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 인상파 아틀리에 l
클로드 모네 '생타드레스의 정원'

클로드 모네 ‘생타드레스의 정원’, 1867년
La terrasse à Sainte-Adresse, 98x130cm, 캔버스에 유채,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관광객의 탄생
먼저 클로드 모네의 그림 ‘생타드레스의 정원’을 감상하면서 이야기를 해보자. 이 그림에 나오는 생타드레스(Sainte-Adresse) 지역은 프랑스의 항구도시 르아브르(Le Havre)에서 얼마 떨어져 있지 않은 교외 지역이다. 역사적으로 보면 15세기에 잉글랜드의 헨리 4세가 프랑스에 함대를 끌고 와서 “여기는 이제부터 내 땅”이라고 선언한 곳이기도 하다. 물론 모네의 그림은 이런 역사적 사실에 상관없이 평화로운 풍경을 보여준다. 이 그림은 원근법을 무시한 인상파의 기법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로 흔하게 거론하는 작품이다. 과거의 전통을 거부하고 혁신을 선택한 아방가르드 정신을 잘 보여준다는 것이다.
인상파 이전까지 풍경화는 르네상스 이후로 만들어진 하나의 관습, 그러니까 소실점을 기준으로 입체감을 만들어내는 고전주의적 공간감을 표현하는 것이 ‘그림의 정석’이었다. 이런 것이 살롱(Salon) 그림이었는데, 인상파는 이런 살롱풍 그림을 전면적으로 배격했다. 모네의 ‘생타드레스의 정원’은 이런 인상파 초기의 패기 같은 걸 느낄 수 있게 해준다. 눈썰미가 좋은 독자라면 아마 이 그림의 색감이나 묘사 기법에서 특이한 점을 발견할 수 있을 것 같다. 가만히 들여다보면 어딘가 동양의 채색화 느낌을 받을 수 있지 않은가? 정확히 말하면 일본 그림을 연상시킨다고 하겠다.
이런 느낌을 받는 건 우연이 아니다. 모네가 이런 그림을 그린 까닭은 바로 일본 그림의 영향 때문이니 말이다. 어디선가 모네는 “일본 그림은 전통을 갖고 있지 않다”고 말했는데, 여기에서 말하는 전통이라는 것은 르네상스 시대에서부터 이어지는 서구의 회화 전통을 지칭하는 것이다. 그러나 모네가 정확하게 일본 그림의 의미를 알고 있었는지는 알 수 없다. 모네는 가끔 일본 그림의 영향을 받아 그린 자신의 그림을 ‘중국 그림’이라고 불렀기 때문이다. 이런 이야기에서 더 나아가면 인상파와 일본 그림의 관계에 대한 심오한 입담을 풀어놓아야 하겠지만 일단 여기에서 마무리하고 원래 말하려 했던 내용으로 넘어가자.
기법의 혁신성, 인상파 초기의 패기가 담겨 있는 ‘생타드레스의 정원’
‘생타드레스의 정원’에서 말하고 싶은 건 이런 기법적인 혁신성보다도 이 그림에 드러나는 어떤 시선에 대한 것이다. ‘어떤 시선’은 이 그림 속에서 상당히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기존에 없던 새로운 시선이 이 그림 속에 나타나고 있다. 앞서 보았던 에트르타의 풍경을 그린 모네의 그림과 함께 이 문제는 상당히 흥미로운 사실을 우리에게 암시해준다. 잠깐 언급했지만 모네의 그림이 보여주는 것은 평화로운 교외 풍경이다. 대체로 모네의 그림들은 그렇다. 파리의 풍경을 그리거나 정원을 그린 것도 있지만 도시를 벗어나서 한가로운 유원지 풍경을 많이 그렸다.

