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평론가 김형수 먼젓번에 바다를 대면한 이야기까지 하셨습니다. 나이 열일곱에 전쟁 직전이었으니, 기억의 보폭이 바깥의 계절 변화와 함께하고 있어요.
고은 때는 그때가 오는 줄 모르게 오나 보네. 1950년 6월의 더위는 너무 바지런해서 미리 온 참석자처럼 일찍 왔네. 7월 더위가 6월에 온 셈이었어. 그 갑작스러운 억센 더위에 가슴팍이 땀범벅이 된 기억이 아직도 남아 있네. 신체의 촉각에 닿은 기온의 흔적도 하나의 기억 서사임에 틀림없지?
김형수 네. 연표는 단지 온도계의 눈금 같아요. 1950이나 6·25 같은 숫자에서 비극이 체감되는 정도는 미미합니다. 그러나 더워서인지 ‘땀범벅의 가슴팍’은 실감이 전혀 다르네요.
고은 이와 반대쪽에 한국 삼한사온의 겨울 복판의 허공에 영하 혹한으로 맛보는 그 건(乾) 추위가 있지. 쨍그랑하고 깨질 듯한 벽공이 영하 20도 가까운 지상의 매서운 추위 속에서 아무런 습기나 수분의 여지를 허용치 않은 그 투명한 침묵의 비정 말이네. 이런 더위와 추위의 기억은 분명히 시청각의 기억 일반이 아닌 특이한 기억이기도 해. 아이들의 손이 뜨거운 물에 덴 일이나 새벽 어둠 속의 냉기로 잠 깨어난 온몸 멍든 상태의 기억은 평생 동안의 까마득한 내면의 외상이기도 하지 않은가.
김형수 ‘내면의 외상’은 상상해내기 쉽지 않은 개념어 같은데…. 하지만 너무 적확합니다.
고은 아마도 이런 피부를 통한 촉각은 몇 번 빙하기를 견뎌낸 선사 조상의 원인(遠因)이 있기도 하겠지. 특히 인도 아리안의 히말라야 일대 추위에의 기억 때문에 근본불교 뒤의 지옥세계에 8한(八寒)지옥의 그 혹한 형벌이 생겨났겠지. 그런가 하면 그 반대의 8열(八熱)지옥의 화탕(火湯)지옥 역시 인도 데칼 고원이나 드라비다 지역의 40도 이상의 혹서를 그대로 반영한 거 아니겠나.
김형수 어떤 대상이든 고정관념에 매이지 않고 앞뒤 자유롭게 각도를 잡는 투시법은 놀라운 인식적 개성이 아닌가 합니다. 선생님의 언어는 원근법적 소실점을 필요로 하지 않아요.
고은 나는 현실을 비좁게 내몰아서 그것을 초현실이나 상상의 맞은편에 놓지 않는 버릇이 생겼네. 현실의 크기야말로 모든 반현실, 비현실, 현실, 초월까지도 다 망라해 보이는 삼천대천세계이고 거대하고 무한한 현실세계이기를 바라지. 요즘 말하는 빅 히스토리의 우주성과 리얼리즘의 우주성은 엇비슷하네. 사실인즉 상고시대 인류들의 그 원시 동화인 각 지역의 신화들이야말로 현실의 한 층위이기도 하다는 것도 그런 현실 확대의 사례라네.
김형수 그게 신화적 사유 맞아요. 문학이 근대적 방법을 벗어나는 과정도 모더니즘의 심화가 아니라 리얼리즘의 확대에서 오는 것 같습니다.
고은 다른 얘기네만 천국과 지옥의 높낮이라는 유치한 오랜 관행도 그쯤으로 파악하지. 하늘은 존귀하고 땅은 비천하다는 것, 그래서 하늘의 낙원은 영생이고 지하의 감옥인 지옥은 영생으로서의 고통이라는 어이없는 상하주의에 더해서 수컷이 임자이고 암컷이 노복이라는 것이 생겨나지. 바로 그런 부권이나 남성우월주의의 봉건성이 종교나 사회생활에서의 권력체제를 만들어내고 있어. 동서남북의 방향도 동과 남의 우선주의로 굳어져 있지. 해 뜨는 쪽이 해지는 쪽을 선행해서인가. 그런데 남북이라는 두 방향의 자연스러운 서열도 북한에서는 분단 이후 남북이 아닌 ‘북남’이나 ‘북과 남’이지. 자기중심의 역설인 셈이지. 남남북녀라는 말도 좋아하지 않더군.
