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평론가 김형수 선생님의 언어에는 엄청난 양의 이미지가 출몰합니다. 삶의 어느 굽이에서 시대와, 혹은 장소와 마찰하며 얻은 것이니, 모두 심미안을 증언하는 예가 아닐 수 없어요. 가령 선생님의 ‘폐허’는 훼손을 의미하기보다 ‘자연’의 온전성을 가리킵니다. 어떤 정서적 등가물이 하나의 개념으로 화하는 예도 볼 수 있어요. 고향 풍경이나 기억을 보존시키는 등가물도 있을 것 같은데요?
고은 과찬에 송구스럽네. 단조롭기 짝이 없는 환경, 이렇다 할 소문난 경치도 없고 묵은 민속적인 예언들이 말하는 승지(勝地)도 아닌 환경인 고향마을이 오히려 나를 풍경에 미치게 했는지도 모르겠어. 지금도 나는 여행 중에는 잠을 못 자지. 차창 밖의 스치는 풍경에 눈이 빠진다네. 그런데 고향 뒷동산 뒤에 천만다행으로 미제방죽이라는 오래된 저수지가 있어서 그것 하나가 자랑거리이기도 했어.
김형수 미제방죽을 환유할 낱말은 없습니까?
고은 오늘날에는 소문난 은파유원지로 되었는데, 그 방죽은 아흔아홉 굽이의 굴곡으로 둘러싸인 호수였어. 그런데 그 호수의 일부인 용둔부락과 미제부락 한 구석에 꽤 널따란 연꽃 밭이 있었지. 여름날 그 넙죽넙죽한 홍어나 왕가오리 같은 연 잎사귀로 덮인 물위로 고상하기도 하고 요염하기도 한 분홍 연꽃 봉오리들이 일제히 솟아나 핀 풍경은 장관이었어.
김형수 어릴 때 연잎을 우산으로 쓰고는 했는데, 옛 문사들은 그것을 어떻게 사용했을까요?
고은 지난 시절, 젊은 정약용들이 그 정조 시대를 앞두고 죽란시사(竹蘭詩社)라는 시 동인회를 만들어 네 계절의 어느 날 즉흥시를 돌려가며 읊어내는 모임을 차렸지. 그러다가 연꽃이 필 무렵에는 한밤중에 쪽배를 타고 연꽃 방죽으로 스며들어가 그 연꽃 봉오리가 터지며 꽃으로 피어날 때를 내내 기다리기도 했어. 지금의 서울 서대문 밖이야. 마침내 들릴 듯 말 듯한 ‘퍽’ 소리를 듣게 되지. 그런 풍류가 지금의 시인들에게는 사치일까.
김형수 꽃이 피는 소리는 음이 아니라 공기의 파동이죠? 그것은 시오리, 영마루, 재 너머처럼 도보 이동의 세계에 속했던 것들이라 봅니다. 어느 세대가 잃었다기보다 금세기 문명이 상실한 것이라 해야 할 듯합니다. 어쨌든 연꽃에게는 한시(漢詩)의 정운미(情韻美) 같은 게 있을 것 같아요.
고은 연꽃이 핀 그 물위의 연꽃 밭은 찬란했어. 연꽃은 여러 가지 색깔이 있는데, 그래서 백련, 청련, 홍련이나 분홍, 담록색 꽃을 피우지.
김형수 밭에서 자라는 느낌이지만 물을 딛고 선 꽃이라…. 심청이 잠겨 있을 것처럼 귀물스러워요.
고은 당나라 시인 이백의 자호(自號)가 청련거사(靑蓮居士)이지. 양귀비의 본명이 옥환(玉環)인데 그 옥환도 연꽃을 말하는 별칭 중의 하나라네. 현종이 며느리이던 그녀를 슬쩍 자신의 총비로 삼아 궁궐의 백련꽃 핀 것을 보며 천 송이 백련이 어찌 내 말을 알아듣는 연꽃만 하겠는가 하고 양귀비를 예찬했지.
김형수 시아버지가 며느리를 훔치는 원초성과 ‘내 말을 알아듣는 연꽃’ 운운하는 은근함이 신화를 만드는 게 아닌지.
