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아귀에 힘을 주어 현재를 움켜쥐리라”
秋燈菴倦懷千古 등잔 아래 책을 덮고 지난 역사 헤아리니
難作人間識者人 글 아는 사람 구실 정녕 어려워라
구한말 한일합방에 항거하며 자결한 황현(黃玹)의 절명시다. 요즈음이야 소설가든 기자가 되었든 아무튼 글 쓰는 짓이 생업이 된 사람들에게 ‘사회적 책임’에 대해서 말하면 속으로는 이제 그럴싸한 상황이 되었다고 생각할지라도, 겉으로는 말짱하게 시치미를 떼면서 “웬 그런 부담스러운 말씀을…” 하면서 계면쩍어할지도 모르겠다. 사르트르의 <지식인을 위한 변명> 같은 문고판도 낡은 책이라서 내 서가의 구석에서 얼룩진 채 숨어 있으니까. 그렇다고는 하여도, 우리네 살림처럼 청천 하늘의 별만큼 수심이 가득한 고장에서는 혼자서 붓을 들고 유유자적하기가 마음 편한 노릇은 아닐 것이다.
신인작가로서 무명의 몇 년 동안을 견디던 1970년대 초반에 단편소설 ‘낙타누깔’을 발표하기까지 내가 겪은 우여곡절과 굴욕은 지금도 잊지 못한다. 단편이 완성되어 문예 월간지 <현대문학>에 주었는데 소식이 없어서 전화를 했더니 김수영 시인의 매씨인 김수명 편집장이 만나서 얘기 좀 하자고 그랬다. 현대문학 측에서는 이전에 남정현의 ‘분지’가 반공법에 저촉되어 작가의 구속과 함께 재판까지 갔던 적이 있어서 회의 결과 ‘낙타누깔’을 못 싣겠다는 것이었다. ‘낙타누깔’은 베트남 전쟁에 나갔던 병사의 귀향을 다룬 것으로 한국군 참전의 윤리적 측면을 비판하는 내용이었다. 당시 정권의 성격상 군과 관련된 내용은 매우 민감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한두 군데를 돌아다니다 드디어 가톨릭출판사에서 나오는 <창조>지에 싣기로 했다. 원고료를 받으러 가던 날은 마침 생활비가 딱 떨어져서 무엇보다도 아직 갓난아기였던 큰아들의 우유를 사와야 했다. 화가인 후배에게도 소주 한잔 살 테니 함께 가자 청했다. 명동성당 구내의 잡지사로 갔더니 주간인 구중서 평론가가 수심이 가득한 표정으로 나와 원고를 되돌려주었다. 전달에 실었던 김지하의 ‘비어’ 사건으로 시인은 체포되고 잡지가 폐간 처분당했다는 것이다. 낙담도 했고 분노도 치밀어서 그림쟁이 후배와 함께 소주를 마시다가, 이제부터 글 써서 먹고사는 짓 더러워서 때려치우겠다! 하며 원고를 절반으로 접어 북 찢는데, 녀석이 자기가 화장실에 갖다 버리겠다면서 빼앗아들고 사라졌다. 이튿날 술과 잠에서 깨어나니 후회막급에 스스로 부끄러워서 심사가 괴로웠다. 이까짓 일로 작품을 찢어버렸으니 소설가의 자격 상실이라고 생각했다. 그날 오후에 다행히도 그 친구가 스카치테이프로 정성스레 붙인 원고를 들고 나타났고, ‘낙타누깔’은 몇 달 뒤에 이문구 소설가가 맡았던 <월간문학>에 실리면서 세상에 나올 수 있었다. 이런 숨바꼭질은 해방이 된 뒤에도 수십 년 동안 한국의 작가 시인들에게는 거의 일상적인 일이었고, 일제 강점기에는 더욱 암담한 조건이었을 것이다.
현진건의 세련된 단편소설을 읽는 맛도 좋지만, 그의 생애를 더듬어보면 이 땅에서 ‘글쟁이’를 업으로 선택한 사람들의 삶이 함께 떠올라서 가슴이 뭉클해진다.
그는 구한말의 역관(譯官)인 중인층 집안에서 1900년에 태어났다. 현진건의 일가친척은 외국어에 능통했기 때문에 모두들 개화기에 번성했으며, 부친이 대구 우체국장으로 부임하여 현진건은 대구에서 출생했다. 아홉 살에 어머니를 잃었고 열네 살에 향리 부호의 딸인 두 살 위의 이순득과 결혼한다. 그는 일본의 세이조 중학교를 나와 아무도 모르게 셋째형이 있는 상해로 건너간다. 큰아버지의 아들인 현정건은 6개 국어에 능통한 사회주의자였고 상해에서 대한청년단 간부로 독립운동에 투신하고 있었다. 현진건은 어려서부터 정건을 존경하고 따랐으며 많은 영향을 받았다. 그는 상해 호강대학 독일어학과에 입학했으며 중국 대륙을 방랑한다.