김형수 북한의 그런 점은 안타깝습니다. 주체를 잃지 않으려는 의지가 자꾸 주체 과잉의 콤플렉스를 낳는 셈이에요.
고은 그런데 동방 유학에서 주역의 음양은 다행히 양음이 아니지. 음이라는 자궁에서 태어난 포유류로서의 양이니까. 그리고 태극의 도형은 음과 양 어디에도 중심을 주장하지 않게 상호합치의 순환론적, 원융적 도형이어서 일품 아닌가. 그것도 그 음양 이원론이 대립성이 아닌 상호성으로 융합된 포옹의 형상이지.
김형수 서구에서도 이쪽이 저쪽을 배제하지 않는, 말이 되는지 모르지만 ‘모(矛)’와 ‘순(盾)’의 공존 개념이 자리 잡는 게 포스트모더니즘 이후가 아닌가 합니다. 가령 ‘적과의 동침’이라는 말을 듣고 한편으로는 ‘악의 꽃’ 같은 선구적 언술을 돌아보게도 되지만 다른 편으로는 ‘미운 정’ 같은 자연스러움이 없는 걸 아쉬워하게 되는 것도 사실이거든요.
고은 방각(方角)과 원(圓)의 만남이기도 하네. 얘기가 애먼 데로 빠졌네만 촉각이란 결코 시청각이나 미각 그리고 의식 부문에 대해서 뒤지는 것이 아니지. 인체의 피부는 이런 촉각의 크기로 어느 감각의 크기가 따를 수 없는 광범위한 세계와의 만남을 감당하고 있는 것에 경의를 표해야 하지.
김형수 갑자기 ‘말초적’이라는 말도 사실은 ‘신체적 직관’을 뜻할 수 있겠구나 싶어져요.
고은 인체의 안과 밖의 울타리가 피부이지. 몸이라는 제한적인 구조 안의 것을 몸 밖의 무한한 외부에 내보내거나 외부로부터 불러들이는 그 접촉의 역할이란 실로 신체 또는 육신에 부여된 위대한 임무임에 틀림없지. 그래서 나는 껍데기를 중요시하네.
김형수 탈레스의 ‘물의 세계’였던가? 모든 것은 물로 되어 있고, 그 외피는 물이 쏟아지지 않게 둑을 이루고 있다고 읽은 것 같아요. 그런 물질적 해석이 선생님에 의해 전혀 다른 생명의 차원으로 넓혀지네요.
고은 생물학적으로 보아도 암컷과 수컷이 피부로 접촉을 시작할 때의 그 촉감이야말로 찬란한 의미를 피워내지. 에로스란 촉감의 극치 아닌가. 이런 촉감 없이 어떻게 영혼이라는 것, 정신이라는 것, 사랑이라는 것이 있게 되겠는가. 사실인즉 내가 별을 바라본다는 시각의 차원도 내가 별을 만지고 별이 내 몸 안에 들어오는 그 접촉의 차원 없이는 지렁이와 별 사이의 그것 아니겠는가. 별이 내 심장에 와 박힌다는 진술은 그것이 시일수록 현실로서의 사건이 아니면 안 되는 것이지. 누가 그랬던가. 고독은 피부의 질을 저하시킨다고 했지.
김형수 아! 혼자 듣기 아깝습니다.
고은 인체의 촉감은 비단 성적(性的)인 것만은 아야지. 인체를 에워싼 자연환경의 변화에 그때마다 반응하는 작용이 있어야 하겠지. 그래서 피부가 시간의 증거이겠지.