고은 당나라는 그 뒤의 남송의 청교도주의와는 달랐지. <시경> 국풍의 연꽃 시편들을 비롯해 연은 꽃 중의 꽃으로 노래되었어. 고대 궁궐에는 반드시 연꽃이 있었지. 북송 성리학자 주돈이의 ‘애련설(愛蓮說)’은 우리나라 서예가들도 곧잘 쓰는 명문이지. 당대 초서의 달인 진학종이 이 ‘애련설’하고 이백의 ‘장진주(將進酒)’하고 골라 가지라 했는데 이어령이 애련설을 가지고 내가 장진주를 가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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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 임옥상 화백
김형수 베트남의 시인들도 연꽃 풍류가 있었습니다. 아시아의 다른 촌락들에서도 눈에 띄는데 모두 옛 시가나 고전 문헌에 다방면으로 흔적을 남겼어요.
고은 연꽃의 원산지는 중국 황허, 창장 유역인데 아주 오래전 설산을 넘어갔는지 고대 인도에서도 웅숭깊게 사랑받는 토착의 꽃이 되었어. 그곳 인도의 나라꽃에 해당할 만큼 보편화되었고 제2차 세계대전 후의 비동맹국가들의 제3노선에서는 연꽃을 자신들의 정치 표상으로 삼지. 아랍과 아프리카를 망라한 제3세계의 세계화이기도 하지.
김형수 진창에서 고귀한 꽃이 핀다는 정신은 광범한 지역에서 공유되는 것 같아요. AALA(아시아·아프리카 작가회의)가 로터스 상을 제정한 뜻도 거기에 있으니까요.
고은 아득한 옛날 불교도 연꽃을 교화(敎花)로 삼고 있어. 묘법연화경은 바로 연꽃의 수트라(경전) 아닌가. 절의 대웅전 불상 좌대도 연화대이지. 더구나 진흙탕 속에서 털끝만치도 더럽히지 않고 피어나는 연꽃에 보살의 품성을 비유함으로써 ‘연꽃처럼 물에 젖지 않는다(如蓮花不着水)’라는 대승세계를 표방하기도 하지.
김형수 불교와 연꽃의 친화가 혹시 석가모니의 탄신일과 관계되지는 않을까요?
고은 탄신일은 사실 불확실하다네. 지금이야 온갖 꽃들이 철없이 피어나는 꽃 사태 속이지만 내 어린 시절은 마을에 피는 꽃이래야 뒷동산 진달래 말고는 몇 집 마당에 서 있는 살구꽃밖에 없었지. 아니 맨드라미와 봉선화, 옥잠화가 더러 울 밑에 있었지. 그런 꽃 가난 속에서 수백 송이 수천 송이 연꽃이 피어난 장관은 과분하기까지 한 축복이었어.
김형수 음력 사월초파일에 저수지에는 연꽃이 피고 절에는 연등이 켜지던 기억이 납니다.
고은 해마다 여름의 유월이면 그 꽃의 장관은 어김없이 마을사람들의 눈을 빛나게 했지. 1948년 38선을 두고 남과 북의 각자의 정부를 적대적으로 선포하면서 한층 더 세상의 정세가 착잡하고 불안한 중에 새로운 국가의 살림살이가 시작되었어. 이 해에 실시된 첫 국회의원 선거를 두고 국내 도처에서 선거를 반대하는 사태가 벌어지기도 하고 제주도 사태와 여수·순천 사태의 극한상황으로 되고 말지. 군산 일대에 있던 12연대도 여수·순천 쪽으로 가서 그곳 진압작전에 투입되었지.
김형수 연꽃 속에 여순사건이 숨어 있다니! 풍경이 상처입니다.
고은 바로 그해 봄에 미제방죽의 연꽃이 피어나지 않았어. 어떤 영문인지 모르게 연이 일제히 죽어버렸어. 봄이 지나 여름이 되어도 말라버린 연들이 살아날 가망이 전혀 없었지. 마을 어른들은 ‘연이 떠나버렸다’하고 혀를 끌끌 찼어. 이어서 ‘장차 난세가 올 모양이여’ 하고 근심 어린 예감을 내보이기도 했지. 말하자면 그 미제방죽은 물의 폐허가 된 것이네. 그곳의 연들이 저승으로 갔다는 마을 할머니들의 허튼말이 나의 귓전에 남겨졌어. 다음해에는 말라버린 연줄기와 연잎들이 치워져서 텅 빈 민낯의 수면에 건너편의 길게 뻗어난 언덕들의 그림자가 무표정으로 드리워졌지.