현진건은 대한제국 공병장교였던 자식 없는 당숙 현보연에게 양자 입적되어 서울로 오면서 본격적인 문학 창작에 매진한다. 1920년 <개벽> 잡지에 ‘희생화’로 등단했고 이듬해에 ‘빈처’를 발표하면서 주목받고 ‘백조’ 동인으로 참여하고 조선일보에 취직한다. 연이어 시대일보를 거쳐 동아일보 사회부장이 될 때까지 그는 소설가와 기자라는 두 가지의 업을 가지고 있었다. 글만 써가지고는 먹고살 수가 없었으니 기자직과 겸업을 했는데 그것이 양날의 칼인 셈이었다. 현실을 포착하는 데는 기자직이 도움이 되었겠지만 소설가로서 널리 독서하고 집중해서 창작하기에는 여유가 많지 않았다. 또한 사건 현장을 통하여 식민지의 현실과 접하면서 술로 울분을 달래는 나날이었다. 일찍 얻은 두 딸을 차례로 잃었고 막내딸 하나만 자라나서 나중에 벗이었던 소설가 박종화의 며느리가 된다. 셋째형 현정건이 상해에서 검거 압송되어 1932년 감옥에서 옥사하자 형수도 그 뒤를 따라서 자결했고, 이는 당시 신문에 떠들썩하게 보도되었던 유명한 사건이었다. 형과 형수위 죽음은 그의 가슴속 깊이 각인되었다.
1936년 동아일보 사회부장 재직 중에 베를린 올림픽에서 우승한 손기정 선수 사진의 일장기를 말살한 사건의 주동자로 현진건은 검거 투옥된다. 징역을 살고 나와 그는 다시는 신문사로 돌아가지 못하고 관훈동 집을 팔고 자하문 밖 부암동에서 양계장을 시작한다. 이 기간에 그는 신라 시대에 석가탑을 짓던 아사달과 그의 아내 아사녀의 비련을 그린 역사소설 <무영탑>을 완성했지만, 국권을 회복하려는 백제 장수를 주인공으로 했던 <흑치상지>의 연재는 강제 중단당했으며, 그의 단편집 <조선의 얼굴>은 총독부에 의해 압수 처분되었다. 역시 일상에는 서툴러서 양계장 실패로 집도 팔고 제기동의 초가로 이사하고 이후 절필하여 지조를 지키며 극도의 가난 속에서 연명한다. 1943년 현진건은 지병이었던 결핵으로 죽어 제사를 받들 후사도 없이 화장되어 한강에 뿌려지고, 이듬해 친정으로 돌아간 그의 아내도 뒤를 따르듯 사망한다.
현진건은 당대의 문우들로부터 ‘조선의 체호프’라는 평을 들을 정도로 문장과 구성에서 짜임새가 뛰어난 단편의 명장(名匠)이었다.
“과거를 더듬으며 한숨이나 쉴 일이 아니오, 미래를 바라보며 팔만 벌리고 있을 것이 아니다. 손아귀에 단단히 힘을 주어 현재를 움켜쥘 것이다”라는 그의 말과 같이 리얼리즘을 자신의 작품세계로 규정했다. 현진건의 작품들은 대개 초기의 자전적 신변 소설에서, 차츰 당대 민중과 사회로 넓혀가는 현실 인식을 보여주며, 혹독한 일제 말기에는 민족주의를 고양시키는 역사소설을 쓰게 된다.
나는 ‘빈처’와 ‘술 권하는 사회’도 좋아하지만 역시 ‘운수 좋은 날’과 ‘고향’ 같은 작품이 현진건 단편의 정수라고 보았다. ‘운수 좋은 날’은 어쩐지 손님도 잘 걸리고 돈도 다른 날보다 많이 벌리는 한 인력거꾼의 행보와 함께, 몽타주처럼 집에서 홀로 앓아누운 아내의 이야기가 겹쳐서 진행된다. 그것은 마치 스릴러 영화같이 불길하게 독자를 사로잡는다. 왠지 재수 좋은 주인공의 일거수일투족이 믿음직하지 않고 불안한 까닭이다. 드디어 아내가 그렇게 먹고 싶다던 설렁탕을 신바람 나게 사가지고 김 첨지가 돌아왔을 때, 안 나오는 젖을 빨며 울다 지친 아기를 안은 채로 아내는 눈의 흰자위를 드러내고 절명해 있다는 반전으로 끝난다.
나는 이제 다시, 저 쓸쓸하게 죽어간 식민지 시대의 한 소설가를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