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 곳
문태준 시집
2012.02.27
창비시선 343
새떼가 우르르 내려앉았다
키가 작은 나무였다
열매를 쪼고 똥을 누기도 했다
새떼가 몇발짝 떨어진 나무에게 옮겨가자
나무상자로밖에 여겨지지 않던 나무가
누군가 들고 가는 양동이의 물처럼
한번 또 한번 출렁했다
출렁출렁하는 한 양동이의 물
아직은 이 좋은 징조를 갖고 있다 _‘아침’ 전문
창호에 대나무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다
나는 바람에 떨리는 너의 잎사귀를 읽는다
이처럼 면(面)이 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더 오래 곁에 있으니 우묵하거나 불룩하다
엎어질 듯이 서두르거나 망설이는 때가 있다
들추는데 냄새, 소리, 맛이 단순하지 않다
이리저리 위와 아래로 흔들리지만
깊거나 두껍거나 슬프거나 높거나 멀고 멀다 _‘정야(靜夜)’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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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도
내객(來客)도 없다
겨울 아침
오늘의 첫 햇살이
흘러오는
찬 마루
쪽창 낸 듯
볕 드는 한쪽
몸을 둥글게 말아
웅크린
들고양이
여객(旅客)처럼
지나가고
지나가는
집 _‘빈집’ 전문
[아래는 <창비> 홈페이지 시집 소개에서 가져온 글입니다.]
먼 곳에서 울려와 사무치는 아름다운 서정
전통 서정시의 계보를 잇는 대표적인 서정 시인으로서 문단 안팎의 화려한 조명을 받으며 두각을 나타내고 있는 문태준 시인의 다섯 번째 시집 <먼 곳>이 출간되었다. 토속적 정서에 밀착된 탁월한 언어감각과 특이한 시풍으로 서정시학의 아름다움을 선사했던 시인이 4년 만에 펴낸 이번 시집에서 이전의 시세계와는 색다른 면모와 한걸음 더 진화된 성숙한 모습을 보여준다. 체로 거른 듯 더욱 정갈해진 시어와 티 없이 맑고 선명한 이미지에 불교적 사유의 깊이가 도드라진 감성적인 시편들이 눈길을 끈다. 사물을 바라보는 세밀한 관찰력, 느림의 삶에 대한 겸허한 성찰, 인생의 무상함을 관조하는 고요한 마음이 낮고 차분한 목소리에 실려 깊은 울림을 자아낸다.
이곳에서의 일생(一生)은 강을 따라갔다 돌아오는 일
꿈속 마당에 큰 꽃나무가 붉더니 꽃나무는 사라지고 꿈은 벗어놓은 흐물흐물한 식은 허물이 되었다
초생(草生)을 보여주더니 마른 풀과 살얼음의 주저앉은 둥근 자리를 보여주었다
가볍고 상쾌한 유모차가 앞서 가더니 절룩이고 초라한 거지가 뒤따라왔다
새의 햇곡식 같은 아침 노래가 가슴속에 있더니 텅 빈 곡식 창고 같은 둥지를 내 머리 위에 이게 되었다
여동생을 잃고 차례로 아이를 잃고
그 구체적인 나의 세계의, 슬프고 외롭고 또 애처로운 맨몸에 상복(喪服)을 입혀주었다 _‘강을 따라갔다 돌아왔다’ 부분
문태준의 시는 적요로운 풍경 속에서 슬픔의 “눈물자국 같은 흐릿한 빛”(망인亡人)이 어룽진다. “슬프고 외롭고 또 애처로운”(강을 따라갔다 돌아왔다) 시인에게 삶은 근본적으로 편안하게 다가오지 않는다. “형편이 반 썩은 복숭아 한알처럼 되어서” 꿈을 꾸어도 꼭 “몸속으로 자꾸 벌레들이 꼬물꼬물 들어”(꿈속의 꿈)서는 꿈을 꾸고, “상한 정신”(사과밭에서)을 앓고, “작고 네모진 보자기만도 못한”(보퉁이가 된 나여!) 자신의 모습을 보며 시인은 쓸쓸함과 비애감에 젖는다.
나는 한동안 병실에서 생활했다 돌밭 같은 눈 메마른 손 헝클어진 채 자란 머리카락 누덕누덕한 시간들 앞뒤 없는 곡경(曲境) 속에서
희망을 끊어버리고 연고 없는 사람처럼 빈들빈들 돌아다녔다 축축하게 비 오는 어느날 그가 내게 말했다 뭐든 돋아 내밀듯이 돋아 내밀듯이 살아가자고 _‘사무친 말’ 전문
시인은 “마른 씨앗처럼 누운 사람”에게 “버들 같은 새살은 돋으라고” “마당에 솥을 걸고 불만 때다”(불만 때다 왔다) 돌아온다. 수족관에서 비늘이 너덜너덜한 채 아가미를 겨우 움직이는 물고기에게 “홑청을 마련해줄 수 없고” “폐를 빌려줄 수 없”(수족관으로부터)는 자신의 처지를 돌아보며 삶의 무력함을 느끼기도 한다. 오히려 물고기보다 더 나을 것도 없이 “먼눈으로 우는, 무용한 사람”(모래언덕)의 신세라고 생각하는 시인은 “귀신도 어쩌질 못하”는 근심에 시달린다.
