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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로드 모네 '에트르타 절벽의 일몰'

클로드 모네 ‘에트르타 절벽의 일몰’ 1883년경
55x81cm, 캔버스에 유채, 노스캐롤라이나 미술관 USA
모네, 프랑스를 그리다
아무리 그림에 대해 모르는 사람이라고 해도 인상파나 인상주의라는 말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18세기에 그리스-로마의 조각상이 그러했던 것처럼 인상파는 이제 서양을 대표하는 하나의 ‘신화’라고 할 수 있다. 그만큼 인상파는 우리에게 친숙한 화가들이다. 드가의 무희, 르누아르의 누드, 모네의 풍경과 마네의 카페는 한 시대를 대표하던 이미지를 넘어서 서양의 문화 전체를 연상시키는 상징으로 거듭 태어났다고 하겠다. 우리가 보통 유럽 여행을 떠날 때 막연하게 그려보는 이미지들이 인상파의 그림들에서 왔다는 건 그래서 자연스러운 일인 것 같다. 어떻게 생각하면 인상파는 그냥 화가들의 모임에 불과하지만, 평범하게 보이는 이들이 이룩한 일은 그렇게 호락호락한 것은 아니었다. 화가는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지만, 그 그림이 만들어내는 것은 현실과 다른 세게이다. 이제는 누구도 동의할 이 중요한 사실을 깨닫도록 만들어준 이들이 바로 인상파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처음 등장했을 때 인상파는 아방가르드였다. 모든 새로운 것이 그렇듯이 인상파는 그 이름부터가 비평가들이 작명해준 조롱의 이름이었다. 모네가 살롱에 출품한 ‘해돋이, 인상’(1872)이라는 작품을 비웃으면서 비평가들이 붙여준 이름이 인상파인 것이다. 그러나 이런 조롱은 오늘날 완전히 잊혀졌다. 인상파는 배척받았던 ‘시장’에서 결국 승리했고, 지금은 상업적으로 가장 인기 있는 품목으로 각광받고 있다.
자본주의 산업화가 만들어낸 새로운 가치를 표현

세상을 바꾸는 그림은 나름대로 이유를 품고 있는 법이다. 명화란 무엇일까? 쉽게 말해서 ‘새로운 가치’를 만들어낸 그림이다. 가치라는 것은 사물의 중요성을 판단하게 하는 주관적인 믿음 체계라고 볼 수 있다. 그림은 경험의 감각을 바꾸어서 이런 믿음 체계를 뒤집는 역할을 한다. 그림이 단순히 그림 한 점으로 끝날 수 없는 까닭이다. 우리가 옛 그림을 보면서 느끼는 것은 사물을 닮은 이미지라기보다는 그림을 구성하고 있는 낯선 가치 체계이다. 인상파는 근대가 시작되는 때에 자본주의 산업화가 만들어낸 새로운 가치를 화폭 위에 표현하려고 했던 화가들이다. 인상파가 근대를 대표하는 화가로 불릴 수 있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모네 ‘해돋이, 인상’, 1872
인상파 중에서도 내가 좋아하는 화가들은 피사로와 모네이다. 물론 다른 화가들을 싫어하는 건 아니지만, 딱히 꼽아보라면 이 둘이다. 피사로는 인상파의 사상을 정립하고 끝까지 그 정신을 포기하지 않은 화가라고 할 수 있고, 모네는 인상파의 혁신을 대중적으로 전파시켰다고 말할 수 있다.
모네는 인상파 화가 중에서 가장 오래 살아남아서 인상파가 제도권 내에서 성공을 거두는 모습을 모두 목격하는 행운을 거머쥐었다. 말하자면 최후의 증인이었던 셈이다. 피사로는 사상적으로는 견결하고 예술적으로는 혁명적이었는데, 이 말은 모네에 비해 훨씬 덜 복잡했다고 말할 수 있다는 뜻이다. 따라서 문화비평가 입장에서 본다면, 피사로보다 모네가 더 흥미진진한 대상인 건 어쩔 수가 없다. 피사로가 공공연하게 무정부주의적인 정치적 입장을 표명했다면, 모네는 직접적으로 자신의 정치 성향을 드러내지는 않았다. 르누아르, 드가가 공식적인 왕당파였다는 것과 대조를 이루는 ‘침묵’이었다. 그렇다고 모네가 정치적 입장을 갖지 않았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는 암묵적인 공화주의자였고 이런 측면에서 가장 ‘프랑스적 화가’라고 불러도 무방한 것처럼 보인다. 어떻게 보면 모네는 그림을 그리는 일에서 정치성 자체를 발견한 화가인지도 모른다. 그가 몰두한 것은 그림의 형식이었고, 그 형식의 혁신이 곧 인식의 변화를 가져올 수 있다는 걸 직관적으로 알았던 것 같다. 수련이나 성당 같은 사물을 되풀이해서 그린 걸 보더라도 그의 예술정신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모네는 파리 중산층의 생활을 가장 정확하게 보여주는 화가
무엇보다도 모네를 비롯한 인상파에게 중요한 개념은 바로 ‘여가’였다. 이 여가는 드가의 그림 속에 등장하는 카페 문화와는 사뭇 다른 인상을 풍긴다. 모네의 ‘에트르타 절벽의 일몰’을 보자. 이 화사한 풍경은 분명 마네나 드가가 그려내고 있는 우중충한 파리의 일상과는 다른 것이다. 마네의 ‘늙은 악사’나 드가의 ‘목로주점’은 이런 화사한 색채와 빛을 보여주지 않는다.

