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평론가 김형수 선생님의 언어는 외부에서 대상을 투사해 오는 것이 아니라 상황의 내부에 동참한다는 특징이 있습니다. 자아의 정체를 ‘불완전동사’라 하시던 것과 관련되는 건지 모르겠어요. 오늘도 주어 중심으로 체계화되지 않는 그 불완전동사적 상상력의 위력을 보여주셨으면 합니다. 식민지 시절 이야기를 아직 안 끝내셨는데요. 마침 엊그제가 3·1절이었습니다.
고은 3·1운동 이후는 일제 강점 10년차를 시작하는 시기이지. 3·1운동의 선물’이라 할 총독부의 문화정치라는 것이 조선어 신문·잡지들의 제한적 자생을 허용하게 되는데, 이런 허울과는 딴판으로 1920년대 후반 일본 도쿄 일대의 관동대지진 때 그 수습책의 음모로 진행된 조선인 학살은 일시적인 무정부 상태의 민심을 돌려버리지. 조선인이 우물마다 독을 넣었다느니 해서 일본인의 광기 발동으로 지진의 혼란을 조선인 사냥으로 몰고 가는데 바로 이런 현장을 목격하고 부랴부랴 돌아와버린 청년시인 이상화가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를 토해내지. 이미 김소월의 비정치적 민요세계나 한용운의 여성 경어체 님의 세계들이 간접적인 주체 정조(情調)를 꽃 피우고 있는 바탕에 그런 격정의 직유법으로 심금을 울리게 했어.
김형수 자연스럽게 문학으로 넘어왔습니다. 일제강점기 이야기를 듣다보면 그 시절이 ‘죽은 나무’처럼 느껴지는 게 아니라 겨울 들판처럼 느껴집니다. 시련은 있었지만 소멸보다 생성의 흔적이 더 많잖습니까? 방금 근대문학의 봄 풍경이 시작되는 지점을 들으면서도 죽은 나무에는 봄이 닿지 않지만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온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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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임옥상 화백
고은 그 당시 문학 상황에서 최남선의 민족계몽문화와는 별도로 정인보의 ‘조선학’ 또는 ‘국학’이 식민지 내선일체 노선의 대항논리를 조심스레 시도함으로써 그것이 국내 민족운동의 한몫을 자임하지. 이것은 서구 세력의 각축장이 되고 일본의 야욕이 엄습하는 혼란 속에서도 중국이 ‘국학’이라는 학문 개념을 내거는 것과 동궤이기도 하겠지.
김형수 한 사회의 지적 변화라는 거시적인 맥락에서 볼 때 100년 전의 상황이란 중국 고전에 대한 환상이 무참하게 붕괴되던 시기가 아닙니까? 식민지의 근대일지라도 일방적으로 이식되는 게 아니라 지배체제의 담장 밑으로 전통의 숨결이 면면히 흘렀으리라고 봅니다.
고은 중국에서의 ‘국학’ 논의는 서양 문물의 근대에 직면한 중국의 ‘중체서용(中體西用)’이나 일본의 ‘화혼양재(和魂洋才)’가 자신들의 중화주의와 야마토(大和)주의의 수단으로 서양을 받아들이는 형국을 보여주는데 조선도 이에 질세라 ‘동도서기(東道西器)’를 내세우지. 우리는 중국이나 일본으로 자기 자신을 국한시키지 않고 동양이나 서양으로 크게 잡는 모양새였어. 그런데 최근 어느 기록이 말하기로는 ‘국학’이라는 이름은 17세기 일본인이 만들어낸 것이라 하더군. 그때 일본도 난학(蘭學) 이래 서구 문물이 밀려오는 데 대한 위기의식에서 자신들의 학문적 주체의식을 낳게 되었겠지. 그게 국학이었던 것이지.
김형수 자기의 눈으로 세상을 읽지 못한다는 건 불행한 일입니다. 그것이 중국에서 발원했든 일본에서 시작됐든 우리가 다른 나라의 ‘국학’을 ‘국학’이라고 부르는 한 존재사의 맥락을 잃는 건 마찬가지라고 봅니다. 그런 의미에서 ‘일본 근대문학의 기원’을 문제 삼은 가라타니 고진도 대단하지만 그 텍스트로 등장하는 나쓰메 소세키도 참 대단해 보입니다. 우리 문학은 그 같은 자의식이 상당히 부족했던 게 아닐까 해요. 좀 난데없지만 제가 산문정신의 법통을 이문구의 <관촌수필>에 두고자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고은 근대 서구학문이나 문화를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장차 동아시아에서 사용할 근대 개념어들은 거의가 일본 제품이지. 당장 ‘문학’도 ‘철학’도 다 그때 만들어진 것이라네. 그러므로 고대문화의 전부는 중국제이고 근대의 것은 일제란 말이지.
