ㅣ서양미술 산책ㅣ
죽음의 파토스
아르놀트 뵈클린
Arnold Böcklin
1827–1901

뵈클린 <그리스도를 애도하는 막달레나> 1868. 캔버스에 유채. 바젤 미술관
아르놀트 뵈클린의 상징주의는 1850년대 영국에서 인기를 끌던 라파엘전파처럼 리얼리즘이 천착한 동시대적인 주제보다는 과거의 신화나 전설, 문학작품 등을 즐겨 다뤘다. 상징주의는 환상을 불러일으키는 분위기와 형상들을 고전적인 건축물을 배경으로 다뤘고 죽음이라는 주제에 집착했다. 기질적으로는 19세기 초반에 풍미하던 낭만주의의 정신을 이어받아 문학과 신화에서 따온 주제를 형상화하였고, 음울한 정신과 예민하면서도 내성적인 성향을 상징주의 예술의 중요한 태도로 파악하였다. 상징주의 자체는 19세기 말에 다시 대두되지만 프랑스 출신이었던 귀스타브 모로나 스위스 출신이었던 아르놀트 뵈클린 등을 통해서 1850년대부터 유럽 화단에서 인기를 끌기 시작했다.
강렬한 죽음을 극화하는 작품
뵈클린이 1868년에 제작한 <그리스도를 애도하는 막달레나>(The Lamentations of Mary Magdalene on the body of Christ)를 살펴보자. 그리스도의 죽음을 애도하는 막달레나라는 주제는 르네상스 화가들의 작품에서도 많이 볼 수 있지만, 막달레나의 슬픔은 극적으로 과장되어 있고, 왼쪽에 누워 있는 예수의 모습 또한 기존의 그림에서 볼 수 없던 표상을 보여준다. 막달레나의 베일이 예수의 하반신을 휘감고 있어서, 제목을 보지 않는다면 종교적인 죽음이라고 단정할 수 있는 부분이 별로 보이지 않는다. 뵈클린이 1885년에 제작한 <피에타> 또한 그리스도와 마리아의 주제라고 하기에는 석연치 않은 종교적인 도상을 보여준다. 오히려 강렬한 죽음을 극화하는 작품으로 상징주의 문인들과 화가들이 칭송하던 ‘죽음’이라는 주제를 통해서 멜랑콜리한 감정의 파토스를 전달하려는 의지를 전달한다. 종교적인 도상을 이용한 비종교적인 메시지는 영국 출신의 화가인 포드 매덕스 브라운이 제작한 <당신의 아이를 데려가세요>(Take Your Son, Sir, 1867)에서도 강조된다. 성모 마리아의 모습을 한 어머니는 자비로운 여성이 아닌, 음울한 이미지로 재현되었다.

(좌) 뵈클린 <자화상> 1872. 캔버스에 유채, 75×61cm, 베를린 국립미술관 (중) 브라운 <당신 아이를 가져가세요> 1867.캔버스 유채, 70×38cm, 테이트 갤러리 (우)뵈클린 <죽어가는 클레오파트라> 1872. 캔버스에 유채, 76×61.5cm, 바젤 미술관
1872년에 제작된 뵈클린의 <자화상>(Self-Portrait)은 상징주의 화가의 선언서에 해당하는 작품이다. 그림 속에 등장하는 뵈클린의 왼쪽 어깨 위에는 죽음을 상징하는 해골이 바이올린을 연주하며 화가를 주시한다. ‘죽음’은 상징주의 미술가들에게는 ‘내적 비전’을 볼 수 있는 상상력과 영감을 의미했을 정도로 중요한 주제로 다뤄졌다. 상징주의자들은 세속적인 세상을 바라보는 ‘눈’을 감고, 내적 세계를 향할 때 지금까지 우리가 보지 못했던 상상력을 주시할 수 있는 태도가 형성된다고 보았다. 그리하여 눈을 감은 모습이나, 입을 막은 ‘침묵’은 내적 비전을 인도하는 메타포 역할을 했다.
같은 해에 제작된 <죽어가는 클레오파트라>(The Dying Cleopatra, 1872)도 귀스타브 모로와 같은 프랑스 상징주의 화가들이 많이 다루던 주제이면서, ‘죽음’을 상징하는 작품이다. 특히 클레오파트라와 같은 여성은 동시대에 등장했던 ‘요부’(femme fatale)의 존재로서 상징주의자들에게 인기를 끌었다. 매력적이면서도 동시에 파괴적인 이 여성들은 살로메와 유디트와 함께 19세기 후반에 지속적으로 등장한다. 긴 머리와 매력적인 몸매로 남성을 유혹하지만, 남성이 유혹당하는 순간 이들을 파멸로 이끄는 요부들의 모습은 19세기 말에 등장하는 페미니스트들의 여권 신장 운동과도 상당 부분 연관성이 있었다.
뵈클린이 제작한 클레오파트라와 같은 요부 이미지는 동시대 벨기에의 상징주의자였던 페르낭 크노프의 작품에서도 엿보이며, 스핑크스 또한 남성을 파멸로 이끄는 요부로 존재한다. 뵈클린이 1878년에 제작한 <메두사>(Medusa)의 두상은 상징주의자들의 시와 회화에 자주 등장하는데, 고통을 받는 메두사의 모습은 인간이 처한 절망과 병적인 암울함을 암시했다. 이러한 요부 이미지와 더불어 자연으로서의 여성의 모성애도 강조되었는데, 레옹 프레델릭>(Léon Frédélic)은 <자연>(Nature, 1897)에서 대지를 꽃피우는 여성의 덕목을 강조하였다.