김형수 문단이란 이 같은 심미안이 모이는 마을이어야 하는데, 지금은 어쩌면 문학적 영감의 ‘필드’를 모두 잃어버렸는지 몰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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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 임옥상 화백
고은 언젠가 다 찾아먹을 노릇이야. 이 피부란 그러나 자연의 변화에 방어적일 수밖에 없지. 추우면 문 닫고 더우면 문 열어야 하니까. 그래서 기온의 차이나 태양광선의 강약으로 흑, 황, 백의 인종이 생겨났지. 본디 옛 인류는 하나같이 다갈색이었어. 그러다가 그 야생의 단일 자연색이 지역의 기온환경에 따라 변화해서 여러 인종으로 나누어지고 심지어 피부 보호를 위한 가죽과 식물 제품의 옷을 입게 되고 반지하방인 움집을 발명하는 단계로 되지.
김형수 새떼 같은 아포리즘이 날면서 ‘개념의 숲’을 흔드는 광경을 보는 듯합니다.
고은 코끼리의 피부 두께는 5cm인데 사람의 그것은 발바닥 두께도 4mm고 가장 야들야들한 부위는 0.1mm라지. 코끼리 피부의 둔탁한 특징도 시간에는 배겨내지 못해서 늙은 코끼리가 되고 말더군. 세월의 접촉 흔적이 덜한 모든 생명체의 어린 것들이 어여쁜 이유는 거기에 시간의 권력 개입이 없는 까닭이겠지.
김형수 하, 글 쓰는 후배들이 선생님과 마주 앉는 자리가 많았으면 좋겠어요.
고은 그런데 인체를 구성하는 물질 10여 종의 경제적 가치를 따져본 것으로는 인체의 값이 1달러 안팎이라 한다더군. 소의 가죽 값으로 따질 때 소의 값은 3.5달러라네. 이런 인체가 가진 감각세계야말로 가장 값비싼 것이 아니겠는가. 사실 사망이란 감각의 종말을 뜻하지. 그러므로 내가 60여 년 전의 더위를 기억하거나 여전히 올여름의 더위가 내 피부의 촉각에 닿아서 땀을 흘리는 일이야말로 내가 사망자가 아니라는 인증인 모양이네.
김형수 오늘 꽤 중요한 생각을 정돈하게 됩니다. 칼 세이건의 <코스모스>를 읽으며 인체의 값을 논하고, 오시마 나기사 감독의 <감각의 제국>을 보면서 헤어날 수 없는 감각의 세계를 이야기해도 지금 선생님이 펼치시는 ‘통섭’의 작용은 일어나지 않아요. 여기에서 의식의 과잉, 표현의 과잉이 문제라 해서 체험의 과잉이라는 말이 성립될 수 없다는 것을 거듭 깨닫게 됩니다. 체험의 부속물이 본체를 전도했을 때 생기는 왜곡이야말로 최근 문학이 앓는 질병이 아닌가 싶어요.
고은 1950년 6월 25일은 일요일이었지. 막 살림살이를 차린 대한민국 제1공화국 국방부는 당장의 사변을 앞두고 그것을 전혀 알아차리지 못하는 방심 상태로 전 장병 휴가령까지 발동한 상태였어. 사전의 38선 북쪽 동향에 이상이 있다는 몇 개의 공식 비공식 첩보를 접수한 상태인데도 육군본부 장교들은 당대 유행을 선도하는 여성들과의 사교춤으로 탱고와 블루스에 녹아내리고 실로 미국 고문관 쪽에 줄을 댄 양주파티로 나가떨어진 주색 끝에 깨어나기 어려운 잠에 취해서 뻗은 상태였지.
김형수 그런 사실은 왜 자꾸 가려지는지 모르겠어요. 군산에서는요?