은밀한 시간에
근심은 여러개 가운데 한개의 근심을 끄집어내 들고
나와 정면으로 마주앉네
그것은 비곗덩어리처럼 물컹물컹하고
긴 뱀처럼 징그럽고, 처음과 끝이 따로 움직이고
큰 뿌리처럼 나의 신경계를 장악하네
근심은 애초에 어머니의 것이었으나
마흔해 전 나의 울음과 함께 물려받아
어느덧 굳은살이 군데군데 생긴 나의 살갗처럼 굴더니
아무도 없는 검은 밤에는
오, 나를 입네, 조용히
근심을 버리는 방법은 새로운 근심을 찾는 것
빗방울, 흙, 바람, 잎사귀, 눈보라, 수건, 귀신도 어쩌질 못하네 _‘근심의 체험’ 전문
삶은 아름답지만 찰나이고 항상 누군가와의 이별이 예정되어 있음을 아는 시인은 인생의 무상함을 느끼며 내생으로 연결되는 삶을 고요하게 바라본다. 그 원초적인 공간에서 시인은 “한번 내쉬는 큰 숨이 되어” 사방으로 흩어져 무엇이든 되고 싶어하고(공백空白), “서로에게/받친 돌처럼 앉아서”(일가一家) “하늘도 흰 물새도 함께 사는 수면”(물가)을 그리워한다. “풀밭 속 풀잎이 되고 나니” “모든 게 수월했다”(아래로 아래로)고 말하는 시인은 그렇게 사물과 타인과 감응하고 한몸이 되는 교감의 순간을 보여준다.
오늘은 이별의 말이 공중에 꽉 차 있다
나는 이별의 말을 한움큼, 한움큼, 호흡한다
먼 곳이 생겨난다
나를 조금조금 밀어내며 먼 곳이 생겨난다
새로 돋은 첫 잎과 그 입술과 부끄러워하는 붉은 뺨과 눈웃음을 가져가겠다고 했다
대기는 살얼음판 같은 가슴을 세워들고 내 앞을 지나간다
나목은 다 벗고 다 벗고 바위는 돌 그림자의 먹빛을 거느리고
갈 데 없는 벤치는 종일 누구도 앉힌 적이 없는 몸으로 한곳에 앉아 있다
손은 떨리고 눈언저리는 젖고 말문은 막혔다
모두가 이별을 말할 때
먼 곳은 생겨난다
헤아려 내다볼 수 없는 곳 _‘먼 곳’ 전문
일찍이 문학평론가 신형철이 ‘서정시 가문의 적자(嫡子)’라고 말했듯이 문태준 시인은 서정시의 전통과 문법을 존중하며 형식의 질서를 중요하게 여긴다. 여백의 미에 담긴 섬세하면서 온화한 풍경을 펼치며 한 호흡 느린 숨결과 한 박자 느린 걸음으로 여유롭게 삶의 무늬를 돋을새김하는 그의 시에는 불협화음도 없고 과격한 비유도 보이지 않는다. “늙은 어머니가/ 마루에 서서/ 밥 먹자” 하고 부르는 정겨운 목소리가 “막 푼 뜨거운 밥에서 피어오르는 긴 김”(어떤 부름)처럼 마음에 스며드는 그의 노래는 근심과 시련이 가득한 무상한 삶을 살아가는 이들의 상처를 위무하고 “나날의 메마름을 견뎌내게 하는 영혼의 강장제가 되기”(김인환, 해설)에 충분하다.
어릴 때에 죽은 새를 산에 묻어준 적이 있다
세월은 흘러 새의 무덤 위로 풀이 돋고 나무가 자랐다
그 자란 나뭇가지에 조그마한 새가 울고 있다
망망(茫茫)하다
날개를 접어 고이 묻어주었던 그 새임에 틀림이 없다 _‘영원(永遠)’ 전문
시인의 말
눈앞의 것에 연연했으나 이제 기다려본다. 되울려오는 것을. 귀와 눈과 가슴께로 미동처럼 오는 것을. 그것을 내가 세계로 나아가는 혹은 세계가 나에게 와닿는 초입이라 부를 수 있을까.
생활은 눈보라처럼 격렬하게 내게 불어닥쳤으나 시의 악흥(樂興)을 빌려 그나마 숨통을 열어온 게 아닌가 싶다. 그 빚의 일부를 갚고 싶다. 새로운 시집을 내니 난(蘭)에 새 촉이 난 듯하다. 바야흐로 새싹이 돋아나오는 때이다. 움트는 언어여. 오늘 나의 영혼이 간절히 생각하는 먼 곳이여.
추천사 _허수경(시인)
그의 시들은 느슨한 시인, 나를 단련시킨다. 그의 ‘시로 씌어진 제사(祭祀)’를 읽으며 나는 달리기를 준비한다. 신발끈을 조이며 겨울모자를 쓴다. 한 시인이 도착한 어느 순간에 동반하기 위하여 정결하게 옷깃을 여민다. 나의 폐활량이 충분하여 이 달리기가 그곳으로 이르길 바란다. 짧고 간결한 제사, 투명하게 슬픈 제사, 풀벌레와 새소리, 낙과와 울퉁불퉁한 과일과 쓸쓸한 어머니를 위한 제사. 이 아득한 아름다움은 본래 우리의 것이었다. 그러나 얼마나 오래전에 아름다움은 우리를 떠나갔나. 태준의 시들은 그 ‘본래 아름다운’ 것들을 우리 앞으로 데려온다. 마음먹은 대로 되지 않더라도 심란하지 않게 저녁을 잘 보내라는 안부인사다. 이런 짧은 안부인사가 시의 어떤 힘이라는 생각을 하게 한다. 그렇지 않다면 시인들이여, 왜 세계는 가장 가난하고 아름다운 연인으로 우리를 기억하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