김형수 사람이 난리를 겪는 것과 식물이 변란을 일으키는 관계를 과학적으로 해명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제 고향 대숲도 전쟁 때 말라죽었다고 들었어요. 미신 같지만 그런 말이 제게 인간과 세계가 연결되어 있음을 가르쳤습니다.
고은 그런데 그 호수 수면이야말로 나에게 거울이라는 자아와 세계가 반영하는 제2의 거처라는 사실을 조금씩 터득시켰지. 나르시스의 수면은 신화이기보다 고대의 현실 아닌가. 그것이 현실이 아닌 한 이제까지의 나르시스 이론들의 허위의식들도 동반하겠지. 수면의 거울 없이는 나 자신을 객관화할 수 없을 때 거기에 수면이 있게 되었지. 인류가 맨 정신으로 살 수 없을 때 수렵·채집 시기 어느 산등성이 나무열매들이 떨어져 고인 물속에서 발효된 것을 한 모금 마신 이래 술이 시작된 것처럼 말이네. 인간에게 취흥이 있어야 할 때 그 술이 나타나지. 인간에게 마취의 황홀경과 자기 승화의 경지에 있어야 할 때 마취의 풀이 있게 되었어. 신이나 영혼이란 이런 일상 초월의 일탈적인 체험 속에서 만들어진 영혼이나 무한에의 심상들 아닌가. 그러므로 절대자란 환각의 이데올로기야.
김형수 이미지의 기원에 대해 알 것 같습니다.
고은 나는 학교에서 돌아오는 저녁 어스름 속이나 일찍 상현달 달빛을 머금고 있는 그 호수의 무언 속에 나를 이끌어들이는 어떤 힘이 있는 것을 느꼈어. 주관은 대상을 변주시키지. 그 정적(靜寂)에게 내 몇 마디 푸념을 바치기도 했어.
김형수 <만인보>의 ‘우물’ 같은 ‘수면의 마력’은 분명히 경험이 영(靈)을 낳는 걸 보여줍니다.
고은 미제방죽은 오래전부터 있었던 천년 저수지였던 모양이야. 가령 김제 벽골제는 인공이지만 미제방죽 둑은 자연 조성에 인력을 좀 보탠 셈이지. 그래서 한국전설대계에도 수록되는 미제지 전설이 있어. 탁발승에게 악덕 지주가 똥무더기를 담아주는 것을 본 며느리가 몰래 시아버지 대신 사과하며 쌀 한 되를 보시했어. 그것에 감사하는 탁발승이 “아기를 데리고 어서 집을 떠나라, 떠나되 뒤를 돌아보지 마라” 하고 사라졌지. 재난 예고였어. 그 며느리 모자가 떠나면서 돌아보다가 돌로 굳어져서 아기바위와 어미바위가 서로 얽힌 것이 있고 그 뒤를 따르던 개도 굳어져서 개바위로 앉아 있게 되지. 그러자 넓은 논과 집이 있던 곳이 물로 차서 방죽이 되었다는 전설이 어쩌면 고대 마한의 저수지사업 이래의 수몰 지구에서 착상되었는지 몰라.
김형수 전설이란 어떤 형상에 나붙는 사후 스토리텔링이기 십상이지만, 그렇게 직조된 민간 서사가 당대 세계를 구성하는 문화의 기둥임은 분명합니다. 그런 전통의 외피에서 가벼운 유행 문화가 머물다 가잖습니까.
고은 마을 청년들은 ‘해방의 노래’ 대신 남인수의 ‘가거라 삼팔선아’를 자주 불렀어.
김형수 선생님은요?
고은 나는 귀동냥만 했지. 한밤중의 달과 별의 잔치판이야말로 풍요로웠어. 과연 낮에는 구름들의 지칠 줄 모르는 형상 작용이 있고 밤에는 거짓 하나 용납되지 못하는 진실의 어둠 그리고 완벽한 만월과 각자의 긍지로 빛나는 별들의 신명들이 있어 그것은 내 지상의 온갖 불운과 결핍들을 다 탕감하고도 남는 우주의 무량(無量)이었지. 윌 듀런트가 인류 역사를 생물학의 한 부분이라고 말한 것은 아귀가 맞는 것이지.