고은 6월 26일 월요일 중학교 4학년 1학기에 접어든 나는 4km 신작로의 아침을 학교를 향해 걸어갔어. 우세두세 전쟁 얘기가 들렸어. “38선이 터졌단다!”는 말이 학교 안에 소나기 맞은 잎사귀처럼 퍼져 있었지. 조회시간에 교장이 전쟁이 터졌다는 것과 국방군이 북쪽의 적색분자들을 38선 북쪽으로 내몰고 있으니 우리는 철통같은 반공정신으로 뭉쳐 학업에 한층 더 열중해야 한다는 훈화를 했어. 교장의 훈화로 모자랐던지 늘 열혈적인 교감도 교장에 뒤이어 단 위에서 38선의 10용사를 거론하면서 국방군의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용맹을 배워야 하며 이 전쟁에는 학도들도 군인정신으로 무장해야 한다고 주문했지.
김형수 ‘개들도 짖는 것을 큰일로 여길 만큼 평화롭던 고향’이 이제 깨지는 거지요?
고은 그렇지. 그동안 대통령은 북한 괴뢰집단이야 한 줌도 안 되는 망국 도배들이니 우리가 곧 일소할 것이라고 장담했고 국방장관은 우리가 북으로 내달려서 평양에서 점심 먹고 압록강변 신의주에서 저녁 먹을 것이라고 호언해 왔으니 38선 전쟁 발발 소식에도 아직은 반신반의 같은 분위기였어. 그럴 뿐만 아니라 그동안의 38선 충돌사건은 날마다 쓰는 일기 같은 것이어서 한쪽에서는 이번 북의 전면 도발이라는 것도 그런 충돌사건의 하나라는 일반론 분위기도 있었지.
김형수 위정자들은 6·25의 앞면과 뒷면을 바꿔치기 했어요. 해마다 6월이면 소총을 거꾸로 세우고 거기에 철모를 씌운 전선야곡의 이미지가 유포됩니다. 국가를 위해 땀 한 방울 안 흘리고 외세에 기대어 통치 권력에 무임승차한 자들이 그 일선에서 드러난 무능과 무패를 가리기 위해서일까요? 오직 좌익에 대한 공포를 통해 기득권을 연장하려는 음험한 ‘이데올로기 효과의 날’로 만든 거예요.
고은 수업은 제대로 진행되지 않았어. 수업에 대한 진지한 태도는 곧장 사라지고 내 마음속에도 불안과 일탈의 싹이 돋아나기 시작했어. 내 옆의 학생은 고군산군도 선유도 출신인데 군산 째보선창 선구상(船具商)의 아들이었지. “야 임마, 여기까지 전쟁판이 되면 너는 선유도로 건너와라. 선유도 우리 집에는 빈방이 있으니 너에게 줄 테여”라고 나에게 호의를 보였어.
김형수 아직 사춘기의 마을에서 그림자는 찢기고 바람은 부서지고 저녁노을은 파괴되어 달빛만 괴괴해지는 밤을 겪기 전이니까요.
고은 오전 4시간 수업 뒤 오후 2시간 수업은 학과 담임들의 사정으로 흐지부지되었지. 나는 미술실에 잠깐 가있다가 그림 그릴 마음이 생겨나지 않아서 그 길로 바로 집으로 돌아갔어. 그런데 집안에 들어서자 야릇한 고기 익는 냄새가 났어. 쇠고기나 돼지고기 냄새가 아니었어. 저녁의 대청마루에 차린 밥상에는 처음으로 먹어보는 토끼고깃국이 나왔어.
김형수 산토끼였습니까?
고은 겨울의 함박눈 퍼부을 때는 뒷산이나 할미산으로 산토끼 사냥몰이에 나서서 잡은 토끼고기를 먹어본 아이는 있었지만 나는 처음으로 먹게 되는 토끼탕 앞에서 그 익숙하지 않은 냄새 때문에 먹기를 주저했어. 그래서 나는 6·25를 기억할 때마다 으레 그 토끼고깃국 냄새가 먼저 떠오르지. 나에게 6·25는 촉각으로서의 더위와 후각으로서의 토끼탕 냄새가 6·25 의식의 한 감각으로 남게 되었지.
김형수 토끼탕 냄새가 그날의 기억을 나르는 운송수단이 되다니!
