 전에는 저렇게 손을 모으는 일이 이해되지 않는 사람들이 있으니까요. 하긴 매일매일 밭을 갈고 생명을 돌보는 사람에게만 생기는 생에 대한 감수성 없이 밀레를 이해하기는 힘든 일입니다. 아마 달리는 ‘감자 먹는 사람들’을 보고도 불안감을 느꼈을 겁니다. 달리의 그림들을 보면 모든 선이 불안으로 흐르지 않나요? 밀레의 그림을 패러디한 달리의 ‘atavism at twilight’를 보십시오. 불안은 달리에게 친숙한 정서입니다.


나는 분명히 말할 수 있습니다. 달리의 감성은 밀레를 이해할 수 있는 감성이 아니라고. 자연을 믿고 운명을 믿고 가난하고 소박한 생활에 감사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의 정서가 그에게는 낯설고, 그래서 불안할 수밖에 없습니다.


밀레는 다릅니다. 밀레는 가난하고 소박한 삶이 불편하지 않은 정서 속에서 나서 자란 사람입니다. 밀레는 생에 감사하는 농부들을 그리게 된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옛날에 저녁종이 울리면 할머니는 언제나 일손을 멈추고 감사의 기도를 드렸어!”


저렇게 기도하는 손이 삶의 중심인 한 저들을 무너뜨릴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 저들이 손을 모으는 것은 사람이 약해서 종교로 도망가는 일이 아닙니다. 저들은 사람을 믿고 생명 있는 것을 믿고 자연을 믿어서 초자연의 신비를 뱃심으로 간직하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소소한 일상에서도 감사할 줄 아는 사람들입니다.


그러고보니 우리나라 사람들이 저 그림 ‘만종’을 좋아하는 이유를 알 것 같지요? 교과서에 나와 있는 유명한 그림이어서가 아니라 만종의 정서에 친숙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유전자는 어머니가, 어머니의 어머니가 매일 새벽 정화수를 떠놓고 하늘에 기도하고 땅에 기도하는 일이 어떤 일인지 알고 있으니까요. 그래서 박수근이 밀레를 좋아했고, 밀레를 좋아하는 우리가 박수근을 좋아하는 겁니다.

 

 

[이하는 라라와복래 글입니다~] 사소한 것 먼저. '만종'이 무슨 말? 한자로 '晩鐘'이니 우리말로는 '저녁종'쯤 되겠죠. '저녁종'이라고 번역한 책도 있더군요. 그러니까 성당이나 절에서 저녁 무렵 하는 타종을 말합니다.


원제목인 'L'Angélus'는 정확하게 '삼종기도'를 뜻합니다. 삼종기도는 가톨릭에서 하루 3번 하던 일을 잠시 멈추고 기도를 하는 하루 일과 중의 하나입니다. '삼종(三鍾)'에서 3이라는 숫자는 하루 세 번이라는 숫자라기보다는 3번 종 치고 잠시 멈추었다가 3번 다시 치는 식으로 계속되는 타종의 의미입니다.


저녁 삼종기도는 6시쯤 바칩니다. 그림 속 장면은 해가 저무는 시간 때의 기도 모습입니다. 이 시간이 노동을 마치는 시간입니다. 그걸 우리말로 번역할 때, '저녁에 종소리를 들으며 드리는 기도'라는 의미로 '만종'(晩_ 저물 만)이라 번역한 것 같습니다.

 

워낙 유명한 그림이니 오래 전부터 우리나라에 알려졌을 것이고, 그래서 고어풍이 나는 제목 '만종'이 붙었을 것입니다. 원 제목대로 '삼종기도'라고 하면 어색하고 운치도 없어 보입니다.


밀레가 이 그림을 그린 배경이 있습니다. 이주향 교수가 언급한 밀레의 말을 좀 더 소개합니다.


‘만종'은 내가 옛날의 일을 떠올리면서 그린 그림이라네. 옛날에 우리가 밭에서 일할 때, 저녁종 울리는 소리가 들리면, 어쩌면 그렇게 우리 할머니는 한 번도 잊지 않고 꼬박꼬박 우리 일손을 멈추게 하고는 삼종기도를 울리게 하셨는지 모르겠어. 그럼 우리는 모자를 손에 꼭 쥐고서 아주 경건하게 고인이 된 불쌍한 사람들을 위해 기도를 드리곤 했지."


삼종기도 기도문 내용 중에, 정확히는 이 기도문 중의 ‘성모송’ 가운데 "이제와 우리 죽을 때에 우리 죄인을 위하여 빌어주소서" 하는 구절이 나옵니다. 위 글 마지막 문장이 바로 그것을 뜻합니다.

 

'만종'만큼 사람들에게 오랫동안 감동을 준 작품도 드물 것입니다. 라라와복래 자랄 때 이발소에 가면 이 그림이 꼭 걸려 있었습니다.~~ 이른바 '이발소 그림'이라 했지만, 화가 박수근은 그런 밀레의 '만종'을 보고 밀레 같은 화가가 되게 해달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그런 화가가 되었습니다.

 

왼쪽 그림은 밀레의 ‘만종’을 재현한  달리의 ‘Atavism at Twilight’. atavism은 격세유전(隔世遺傳)이란 뜻인데... 제목도 알쏭당쏭하네요... 아무튼 달리 특유의 편집증적 집착이 무서버요^^


그림 속 감자 바구니가 원래는 아기의 주검이 들어 있는 관이었다는 이야기는 달리의 그림이 나온 후 급속히 세간에 퍼져 나갔는데요, 그러자 결국 루브르박물관이 자외선 투사작업을 하여 밑그림에서 그런 사실을 밝혀냈다는 둥 근거 없는 맹랑한 이야기가 인터넷에도 파다.

걍, 흘려듣고 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