(좌) 뵈클린 <메두사> 1878. 캔버스에 유채 (중) 레옹 프레델릭 <자연> 1897. 캔버스에 유채, 댈러스 뮤지엄 오브 아트 (우) 모로 <클레오파트라> 19세기경. 파스텔, 유화, 39.5 x 25 cm, 루브르 박물관
삶의 상실과 기쁨이 교차하는 세계
뵈클린이 제작한 작품 중 가장 널리 알려진 상징주의 회화는 <죽음의 섬>(Isle of the Dead)으로 5개의 각기 다른 버전이 존재하며, 1880년과 1886년에 집중적으로 제작되었다. <죽음의 섬>은 뵈클린이 죽은 이후, 판화로도 제작되었을 정도로 인기가 많았고, 20세기 초반의 철학자들뿐 아니라 정치가, 소설가 등이 소장한 사실로도 유명세를 탔다. 블라디미르 나보코프도 이 중 한 사람이었다.
<죽음의 섬>은 뵈클린이 이탈리아의 피렌체에서 체류했을 때 그린 작품으로, 그곳에서 태어난 딸 마리아의 죽음을 애도하는 작품이다. 뵈클린의 부인은 총 14명의 아이를 가졌지만 이중 8명은 사망했는데, 실제로 뵈클린의 작업실은 마리아가 묻힌 공동묘지 근처에 위치했고, 총 5개의 버전 중 3개는 이곳에서 제작되었다. 현재 바젤에 있는 작품이 제일 첫 번째 작품으로 뵈클린이 후원자였던 A. 귄터를 위해 제작한 것이다. 이후 이 작품을 본 마리 베르나 부인은 첫 번째 버전과 똑같은 몽상적이고, 몽환적인 작품을 뵈클린에게 의뢰했다. 이것은 현재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 있는 작품으로 첫 번째 버전보다는 작은 크기로 나무 위에 제작되었다. 다만, 베르나 부인이 남편을 잃은 직후였기 때문에, 관 옆에는 애초에 있던 남성 이미지 대신 여성 이미지를 더했다. 한때 히틀러도 뵈클린의 이 작품을 좋아해 다른 버전을 잠시 소장하기도 했다. <죽음의 섬>이 생명의 상실을 보여준다면, 이 작품을 마친 이후에 뵈클린이 제작한 <생명의 섬>(Isle of Life, 1888)은 삶의 기쁨이 엿보이는 그림이다.

뵈클린 <죽음의 섬> 1883. 베를린 내셔널 갤러리(세 번째 버전)

뵈클린 <죽음의 섬> 1886. 라이프치히 미술관( 다섯 번째 버전)
<죽음의 섬>은 황량한 분위기를 전달하며, 수직으로 뻗어 있는 나무와 바위 앞에는 어두운 바닷물이 그려졌다. 사람이나 식물이 살 수 없을 정도의 어둡고 암울한 배경 사이로 작은 배가 한 대 중앙에 떠 있다. 노를 젓는 사람 옆에는 흰옷을 입은 인물이 중앙에 서 있으며, 그 뒤로는 수평으로 긴 하얀 박스가 놓여 있다. 이것은 ‘관’으로 보이며, 바위산 중앙에 있는 사이프러스 나무는 공동묘지 등에서 자주 등장하는 나무로 해석된다. 물론, 화가는 이 작품에 대해 상징주의적인 해석을 시도한 적이 없고, 오히려 ‘꿈을 그린 그림’으로 어떤 정적인 느낌을 구현하는 작품으로 설명했다. 그는 이 작품을 <죽음의 섬>이라는 제목을 붙이지도 않았다. 오히려 1883년 이 작품을 거래하던 화상이 이 제목을 사용한 것으로 추정된다. 상징주의 해석을 시도하는 사람들은 노를 젓는 인물을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카론(Charon)으로 해석한다. 카론은 그리스 신화에서 영혼을 저승으로 인도하는 존재로, 미켈란젤로가 시스티나 예배당의 천장화에 있는 <최후의 심판> 맨 아래에 위치하는 신화적 인물이다. 그렇게 본다면 <죽음의 섬>이 위치한 강은 그리스 신화에서 저승에 있는 스틱스 강(The River Styx, 三途川)을 의미한다.