고은 한국 전체사로서나 한국 현대사로서나 가장 커다란 비극인 6·25사변 그리고 20세기 세계냉전 및 열전의 근본 기지인 6·25사변이라는 대정황을 하나의 이름 없는 촉각이나 후각으로 그 단초를 삼는 것이 해학적이기도 하지. 이것은 현대문학의 고전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첫 기억이 아이가 맛보는 과자 마들렌이던 내면 서술의 기원을 만들어내는 노릇과는 좀 다른 것이기는 하지.
김형수 문학의 본능을 다시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민족사적 불행의 날에 한 소년의 후각에 스민 토끼탕 냄새가 무슨 쓸모가 있겠는지요? 또한 그날의 더위가 여러 인간군상의 관계사적 비극을 설명하는 데 어떤 도움을 주겠습니까? 너무나 무의미해서 철학도, 역사도, 사회학도 다룰 수 없는 잡다한 디테일을 붙들지만, 그러나 인간의 생애는 그런 시간들로 가득 차 있으니 그런 공식화될 수 없는 것들을 통해 과거가 살아 있는 자들의 현재를 구성할 수 있게 되는 것 아닙니까. 문자가 아닌 어떤 뉴 미디어로도 대체할 수 없는 그 앞에서 문학에 자의적으로 사형선고를 내려 본들 무슨 소용이 있을까 싶어요.
고은 6월 30일이면 이미 수도 서울은 인공 치하로 되고 서울시청 청사 정문 위에는 김일성과 스탈린의 대형 사진이 내걸리고 종로 한청빌딩에는 해방시기 월북했던 작가들이 내려와서 서울에 잔류했던 남한 문인들을 오라 가라 하며 동원해서 단련시키거나 부역행위를 강제하거나 하기 시작했지.
김형수 문인들까지? 현기증이 납니다.
고은 군산 일대도 그동안의 치안을 담당하던 경찰이 미처 도피하지 못한 온건 좌익계열이나 이미 좌익에서 공식 전향한 보도연맹 가맹자들을 데려다가 즉결 처형을 하고 현지를 이탈한 상태였어. 학교에서도 벌써 교감과 교사 절반 이상이 도청 학무과 지시 따위와 상관없이 직장에 나타나지 않았으므로 거의 수업은 진행하지 못하는 상태였지. 기어이 별도의 지시가 있을 때까지 당분간 수업을 일시 중단한다는 통보를 하고 말았다네.
김형수 6·25는 그 안에 있는 세대에게 정말 얼마나 커다란 현실을 덮어 씌웠는지, 지상이 사유재산들의 총합이듯이 역사의 불행도 사적 비운들의 총합임을 상상시켜요.
고은 학생들 중에는 벌써 ‘조선인민공화국 만세’를 불러대는 겁 없는 아이도 있었고 또 “야, 공부하기 싫은데 잘됐다”고 성적 낙후의 아이가 환호하기도 했어. 나에게는 무엇보다도 그 커다란 교실 한 칸의 미술실에서 방과 후 나만의 시간을 가질 수 없는 것이 여간 허망하고 안타까운 일이 아니었지. 오아시스를 뒤로하고 모랫길을 나서는 낙타의 심사였다 할까.
김형수 이로써 불타는 혈기를 퇴폐의 정열과 실존 확인의 광태에 바쳐야 했던 세대 하나가 일제히 1950년대적 데카당스밖에는 기다릴 게 없는 쪽으로 걷는 거네요.
고은 이런 무기 휴교 상태에 앞서 학교 당국과 도 당국은 중앙정부의 다급한 지시에 따라 중학교 고학년 청소년을 학도의용대로 지원하는 형식으로 급조된 병사를 만들기 시작했어. 우리 마을에서도 나보다 두 살 위의 상급생 대여섯이 무운장구(武運長久)라는 어깨띠를 두르고 일제 말기 ‘조선인 지원병’으로 나갈 때처럼 전쟁의 초기 소모병력으로 동원되었어.
김형수=그러고 보니 ‘봉태’라는 시가 거기에서 나온 것 같아요. <만인보>의 ‘봉태’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