김형수 김수영 시인의 지적대로 “전통도 없고 현대도 없다”고 해도 되겠지요?
고은 일본은 고대 중국에 신세진 것을 근대 중국에 갚아주었어. 양계초도 손문도 노신도 곽말약도 다 명치유신의 일본과 깊은 인연 소관이 있지. 하기야 동경 2·8독립선언문을 기초한 조선 사람도 일본 체류의 이광수 아닌가. 그의 선언문은 기미년 선언문보다 훨씬 격렬했어. 그리고 바로 기미년 3·1운동의 그 온건한 선언문은 도쿄에서 돌아온 최남선이 썼어. 최남선은 그 선언 집필이 발각되지 않게 하려고 알고 지내는 일본 여인의 뒷방에서 그걸 쓰게 되었어.
김형수 그때야말로 깊은 밤중 같아요. 기념할 것이 선언문뿐이던 시대라 할 만큼.
고은 3·1운동 이후 여기저기서 시 동인 운동들이 일어나지. ‘폐허’도 나오고 ‘창조’도 나오고 무엇도 나오지. 그야말로 문화정치의 우후죽순이었어.
김형수 문학적 파벌도 여럿이었죠?
고은 1920년대는 신경향파 또는 프로문학이 선각적으로 뜨거워지기 시작하고 이에 대립되는 이광수, 김동인, 염상섭 등과 여러 시인들의 동인 활동이 있게 되는데 공교롭게도 이광수를 극도로 혐오하는 사람이 김동인이고 염상섭이었어. 일본에 건너가 있던 염상섭이 동경 2·8독립선언에 불참한 이유가 이광수 꼬락서니가 보기 싫어서였고 김동인도 이광수의 위선적인 작태를 대놓고 매도하기 일쑤였어. 그런데 김동인과 염상섭의 불화도 이에 못지않았지. 심지어 서북 태생의 김은 서울 태생의 염을 서울내기라 간사하다거나 그의 소설은 소설도 아니라고 욕설을 퍼붓지. 그러나 그들은 중일전쟁의 전시체제 이래 현실에 순응하는 것으로는 한통속이었어. 친일파 내지 친일 경향파로 말이네. 작가에게 우정은 허울일 때가 많아.
김형수 한 걸음만 떨어져서 보면 그게 얼마나 이상한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대밭 한쪽에서 죽순들이 키 재기를 하는 것처럼 내부 알력이랄까 헤게모니 다툼이랄까 하는 걸 보는 게 제일 고약합니다.
고은 바로 일본의 ‘대정(大正) 데모크라시’ 문화 분위기와는 또 다른 소화(昭和) 시대의 개막은 바야흐로 명치(明治) 이래의 야욕이 절정에 이르렀다는 의미인데 이런 대정 소화 연호(年號)의 교체기에 실로 괴물의 문학 일생을 사는 한 사람이 태어났지. 이 사람은 일제시대 일본에서 일본어로 소설을 쓴 장혁주(張赫宙)나 김사량(金史良), 그리고 해방 후 재일작가인 김달수(金達壽), 김용제(金龍濟)와 그 뒤의 김석범(金石範), 이회성(李恢成) 등과도 또 다른, 일본인보다 더 일본인 같은 행세로 일생을 다한 작가였어.
김형수 이름이 어떻게 되는데요?
고은 바로 현대 일본의 통속작가이기도 하고 순수문학의 성취를 이룬 작가이기도 한 다치하라 세이슈(立原正秋)라네. 이 사람은 아쿠타가와상 최종후보에 한두 번 오른 적이 있고 나오키상을 받은 일본 문단의 한 스타였어.
김형수 처음 듣는 작가인데, 제국의 주류 문단에서도 존재감이 없지 않았다는 말씀이지요?
고은 아니겠지. 정작 우리가 모르고 있었지. 그런데 이 사람은 일본인이 아니라 바로 조선인이었네. 본명은 김윤규(金胤奎)이고 아버지는 김경문(金敬文), 어머니는 권음전(權音傳)이라네. 그 당시 여자의 이름은 있으나마나 할 때여서 그저 얌전하다 음전하다는 뜻으로 부른 이름이 어머니 이름이었을 거야.
김형수 하! 변화 없이는 살아남을 수 없던 때라고는 하지만.
고은 김윤규의 아버지는 경북 안동 서후면 대상동이라는 두메 마을에 사는 천등산 봉정사 사무처사였어. 의성 김씨 성받이이기는 하나 그런 김씨라 해도 다 갑족(甲族) 행세를 하는 것은 아니었지. 같은 종친 양반이라 해도 생활환경의 계급 차로 상민 취급이 예사 아니었던가. 그런데 윤규가 다섯 살 때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지. 어머니는 윤규, 완규 두 아이들을 데리고 안동 임동으로 이사를 하는데 이에 앞서 아버지 김경문은 권음전과 결혼하기 전 다른 여자와의 사이에서 이미 아들을 낳았어. 그 아들이 규태라는 이름인데 호적에는 그가 장남으로 기록되어 있네.
