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처를 잃고 헤매다
1945년 초 제2차 세계대전 승전연합국들의 얄타협정에서 신탁통치안이 협의되었고, 몇 달 뒤 포츠담선언에서 한반도를 삼팔선으로 분할해 남에 미군이, 북에 소련군이 주둔하면서 종전 처리하는 걸 약정했다는 것은 상식이다. 삼팔선은 애초에 작전 편의상 구획했던 군사적 임시조치에 지나지 않았으나 미·소 양 진영의 냉전이 세계화하면서 정치·군사적 분단선으로 고착되었다.
우리 식구는 만주 장춘에 살다가 해방되면서 귀국하여 어머니의 친정인 평양에 일단 짐을 풀었다. 내 기억도 그 즈음에서 시작되는데 모란봉이 건너다보이는 전차 종점 부근의 어느 적산가옥 이층에 살았다. 아래층에는 소련군 장교 부부가 살았는데 가끔씩 부인이 나를 데리고 들어가 음식을 해 먹이곤 하였다. 어머니는 그녀가 날생선이나 아마도 캐비어일 듯싶은 통조림 알을 얹은 비스킷을 내게 먹여 배탈이 날까봐 염려하곤 했다고 한다. 어머니는 시내 번화가에 양장점을 냈는데 소련군 장교나 하사관 부인들이 와서 원피스며 블라우스를 맞추어 입곤 했다. 누나들과 나는 퇴근하는 어머니를 마중하려고 전차 종점에 나가서 기다리곤 했다. 어머니가 일본식 생과자를 사들고 반기며 돌아오던 기억이 남아 있다.
모란봉 아랫녘에는 크고 작은 한옥 기와집들이 높낮이에 따라 층층이 들어앉았는데 우리 집 이층 창가에서 보면 셋째이모네 집 마당이 건너다보였다. 우리는 창가에 모여 섰다가 밥상을 들고 부엌에서 마당을 가로질러 가는 이모를 보고 목청을 합쳐 외치곤 했다. “이모오”라고 부르면 그녀가 “오오” 하면서 손을 흔들어 반기던 광경이 떠오른다. 아침에는 아버지와 함께 모란봉에 올라가곤 했고 늘 앉아 쉬던 판판한 바위가 있었는데, 나중에 방북했을 때 나는 그 바위를 찾아내고 너무나 반가웠다. 아버지는 직장을 잡으려고 애를 쓰다가 드디어 북보다는 남으로 내려가는 게 낫겠다는 결론을 내렸다.
외할아버지는 3·1운동 때는 지역 대표로, 일제 말에는 신사참배 반대로 두 차례의 옥고를 치른 목사였고 개화주의적인 생각을 가진 분이었다. 그래서 어머니를 비롯한 자식들에게 신식교육을 받도록 했고 일곱 남매 중에 일본 유학을 했던 이가 넷이나 되었다. 그들 중에는 사회주의 사상을 가진 형제도 있었다. 큰이모는 학생운동 중 만주로 도피하여 항일연군에 들었다가 군복 차림으로 귀국했고, 넷째 이모는 메이지 법대를 나와 사회주의 운동을 하던 사람과 결혼했는데 그는 군 간부였다. 일본 유학을 했던 막내 외삼촌도 북측 정부에 참여했다.
그러나 둘째딸인 어머니를 포함하여 의사였던 큰외삼촌과 교사였던 셋째 이모네 식구들은 월남했다. 어머니의 회상에 의하면 내가 다섯 살 무렵인 1947년에 우리 식구는 넷째 이모부가 해주까지 차편을 내주어 삼팔선을 넘을 때만 이틀쯤 고생하고 곧 개성 피란민 수용소에 와서 남한 입국 절차를 치렀다고 한다.
내가 삼팔선을 넘던 기억은 어머니의 등에 업혀서 들꽃이 가득 피어 있는 들판을 가로질러 가던 것이다. 멀리 앞쪽에 륙색을 멘 누나 둘과 아버지가 걸어가고 있었는데 어머니가 부르지 말라고 일렀음에도 같이 가자고 외쳐 부르곤 했다. 누나들은 소풍이라도 나온 것처럼 들꽃을 따서 한 묶음씩 쥐고 걸어갔다. 개성 피란민 수용소에는 만주에서부터 북한을 거쳐 온 일본인 귀국자들도 있었는데 그들은 우리보다 더 고초를 겪어서 의복도 거지 차림이었고 아이들이 각종 전염병으로 죽어갔다. 울타리 가녘에 파묻은 작은 무덤들과 들꽃을 꽂은 사이다 병이 놓여 있던 게 생각난다.