김형수 저도 요즘 그런 생각에 빠져 있습니다. 인류사는 정말 생물학의 한 부분 같아요.
고은 처음부터 인간은 자연 또는 우주의 미물이 아닌가. 우주의 무(無)가 발생시킨 화학물질이 생물의 시작 아닌가. 인간의 문명 또한 먼지일 뿐이야. 그래서 나는 책 속의 사마천이나 랑케, 토인비에게 “그대들 북두칠성을 하룻밤만 우러러보게”라고 중얼대지.
김형수 그러면서도 삶은 ‘지금 여기’의 것이니 현실의 고통이 세계를 맞는 창구가 아닐까요?
고은 이 세상에서 해 뜨고 해 지는 것만큼 위대한 사업이 어디 있겠는가. 무릇 오랜 인문사회의 고담준론들에 대고 선(禪)에서 단 한마디 헛소리 내지르는 것도 그 까닭이 있지 않은가. 이런 인간의 영점으로 시작하는 것이 다시 한번 성찰의 삶을 살아가는 기본자세인지 몰라. 인간의 거대 명제들이 거시사가 아니라 미시사 속의 과제들이라는 적나라한 사실이 세계 구성의 요체이겠지. 지금 우리가 고조선 말기의 어떤 곤혹도 실감 나지 않는 것처럼 몇 백 년 그날 어느 누가 오늘의 이 미완성 역사 현실을 자신의 문제로 인식하겠어. 이런 역사의 허망까지도 등에 지고 역사의 전위에 나서는 당대의 정신사적 정밀화가 있을 법하네.
김형수 오늘의 정세를 견디는 데 상당히 위안이 됩니다. 분단의 비애에 부대끼고 있었는데요.
고은 해방 시기 3년 그리고 6·25 남북전쟁 전야의 선험들 속에서도 한반도의 긴 시간들은 중단될 수 없었지. 역사는 단명의 꽃이나 요절의 꿈으로는 역사의 의미를 달성할 수 없지 않은가. 시간과 공간은 인간이 그 속에서 항구적으로 지속하는 삶의 내용을 채우라고 제공한 무상(無償)의 무대 아닌가.
김형수 전에 대륙적 상상력을 얘기하면서 ‘시간의 대륙’을 강조한 까닭을 알 것 같습니다. 많은 것들이 그때 보이겠지요?
고은 실제로 역사의 진행은 도시 일대나 무력행사의 현장 말고는 한반도 대부분의 각 지역들은 농촌 풍경의 초가지붕 한쪽에 달린 굴뚝에서 저녁 연기 피어오르는 것이 그것의 상례였지. 역사학이 이 엄연한 사실을 쏙 빼버리고 있어. 총 경지면적 60%가 소작지였고 전체 가구 206만여 호의 절반 이상이 소작농이고 소작과 약간의 자작을 함께하는 가구가 35%쯤인 한반도 농촌의 그 무의식적인 먹고살고의 일상 말이네. 그래서 여운형이 해방 직전 조선총독부와 담판하던 5개 조항 중에 식량 확보가 있는 것이고 해방 시기 3년간의 미군정청의 엉터리 양곡 정책으로 대구의 10월 항쟁이 일어나는 단서가 되기도 했지.
김형수 우리의 인식은 애도 중에도 끼니를 잇는다는 사실을 왜 빼먹는지 몰라요. 인간은 제 발밑도 온전히 들여다볼 수 없어요.
고은 북의 전면 토지국유화와는 달리 남의 어정쩡한 토지개혁도 농민의 식량과 경작지 문제가 적막한 상황에서 이루어지게 되지. 이승만 정부는 표면적으로는 일부 마음에 드는 독립운동가나 애국인사를 끼워 넣는 구성이었지만 그 실질 기반은 식민지시대의 옹골찬 기득권이 그대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도로 앉아버린 셈이었지.
김형수 비유가 절묘합니다. 해방은 외세가 훌쩍 일어섰다가 다시 눌러앉은 사건 같아요.