마네 ‘늙은 악사’, 1862 드가 ‘목로주점’, 1875~1876
어디까지나 마네와 드가에게 중요했던 것이 ‘실내’였다면, 모네는 ‘야외’였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차이는 어디에서 발생하는가? 바로 근대 자본주의를 살아가던 파리지앵의 생활방식에서 차이가 난다고 할 수 있다. 모네가 도시와 농촌이라는 통합적 공간을 표현하고자 하면서 농촌에서 도시로 이주한 중간계급의 미학을 반영한다면, 마네나 드가는 도시의 거리에서 발견할 수 있는 근대적 주체에 더 관삼을 보였다. 물론 마네가 노동계급에 더 호기심을 두었다면, 드가는 부르주아에 더 마음이 가 있었다는 점에서 뚜렷한 차이가 있겠지만 말이다. 이런 까닭에 나는 모네야말로 인상파의 가치 체계, 나아가서 근대 파리 중간계급의 가치 지향을 가장 정확하게 보여주는 화가라고 생각한다. 인상파는 중간계급의 감수성을 미학적으로 표현하는 집단이었다고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모네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평생, 매년 매일 매시간 파리로부터 … 아르장퇴이유와 프와시와 베테이유, 지르베니, 루앙, 르아브르를 거쳐 바다로 흘러 들어가는 센 강을 그렸다.”
이 말에서 우리는 모네의 그림을 이해하기 위한 실마리를 얻을 수가 있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모네는 파리에서 태어났지만 노르망디에 있는 르아브르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노르망디는 오트-노르망디와 바스-노르망디로 나뉘는데 이 명칭은 고지대와 저지대라는 지형 조건에서 유래했다. 오트-노르망디에서 절경으로 유명한 곳이 바로 에트르타(Etretat)라는 해안도시에 있는 팔레즈 다발과 다몽(Falaise d'Aval et d'Amom)인데, 모네의 그림은 바로 모파상과 쿠르베가 극찬했던 이곳의 풍경을 그린 것이다.

모네 그림 속의 풍경과 파리 근교도시와 관계는?
센 강에 대한 모네의 진술은 얼핏 생각하면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 같다. 그러나 당시 프랑스의 통치자였던 나폴레옹 3세의 발언과 겹쳐보면 흥미로운 사실을 알 수가 있다. 마르크스가 ‘루이 보나파르트의 브뤼메르 18일’이라는 팸플릿에서 묘사하고 있는 쿠데타를 통해 공화정을 전복하고 제정을 다시 복권시킨 나폴레옹 3세는 나폴레옹 1세의 조카이다. 그는 집권 이후 대대적인 근대화 개발계획을 추진한다. 그때 만들어진 도시가 오늘날의 파리이다. 나폴레옹 3세는 이렇게 말한다. “센 강이 휘감아 흐르는 르아브르, 루앙, 파리는 하나의 도시이다.” 이 말이 뜻하는 건 간단하다. 파리의 일일 생활권에 르아브르와 루앙이 들어온다는 말이다. 도대체 이런 발언이 모네의 그림과 무슨 관계인 것일끼? 궁금증을 잠시 누르고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인상파와 함께 피크닉을 떠나보자.
글 이택광(문화비평가, 경희대 영미문화과 교수) 부산에서 자랐다. 영문학을 공부하다가 문화연구에 흥미를 느끼고 영국으로 건너가 워릭 대학교에서 철학석사 학위를, 셰필드 대학교에서 문화이론을 전공해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1999년 영화주간지 <씨네21>에 글을 발표하면서 본격적으로 문화비평을 쓰기 시작했다. 시각예술과 대중문화에 대한 분석을 통해 정치사회 문제를 해명하는 작업에 많은 관심을 갖고 있다. 현재 경희대학교 영미문화 전공 교수로 재직하면서 문화비평가로 활동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