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 팔고 땅 팔아서 모조리 바쳤건만
19세기 미국의 ‘골드러시’는 캘리포니아와 알래스카에서 거의 같은 시기에 일어났다. 1848년 샌프란시스코의 아메리칸 강에서 금이 발견되자 수많은 이민자가 동부에서 포장마차를 타고 서부를 향하여 대륙을 횡단하고 로키산맥을 넘었다. 우리가 서부영화에서 흔히 보던 광경이다. 당시 이동 과정에서 2만 명이 사망했다고 할 정도로 힘든 여정이었다. 세계적으로 소문이 나자 유럽·중남미·하와이에서도 몰려들었고, 중국에서도 25만 명의 쿨리(苦力)가 몰려갔다. 골드러시가 일어나기 전 캘리포니아의 인구는 15만 명에 지나지 않았는데 이후 50만 명에 달했다고 한다. 이때의 적극적인 채금에 의하여 연간 1톤 남짓 하던 미국의 금 생산량은 55톤으로 늘었다. 이처럼 엄청난 금 생산량에 따라 미국은 금본위제를 채택하고 금 교역량을 세 배나 늘려 자본주의 세계시장에서 패권을 차지한다.
유니버설 사에서 제작하여 30년대의 식민지 조선에서 변사의 해설과 함께 상영되었고, 한국전쟁 이후 할리우드 영화 전성기에 되풀이 보아왔던 찰리 채플린의 <황금광시대>는 알래스카의 골드러시를 배경으로 한 무성영화였다. 겉으로는 소란스럽고 동작이 과장된 슬랩스틱 코미디지만 이 영화는 채플린의 <모던 타임즈>와 함께 비판적 리얼리즘 계열의 걸작으로 평가된다. 광부들의 오두막에서 벌어지는 빈곤과 굶주림이 희극적으로 묘사되는데, 특히 구두를 삶아먹는 장면이며 난로에 발을 넣어 굽는 장면 등이 인상적이다. 일제 말 징용을 다녀왔다는 체험담이 요즈음의 군대 얘기 정도로 성행했는데, ‘내가 이래 뵈어도 구주 탄광에서 지까다비(작업화) 삶아먹고 일주일 살던 사람이야’라는 농담에서 그 영향을 눈치 챌 수 있다.
1929년 미국의 대공황이 세계로 파급되자 일본도 극심한 공황에 휩쓸린다. 대공황은 아시아 식민지에는 더욱 큰 타격을 주었다. 제국주의 열강이 공황의 피해를 식민지 종속국에 전가해 본국 경제의 공황 탈출을 시도했기 때문이다. 농업공황이 특히 심했는데 대부분 단일작물을 재배한 식민지 농업이 받은 타격은 심각했다. 거기에 식민주의자와 지주들의 가혹한 봉건적 수탈 때문에 농민들은 토지를 잃고 유랑했으며, 도시나 산골로 몰려들어 광범한 토막민이나 화전민촌이 생겨났다. 바로 이 무렵의 식민지 한국이 그런 실정이었고 일제가 부족한 쌀까지 헐값으로 수매해 한국 농촌의 참상은 해마다 보릿고개에 아사자가 나올 정도였다.
일본은 독일·이탈리아와 같은 우익 파시스트 정당의 영향을 받아 ‘국가 개조’를 표방하고, 만주의 식민지화와 아시아에서의 전쟁 준비 등으로 극우화하면서 파시즘과 전쟁의 시대로 나아가게 된다. 불안한 환율을 버리고 금본위제를 선택한 일본은 군비 확충과 무기 수매를 위하여 황금 확보에 총력을 기울였다. 금광 탐사와 개발에 지원금을 쏟아붓고 시중의 금을 비싸게 매입하기 시작한 일본의 정책이 식민지 조선에 ‘골드러시’를 불러온 것은 당연한 노릇이었다. 그런 결과로 1931년 금광업은 100%에 가까운 성장률을 보였고 매년 50% 이상씩 초고속으로 성장하는 사업이었다. 드디어 일본은 식민지 조선의 금광 개발로 남아공·미국·소련·호주에 이어 세계 5대 금 생산국가가 됐다.
서른 살이 넘도록 품팔이나 하던 최창학이 평북 구성에서 금맥을 발견하여 5년 만에 1300만원대의 부자가 됐는데 이는 요새 가치로 1조3000억원에 이르는 돈이다. 평북 삭주에서 동아일보 지국을 하며 근근이 살던 방응모는 금광 덕대로 출발하여 지금 시세 1500억원에 이르는 150만원을 벌었고 이를 바탕으로 조선일보를 시작할 수가 있었다. 문인 지식인들도 금광으로 달려갔다. 카프의 대표 격이던 김기진이나 채만식, 이태준, 그리고 젊은 김유정도 금광 체험이 있을 정도였다. 채만식은 장편소설 <금의 정열>을 썼고, 이태준은 ‘영월영감’ ‘패강랭’ 같은 인상적인 작품을 썼으며, 김유정은 단편소설 ‘노다지’ ‘금 따는 콩밭’ ‘금’을 차례로 썼다. 이 작품이 나올 무렵인 1935년의 최고 베스트셀러는 <조선광업령요론>이었으니 당시의 민심을 미루어 짐작할 만하다.