고은 행정기술의 실무는 처음부터 일제 총독부 체제 테크노크라트의 답습이었지. 이런 중에는 해외 활동에서 매우 로맨티시스트였던 이범석은 국무총리직 첫 출근에 애마(愛馬)를 타고 마치 청산리전투 당시의 작전지휘관처럼 중앙청 앞거리를 말발굽 소리를 내며 사람들의 이목을 이끌었지. 국가지상, 민족지상의 구호 아래 그는 민족청년단 세력을 만들지만 국내외에 이렇다 할 정치 기반이 없던 이승만이야 한민당의 상당한 내응(內應)과 그 밖의 군소추종자들 그리고 친일과 동시에 반공 우익을 내세우는 국내 기득권과 토착 기반을 잘도 활용했어. 그러므로 뭔가 작당한 것이 나타나면 기어이 그것을 괘씸으로 제거하거나 해체했어.
김형수 박정희가 ‘근대화’를 통치 도구로 쓰듯이 이승만도 이데올로기를 내걸지 않았습니까?
고은 이런 분위기에서 안호상의 일민주의(一民主義) 이론은 바로 이승만 사상을 선양함으로써 충성을 다하기 시작했어. 그 일민주의란 기왕의 중국 대륙의 좌우가 두루 섬기던 쑨원의 삼민주의에 대한 한반도적 대안으로 과장되기도 했어. 우르르 이승만주의를 꽃피웠어. 그것은 3·1운동 직후의 문화정치 시대의 난데없는 주식회사, 유한회사 따위의 허망한 경제 의욕이 우후죽순인 것이나 해방 직후 군소 정당 몇 백개인 것과도 유사한 것이었어.
김형수 그 반대편은요?
고은 한편으로 지리산과 그 밖의 태백산맥의 몇 군데 근거지로 들어갈 수밖에 없던 남로당 불법화 이래 이른바 ‘구(舊)빨치(빨치산)’들은 영호남 각 도당(道黨) 우두머리와 북의 지령에 닿아 있는 정치 참모들이 지도부를 이룬 유격대 활동을 하게 되었어. 벌써 북의 신생 정권에 소외된 이현상 등은 남하함으로써 고립주의로 나아가지. 그래서 낮에는 대한민국이고 밤에는 인민공화국이 되는 산악 기슭의 촌락은 가장 고통스러운 현장일 수밖에 없었지. 나는 제주사태나 여순반란사건 그리고 지리산의 유격대 얘기와 그 지리산 공비 토벌의 국방군이나 전투경찰의 숨 가쁜 활동도 이웃집 소문으로 듣고 살아야 했어. 우리 마을 3대 독자인 순경도 거기 가서 전사했지. 김재환이라는 사람이야.
김형수 세월은 마치 강이 기슭을 지나듯 전쟁을 향해 흐르고 있네요.
고은 세상은 첫 여름의 초록이나 장마 끝의 저녁 쌍무지개처럼 아름다운 것만은 아니었는데 이럴 때 나는 교과서 몇 권 이외의 책들을 갈구했어. 사르트르나 보르헤스처럼 책 속에서 자라난 게 아니라 나는 책이 없는 상태에서 책을 꿈꾸다가 그 꿈이 하나하나 실현될 때 책을 깨닫게 되었어. 책의 부재가 더욱 책의 실재를 강렬하게 만들어 주었어. 책 속에 들어 있는 오래 잠든 은(銀)빛 나는 광채나 밤중의 번개 섬광과 같은 예리한 한두 줄의 말들이 가난한 시골 아이의 가슴속에서 지진을 일으키기도 했지. 어떤 낙후된 상황이더라도 그 상황 속에서 한 인간의 전반기는 선구적으로 작동했던 것이지. 2학년이 되면서 더 내면적으로 되었어.
김형수 선생님의 담화는 ‘존재와 세계의 마찰’ 부위에서 태어납니다. 그것이 정신의 확장으로 연결되는 과정을 저는 듣고 있어요. 편의점의 빵을 먹고 싶은 욕망과 하늘의 별을 먹고 싶은 허기의 차이, 그리고 그 배고픔이 지불되어 일으키는 내면의 변화가 어떤 것인지를 느끼는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