이런 소재 선택은 농촌이나 농민들을 그린 카미유 피사로와는 상당히 다르다. 모네와 피사로는 얼핏 보면 비슷한 기법을 사용했지만, 피사로가 모네보다 훨씬 냉정한 느낌을 준다. 모네는 점묘파를 신랄하게 비판했지만, 피사로는 오히려 이들을 옹호했던 사실도 이러한 차이에서 발생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점묘파의 주장은 간단하다. 주관을 배제하고 화가의 눈을 카메라의 렌즈와 똑같이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카미유 피사로 ‘루앙, 생세베르의 항구‘, 1896
이런 걸 테크놀로지의 유토피아주의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와 같은 미학 정신을 훌륭히 구현한 것이 영화라고 할 수 있다. 러시아의 다큐멘터리 영화감독 지가 베르토프가 만든 <카메라를 든 남자>는 이런 점묘파의 유토피아주의와 맥을 같이 하는 것이다. 이 영화의 마지막 자면에서는 카메라의 눈과 인간의 눈이 하나로 서로 겹치는데 이런 장면이야말로 점묘파의 미학 정신을 되풀이해서 보여준 사례이다.
여하튼 모네는 피사로와 달리 화가의 눈을 카메라의 눈처럼 생각하는 것을 그렇게 탐탁지 않게 생각했다. 피사로나 점묘파 화가들이 이런 미학을 추구한 까닭은 결국 미학적 인식과 과학적 인식을 같은 걸로 봤기 때문이다. 이들에게 회화적 실험은 곧 과학과 같은 것이거나 그보다 더 우월한 것이었다. 이게 모더니즘의 정신이라면 정신이었다. 어쩌면 모네는 이런 과학적 관점을 통해 잃어버리게 될 것이 무엇인지 직관적으로 알았다고 생각할 수 있다. 과학적 관점은 사실 인간을 배제한다. 과학 앞에 인간은 그냥 대상일 뿐인데, 모네는 이런 걸 인정하기 싫었을지도 모른다.
그림 속에 등장하는 사람들은 어디서 온 누구일까?
‘생타드레스의 정원’에 숨어 있는 수수께끼를 맞춰보기 위해 ‘생타드레스의 요트 경주’라는 다른 작품을 살펴보자. 같은 장소를 전혀 다르게 나타내고 있다. 분위기로 치자면 ‘생타드레스의 요트 경주’가 훨씬 친근하고 생동감을 자아낸다. 두 그림이 보여주고 있는 게 뭘까? 여가를 즐기는 사람들이다. 그럼 이 사람들은 어디에서 왔을까? 르아브르 지역 사람들이나 지역 주민들도 있겠지만 대체로 파리에서 온 ‘관광객’들이다.

클로드 모네 ‘생타드레스의 요트 경주’, 1867
‘생타드레스의 정원’과 ‘생타드레스의 요트 경주’는 두 그림 다 1867년에 그려졌다. 이 시기가 중요하다. 왜? 1859년 1월 나폴레옹 3세는 오스망 남작(Baron Haussman)에게 파리 시내 안에 있던 바리케이드를 허무는 공사를 허가했다. 이로 인해 파리의 시외로 여겨졌던 몽마르트나 벨르빌 같은 곳이 파리 시내로 포함되었다. 1855년 세계박람회 이후의 일이었다. 세계박람회는 그동안 상대적으로 영국에 밀리고 있던 프랑스의 문화적 자존심을 다시 세우고, 나폴레옹 3세의 치적을 홍보하기 위한 행사였다. 당시 나폴레옹 3세가 보내는 절대적 신임을 등에 업고 근대화를 추진한 사람이 오스망 남작이었다. 그가 추진한 파리의 근대화는 오물과 악취로 뒤덮였던 파리를 런던 못지않은 도시로 만들었지만 도심에 거주하던 노동자들과 빈민들은 외곽으로 쫓겨나야 했다. 불도저가 밀어버린 구시가지에서 쓸 만한 물건을 찾아다니는 넝마주이들이 출몰한 것도 오스망이 추진한 근대화 덕분이었다. 하지만 오스망의 근대화는 프랑스 민족주의를 지지했던 파리지앵들의 환영을 받았다.
모네의 그림에 등장하는 생타드레스의 풍경은 이런 역사적 사실을 암시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도시를 정비하면서 만들어진 것 중 하나가 대중교통 수단이었다. 300대가 넘는 옴니버스(합승마차)가 운행되면서 파리지앵들은 부르주아들 못지않은 이동성을 확보할 수 있었다. 이런 조건이 ‘관광객’의 탄생을 가능하게 했던 것이다. 모네의 그림은 그 무엇보다도 이렇게 관광객으로 거듭 태어난 파리지앵들을 화폭에 담은 작품인 셈이다. 과연 무엇 때문에 모네는 이렇게 열심히 평범한 파리지앵들의 여가 생활을 그렸던 것일까? 그 이유를 다음 편에서 살펴보도록 하겠다.
글 이택광(문화비평가, 경희대 영미문화과 교수) 부산에서 자랐다. 영문학을 공부하다가 문화연구에 흥미를 느끼고 영국으로 건너가 워릭 대학교에서 철학석사 학위를, 셰필드 대학교에서 문화이론을 전공해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1999년 영화주간지 <씨네21>에 글을 발표하면서 본격적으로 문화비평을 쓰기 시작했다. 시각예술과 대중문화에 대한 분석을 통해 정치사회 문제를 해명하는 작업에 많은 관심을 갖고 있다. 현재 경희대학교 영미문화 전공 교수로 재직하면서 문화비평가로 활동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