서울에 와서 집을 찾아다니다 남산 밑의 어느 일본식 집에 세 들었는데 여기서 우리 식구는 남에서 살림을 시작할 정착자금을 도난당하고 비교적 조건이 나았던 영등포 공장지대로 가서 작은 집을 샀다. 일본 유학을 했던 어머니는 취직했고 아버지는 시장에 점포를 열면서 생활이 조금씩 안정되었다.
해방 기간의 작품들을 고르면서 안회남에 이어 만주에서부터 귀국하는 과정을 쓴 허준의 ‘잔등’을 염두에 두고 있다가 중편소설이어서 제외시켰다. 그 외에도 해방 시기 대학가의 좌우익 갈등을 다룬 이근영의 ‘탁류 속을 가는 박교수’, 만주의 신경에서 압록강변의 안동까지 귀국하는 피란민을 그린 김만선의 ‘압록강’, 북한 농촌의 토지개혁 과정을 다룬 이선희의 ‘창’, 그리고 이번에 소개하는 계용묵의 ‘별을 헨다’ 등이 이 시기를 그리고 있다.
‘별을 헨다’는 1946년에 발표되었고, 해방 직후 남과 북에서 동시에 생활터전을 상실한 사람들이 그 어느 쪽도 딱히 자기의 거처를 정하지 못하고 떠도는 상황을 기록영화의 몇 장면처럼 그려낸 소품이다. 이러한 난민의식은 나중에 군사정부가 들어서서 1970년대의 근대화 개발을 진행하고 있을 때까지 전 국민을 지배하고 있던 위기의식이었다. 그것이 한강 이남의 대대적인 개발의 출발점이기도 했던 것이다.
이 작품에서 서른 남짓의 주인공은 해방을 맞아 환갑인 어머니와 함께 아버지의 유골을 파내 만주에서 인천항을 통해 귀국한다. 원래 아버지 고향인 이북으로 가고자 했으나 삼팔선에 막힌다. 무일푼인 화자는 집을 구하지 못해 산에 초막을 짓고 밀가루떡으로 연명하며 살아간다. 귀국선에서 만난 친구는 다른 사람의 것을 빼앗다시피 해서 집과 세간을 마련하지만 성정이 바른 화자는 그의 권유에도 차마 그러지 못한다. 남한에서 살길을 찾지 못한 모자는 그래도 고향이라고 이북 행을 택하는데, 가던 길에 삼팔선을 넘어 서울로 오고 있는 옛 고향사람을 만난다. 이북 사정도 남한과 다르지 않다는 걸 전해들은 모자는 망연자실해진다. 해방 직후 정처 없이 떠도는 귀국 교포들의 신산한 삶을 이북 사투리에 실어 표현한 이 작품은 민초들에 대한 진한 연민을 자아낸다.
계용묵은 1930년대에 썼던 ‘백치 아다다’ 한 편으로 대중적으로 알려지게 된 작가다. 1903년 평안북도 선천에서 출생했고 본명은 하태용이다. 조부 몰래 상경하여 휘문고보를 다니며 김안서의 소개로 염상섭, 남궁벽, 김동인 등과 교유했으나 중도에 다시 낙향했다. <조선문단>을 통하여 단편소설 ‘상환’으로 등단하고 ‘최서방’ ‘인두지주’ 등을 발표했다. 일본에 가서 동양대학 철학과에서 수학하다 집안의 파산으로 귀국했다. ‘백치 아다다’ ‘병풍에 그린 닭’ ‘신기루’ ‘희화’ 등을 연이어 발표했는데 주로 단편소설을 많이 썼다. 다작은 아니었지만 묘사가 정교하고 구성이 깔끔하여 압축된 절제미를 보여준다는 평판을 받았다. 정비석과 잡지도 창간하고 김안서와 출판사도 설립하여 운영했다. 1·4후퇴 때는 제주도에 피란 내려가 월간지 <신문화>를 창간하기도 했다. 1961년에 서울에서 사망했다.
내 어머니는 언제나 서울을 임시 거처로 생각했던 것 같다. 그녀는 이사 다닐 때마다 낡고 퇴색한 아버지의 가죽가방을 품에 안아 옮겼는데, 그 안에는 옛날 사진이며 편지들, 떠나온 고향의 집문서나 매매계약서 따위가 들어 있었을 것이다. 돌아가시기 직전의 어느 따스한 봄날에 어머니는 그것들을 마당에서 모두 태웠고 나는 그녀의 등 뒤에서 가만히 지켜보기만 했다. 우리는 아직도 대륙의 끝자락 언저리를 고물고물 떠돌아다니고 있는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