김형수 외세의 압제 아래 봉건적 관계도 해체되고 있네요.
고은 권음전은 김경문의 재산을 다 털고 전실 자식은 그런 계모가 무서워서 함께 살 수 없었어. 김윤규는 경북 구미에서 잠시 머물다가 일본 요코스카(橫須賀)로 가서 그곳의 상업고등학교를 나와 와세다(早稻田) 전문부에 들어갈 수 있었지. 그 뒤 일본 문단에서 작가생활을 하는데 자기 연보를 완전범죄 같은 허구로 만들어냈어. 소화 2년 조선 경북 대구시 어머니의 생가 나가노 가(永野家)에서 출생했다고 말이네.
김형수 하하, 스토리텔링이 아주 뛰어났나 봅니다.
고은 그러니까 어머니는 일본인으로 되었어. 아버지는 가나이(金井慶文) 어머니는 오도코(音子), 부모도 역시 일·한(日韓) 혼혈인데 아버지는 이조 말기의 귀족 이씨(아마도 전주 이씨를 염두에 둔 듯) 가문에서 가나이 가(金井家)에 양자로 들어가 처음에는 군인이다가 그 뒤 불교 선승(禪僧)이 되었다는 것, 본인은 대구 북동쪽 안동 교외의 아버지가 머무는 봉선사(鳳仙寺·봉정사를 바꾼 이름)에 어머니와 가 있게 되는데 집은 절 밑에 있었고 아버지는 일주일에 한 번씩 집으로 내려왔다는 것, 본인도 소화 6년 봄에 가서 절의 노장스님한테서 한자를 배웠다는 것, 그 뒤 선승인 아버지가 자살하고 본인은 일본인의 안동 소학교에 입학했는데 조선인 혼혈아라 해서 아이들의 놀림감이 되자 그 소학교에서 조선인 보통학교로 전학, 그때부터 종전 해방 때까지 봉선사와 아버지가 입양된 가나이 집안에서 학자금을 댔다는 것, 소화 10년 봄 어머니가 아우 마사노리(正德)를 데리고 일본 고베의 노무라(野村) 성받이 남자에게 재가(再嫁)하게 되어 본인은 대구시 구미정(龜尾町)에서 구미의원 의사인 어머니의 동생, 그러니까 외숙인 나가노(永野哲雄)한테 맡겨졌다는 것, 소화 12년 겨울 그 외숙이 제주도 도립병원으로 옮겨가면서 본인은 일본 가나가와(神奈川)의 요코스카에 있는 어머니 언니의 시집인 오오시라(大下) 집안에 가 있으면서 그곳 고등소학교에 전학했는데 거기서 한 학년 아래인 지금의 아내 요네모토(米本光代)를 만나게 되었다는 것.
김형수 기가 막혀라. 완전히 풍운아예요.
고은 소화 14년 가나가와에서 중학교에 합격했는데 네 살 위인 아이의 놀림을 받고 단도로 그 아이를 찔러 중상을 입힌 뒤 입학이 취소되어서 그 뒤 상업학교에 편입되었다는 것, 그해부터 검도를 익혔고 검도 스승은 기무라 7단이라는 것, 소화 17년 3단짜리 두 사람을 이겨냈다는 것, 그해 여름 큐슈제대 의학부 도모다(友田) 외과에 와 있는 외숙 나가노의 초대로 후쿠오카에 가서 외숙으로부터 곧 한국으로 가는데 너도 한국으로 가서 문학을 해도 좋다면서 경성제대로 오라는 권유를 받았다는 것, 그때까지 본인은 일본의 근대문학을 거의 다 읽어내고 모리(森鷗外) 가와바다(川端康成) 등에 빠져 있었다는 것, 소화 18년 4수(四修)로 경성제대 예과에 합격, 경성(서울)의 외숙 자택에서 살면서 안동 봉선사를 찾아간 적도 있다는 것, 그해 늑막염과 폐병에 걸려 일본으로 건너가 가마쿠라(鎌倉)에 살고 있는 어머니한테 의지했다는 것.
김형수 시시콜콜한 것들까지 어떻게 다 기억하시는지 신기하기만 할 뿐입니다.