김유정은 1908년 강원도 춘성군(춘천)에서 태어났다. 부친은 천석꾼을 웃도는 지주로 서울의 운니동에도 100여 칸 되는 집을 가지고 서울과 춘천을 오가며 생활했다. 유정이 일곱 살 때에 어머니가 작고했다. 휘문고보를 졸업하고 연희전문을 중퇴한다. 아버지마저 일찍 작고한 뒤에 장남인 유근이 집안을 돌보았으나 방탕한 생활로 전 재산을 탕진했다. 누이 집을 전전하면서 살던 중 1935년 ‘소낙비’가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되어 등단했다. 활발하게 작품을 발표하면서 구인회의 후기 동인으로 참가한다. 구인회는 초기에는 순수예술 동인으로 친목 모임의 성격이었지만, 김기림, 이태준, 정지용, 이주영, 박태원, 이상, 박팔양, 김유정, 김환태가 구성원이 되면서 모더니즘의 색채를 지닌 <시와 소설>이라는 동인지를 중심으로 활동하게 된다. 유정이 일정한 업을 갖지 못하고 어정쩡하게 ‘전업작가’를 하면서부터 폐결핵이 악화되기 시작해 원고료를 받아 약을 사먹으면서 글을 써야 했다. 죽지 않으려고 글을 쓰는 형국이 된 셈이다. 그가 왕성하게 단편소설을 발표한 시기는 죽기 전까지 겨우 2년에 불과했지만 30여 편의 작품을 남긴다. 죽기 며칠 전에 휘문고보 동창이며 친구였던 소설가 안회남(필승)에게 보낸 편지의 마지막 구절은 이렇듯 애절하게 끝나고 있다.
“필승아, 나는 지금 막다른 골목에 맞닥드렸다. 나로 하여금 너의 팔에 의지하여 광명을 찾게 해다우. 나는 요즘 가끔 울고 누워 있다. 모두가 답답한 사정이다. 반가운 소식 전해다우. 기다리마.”
동료 문인들이 문단에서 그를 돕자는 모금운동도 있었지만, 스물아홉 총각 김유정은 병마를 이기지 못하고 경기도 광주의 누님 집에서 임종을 맞았고 그의 시신은 유언대로 화장돼 한강에 뿌려졌다.
김유정의 단편들은 우리 옛이야기가 그렇듯 해학적이고 토속적이어서 예리한 현실비판을 하거나 세련된 형식미를 갖추고 있지는 않다. 그러나 그의 작품에 나오는 인물과 줄거리를 음미해보면, 질박하고 잔잔한 애조를 지닌 채 언제나 낙천적인 웃음을 잃지 않고 있어서 그야말로 ‘조선백성’의 살아가는 이야기이다. 나는 ‘봄봄’이나 ‘동백꽃’, 특히 ‘만무방’ 같은 작품을 좋아하면서 그런 물건들이 김유정답다고 생각하지만, ‘금 따는 콩밭’에서 당대 현실을 포착한 청년작가 김유정의 면모가 가장 두드러진다고 본다.
김유정의 고향 인근에 사금터가 있었고, 매형의 권유로 한때 충청도 예산에 내려가 금광의 현장감독을 지낸 적도 있어 ‘금 따는 콩밭’은 당대의 ‘골드러시’를 직접 체험한 뒤의 결과물일 것이다. 주인공 농민이 소작으로 갈아먹는 콩밭을 포기하고 금을 찾으려던 것은 결국 농사를 지어봤자 비료 값과 품삯도 안 나오는 허사임이 뻔했기 때문이다. 콩밭에 금맥이 있을 거라며 꾀었던 떠돌이 친구가 “금줄이 터졌다”고 거짓 희망을 부풀려 놓고는 그날 밤으로 달아날 궁리를 하는 것으로 이야기는 끝난다.
금을 요즈음 말썽 많은 주식으로 바꾸면 비슷한 세태가 떠오를 것 같다. 당시 유행하던 가요는 이렇게 노래했다.
노다지 노다지 금노다지
노다진지 도라진지 알 수가 없구나
나오라는 노다진 나오지 않고
도라지가 나오니 애물이로구나
집 팔고 땅 팔아서 모조리 바쳤건만
요다지 말리느냐 사람의 간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