(좌) 뵈클린 <오디세우스와 칼립소> 1883. 목판에 유채, 150×104 cm, 바젤 미술관 (우) 뵈클린 <귀향> 1887. 캔버스에 유채, 78×100cm, 취리히 미술관
1887년에 제작한 <귀향>(Homecoming)이라는 작품은 음악가인 라흐마니노프에게까지 영향을 미친 작품이며, 앞서 말한 <죽음의 섬> 또한 라흐마니노프가 같은 제목의 작품을 작곡하는 데 많은 영감을 주었다. 한 남자가 어둠 속에 불빛이 흘러나오는 곳을 향하는 <귀향>은 음울한 느낌을 떠나 시적인 분위기를 전달하며, 나무 처리 또한 잔잔한 느낌을 전달한다. 비슷한 분위기를 전달하는 작품은 <오디세우스와 칼립소>(Odysseus and Calypso, 1883)로, 이전에 비해 절제된 색채와 단순한 형태로 처리되었으며, 두 연인의 애절한 느낌을 잘 전달한다. 오디세우스와 칼립소는 7년간 사랑을 나누지만, 고향으로 떠나야하는 오디세우스와 그를 사랑하는 칼립소의 모습이 서로 동떨어진 채 그려져 애틋한 관계로 표현되었다.
이탈리아에서의 작업
뵈클린은 스위스, 이탈리아, 독일을 거점으로 활동했지만, 유럽 전체를 계속해서 여행하면서 과거의 문학과 미술에서 영감을 받았다. 초창기에는 대형 벽화를 제작하며 명성을 쌓았고, 신화를 모티프로 다룬 프레스코도 제작했다. 그는 뒤셀도르프 아카데미에서 공부하였으며, 벨기에의 앤트워프와 브뤼셀, 파리의 루브르 미술관 등지를 다니면서 플랑드르 미술과 프랑스 미술의 걸작들을 모사하였고 이를 통해 독특한 상징주의 세계를 구축하였다.
뵈클린은 1850년 로마로 여행을 떠났으며 1853년 그곳에서 이탈리아 여성과 결혼하였는데, 이탈리아 미술에서 본 알레고리나 내러티브는 곧 그의 작품 형성에도 영향을 미치기 시작했다. 이탈리아의 르네상스 미술과 바로크 미술에 등장하는 신화적인 내용은 뵈클린이 제작한 작품인 <님프와 사티로스>(Nymph and Satyr), <영웅적인 풍경>(사냥하는 디아나, 1858), <사포>(Sappho, 1859)라는 제목에서 엿보인다. 1856년 뮌헨으로 돌아온 뵈클린은 곧 바이마르 아카데미의 교수로 재직하면서 작업을 병행하였지만 이탈리아를 잊지 못했다.

뵈클린 <사냥하는 디아나> 1896년. 캔버스에 유채, 100×200 cm, 오르세 미술관 소장
뵈클린은 1862년부터 1866년까지 4년 동안 다시 로마에서 체류하면서 화려한 색채를 실험하기 시작했다. 이 시기에 제작된 작품들은 <뵈클린 부인의 초상>(Portrait of Mme Böcklin), <황야에서의 은자>(An Anchorite in the Wilderness, 1863) 등이 있다. 이후 그는 바젤, 취리히, 피렌체 등지를 다니며 이탈리아 미술의 특징과 북부미술의 특징을 혼합한 독특한 상징주의 회화를 구축하였다.
지금까지 살펴본 음울한 풍경화와 신화에 영향을 받은 환상적인 작품은 이후 이탈리아의 데 키리코뿐 아니라 초현실주의 작가인 살바도르 달리에게도 많은 영향을 미쳤다. 눈으로는 볼 수 없지만, 마음으로 상상할 수 있는 환상, 신화, 환영, 비전 등은 상징주의자들에게 과거의 미술에서는 볼 수 없었던 무궁무진한 영감의 보고를 제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