고은 소화 19년 도쿄의 대학에 진학하라는 주위의 권유로 게이오(慶應)와 와세다의 입학시험에 둘 다 합격, 화투짝으로 둘 중의 한 곳을 택해서 와세다 전문부 법과에 들어갔다는 것, 그런데 전시여서 학업은 없고 공장 근로동원으로 지내면서 동경제대, 경도제대 그리고 제3고 재학생인 조선인 친척들이 학도병으로 끌려가는 것을 목격했다는 것과 그들은 한 사람도 살아서 돌아오지 않았다는 것, 소화 20년 일본과 조선이 멸망하는 것을 빌었다는 것과 그해 8월 전쟁이 끝났다는 것, 종전 후 소화 21년 봄 와세다대 문학부 국문과 청강생으로 입학, 소화 23년 어린 시절의 학우인 요네모토와 결혼한 이래 장남 우시오(潮)가 출생하고 그때 처자를 처가에 맡기고 방랑했다는 것, 소화 26년 봄 다시 가족과 살면서 소화 31년 여름 ‘근대문학’에 ‘세일즈맨 쓰다슌이치(津田順一)’를 발표하면서 문단생활을 했다는 것.
김형수 하나의 허구가 그렇게 완벽하게 사실을 대신할 수 있었단 말입니까?
고은 이상의 조작연보는 뒷날 일본문단에서 거의가 거짓으로 드러났으며 그와 초기 동인회 활동을 함께한 일본의 명망 높은 작가 다카시 유이치(高井有一)가 ‘다치하라 세이슈’라는 평전을 써서 마이니치 예술상을 받기도 하지.
김형수 정말, 소설이 따로 없어요.
고은 어떤가? 이 사람은 철저하게 일본인으로 자처하면서 그의 후기는 특히 일본 중세문화에 사로잡혀서 일본인보다 더 일본적인 삶을 살았어. 식민지 36년이라는 세월이 인간을 이렇게 극단적으로 변신시킨 일은 웬만한 친일파의 그 현실 타협적인 아류들에는 비교될 수 없는 소름끼치는 이례(異例)가 아닐 수 없어. 이를 두고 ‘식민지 인간의 슬픈 허영’이라는 지적이 있는가 하면 일본작가의 한 우정을 통해서 그가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수용할 여유가 있었다면 그의 문학은 바뀌어서 또 다른 경지를 획득할 수 있었을 것이라는 연민도 있었네. 이 사람은 1970년대 박정희 군사독재를 지지한 뒤 세상을 떠나지.
김형수 너무나 슬픈 이야기입니다. 지상의 모든 식민지를 은유하는 측면도 있는 것 같고요. 뛰어난 문학적 재능 하나가 제 민족의 아픈 관능 위에서, 이웃과 더불어 궁핍의 시대를 살고, 더불어 그 의미를 드러내는 촉수(觸手)의 길을 갔더라면 그 시절의 인생을, 인간의 사랑과 괴로움을 싸안는 숱한 이야기를 남길 수 있었을 텐데 말입니다.
고은 이런 사람도 있는 시대의 일본어 이쪽에서 우리 모국어는 낡고 못난 것으로 버림받고 지극히 불온한 것으로 짓밟히며 아예 조선어는 조선 지방의 낡은 사투리라고 여겼고 어느 때는 더 이상 숨을 쉴 수 없는 임종 직전의 위기에도 처했으나 끝내 사어(死語)가 되지 않고 우리의 언어로 계승되었다네. 이와 함께 우리의 근대문학은 그 가혹한 강점기의 고난 속에서도 선사시대 이래 모든 집의 아낙이 불씨를 필사적으로 지켜오듯이, 그래서 우리의 불빛과 불의 온도로써 북풍한설 속에서도 얼어 죽지 않고 또 그 칠흑 속에서도 불빛이 있어 한 줄의 글을 읽을 수 있었던 것처럼 단절이 아닌 계승으로 오늘에 이르렀던 것 아닌가.
김형수 수많은 선각들이 목숨을 얹어서 문학을 해온 사실을 새삼 숙연하게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습니다.
고은 생각건대 김소월, 이육사, 이상, 임화, 윤동주, 정지용 등의 자살과 요절 그리고 옥사 그리고 행방불명 등의 그 비극이야말로 현대 한국문학의 피어린 제전(祭典)이 아닐 수 없네.
김형수 100년을 넘긴 문학사를 더듬다 보면 문득문득 무더위에 만난 빗방울처럼, 이미 사라진 날의 햇살처럼, 젊은 날의 숙명적인 사랑처럼 이 땅을 다녀간 미완성의 거장들을 발견하게 됩니다. 오늘은 괜히 가슴이 답답해져서 큰소리로 시라도 한 구절 외우고 싶어집니다. “무덤을 다 팠다. 여기가/ 겨울 달빛이 다다른 곳이다.” 선생님의 ‘겨울 달빛’에 나오는 구절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