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우스(Zeus)는 고대 그리스 신화에서 최고의 권력을 자랑하는 신들의 제왕이다. 그런데 이 신의 유래가 흥미롭다. 기원전 20세기경, 발칸 반도 북쪽으로부터 오늘날 그리스인들의 뿌리가 된 인도유럽어 계통의 종족들이 침입해 들어왔는데, 제우스는 바로 이들이 섬기던 ‘하늘의 아버지’ 혹은 ‘빛나는 하늘의 신’이었다는 것이다. 이 새로운 이방신은 점차 크레타 섬을 중심으로 한 이 지역 원주민의 신과 결합되어 마침내 하나의 신으로 여겨지게 되었다.
이후 제우스에 관한 수많은 전설은 호메로스(Homeros)와 헤시오도스(Hēsiodos)와 같은 고대 그리스의 서사 시인들과 역사가들을 통해 기록으로 남겨져 전해졌다. 그리고 로마 시대에 와서는 로마신 유피테르(Jupiter)와 동일시되어 시인 오비디우스(Publius Ovidius Naso)의 <변신이야기>(Metamorphoses)에는 자유자재로 모습을 바꾸는 이 신의 흥미로운 모험담이 그려져 있기도 하다. 우리가 아는 고대 그리스 로마의 제우스 신화는 바로 이러한 문헌들을 근거로 한 것이다. 그 중에서도 특히 <변신이야기>는 르네상스 이후 유럽의 문학과 미술작품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신들의 제왕 제우스의 일화를 미술작품들과 함께 짚어보자.

니콜라 푸생 <유피테르의 양육> 1635~1637년. 캔버스에 유채, 95×118cm, 덜위치 박물관
제우스의 탄생, 신들의 왕
제우스의 아버지는 잘 알려져 있다시피 대지의 여신 가이아와 그녀의 아들이자 남편인 우라노스 사이에서 태어난 티탄 12신 중 막내인 크로노스였다. 그는 장차 자식에 의해 내쫓길 운명이라는 예언을 듣고 자신의 자식들이 태어나자마자 통째로 삼켜버리는 비정한 아버지였다. 보다 못한 아내 레아는 여섯 번째 아이를 낳자마자 그를 아이가이온 산기슭의 동굴에 숨기고 남편에게는 강보로 싼 돌덩어리를 대신 건네주었다. 아무것도 눈치 채지 못한 크로노스는 아이 대신 돌덩어리를 삼키고는 만족스러워했다. ▶프란시스코 고야 <아들을 먹어치우는 사투르누스> 1819~1823년. 캔버스에 유채, 83×146cm, 프라도 미술관
이렇게 살아남은 아이가 바로 제우스였다. 그는 크레타의 이다 산에 사는 님프들에 의해 길러졌으며 암염소 아말테이아의 젖과 야생 꿀을 먹고 빠르게 성장했다. 프랑스 고전주의를 대표하는 화가 니콜라 푸생(Nicolas Poussin)의 그림은 바로 이 장면을 묘사한 것이다. 화면 중앙 아래쪽에 님프의 품에서 염소의 젖을 받아 마시고 있는 어린 제우스가 보인다. 장성한 제우스는 지혜의 여신 메티스가 준 약을 크로노스에게 먹여 형과 누이들을 토하게 했다. 이 다섯 남매가 헤스티아, 데메테르, 헤라, 하데스, 포세이돈이다.
크로노스의 뱃속에서 구출된 다섯 남매와 제우스는 힘을 합쳐 아버지를 폐위시키고 티탄 신들을 지하 깊숙한 타르타로스에 가두는 데 성공한다. 이때 제우스 연합군에는 크로노스의 또 다른 형제들인 키클로페스 3형제와 헤카톤케이레스 3형제도 있었다. 이들은 자신들의 아버지 우라노스에 의해 타르타로스에 갇혀 있다가 조카인 제우스로 인해 빛을 보게 된 터였다. 그 보답으로 키클로페스 3형제는 제우스에게 천둥과 번개, 그리고 벼락을 만들어주었고, 이때 제우스와 헤라 사이에서 난 아들인 대장장이 신 헤파이스토스도 한 몫 거들었다고 한다. 이후 번개와 벼락은 신조 독수리와 함께 제우스와 늘 함께 등장하는 지물(持物)이 되었다. 이탈리아 르네상스 시대의 조각가이자 금속 세공가로 명성을 떨친 벤베누토 첼리니(Benvenuto Cellini)의 작품을 보자. 미끈한 청동 몸체에 날렵한 포즈의 제우스가 머리카락을 나부끼며 오른손에 든 번개를 막 내리치려는 순간이다. ◀첼리니 <유피테르> 1545~1553년. 청동, 높이 98cm, 바르젤로 국립미술관, 피렌체
이렇듯 형제와 누이들을 구하고 아버지를 몰아내는 전쟁에서 승리한 막내아들 제우스는 명실 공히 신들의 제왕이 되었다. 각 신들이 관장할 영역도 정해졌다. 천계는 제우스가 맡고 헤라는 그의 아내가 되어 결혼과 출산을 담당했다. 데메테르는 대지와 곡물을, 포세이돈은 바다를, 하데스는 저승을, 그리고 헤스티아는 인간의 건강과 가정을 지키는 역할을 맡았다. 이제 거칠고 우악스런 거신 족에서 한결 세련되고 지적인 올림포스 신들로 세대교체가 이루어졌다. 그리스-로마 신화의 무대인 올림포스 신족의 시대가 시작된 것이다.
헤라, 만물의 어머니에서 질투의 화신으로
앞에서 언급한 대로 제우스와 헤라의 아들 헤파이스토스가 벼락 제작에 참여했다지만, 헤시오도스에 따르면 이들의 결혼은 티탄 신들과의 전쟁에서 승리한 뒤에 이루어졌다고 기록되어 있다. 어찌되었건, 제우스와 헤라의 결혼은 여러 모로 흥미로운 지점을 제공한다. 사실 그리스어 ‘영웅(Heros)’의 여성형에 해당하는 ‘헤라(Hera)’는 이방신 제우스를 중심으로 한 올림포스 신화가 정립되기 이전부터 이미 그리스 반도 원주민들에게 대지모신(大地母神)으로 숭배되던 신이었다고 한다. 대지모신은 ‘위대한 땅의 어머니 신’으로서 원시 모계사회를 대표하는 여신이었다. ▶렘브란트 <유노> 1662~1665년. 캔버스에 유채, 107.5×127cm, 해머 박물관
이러한 헤라가 올림포스 신화에서는 제우스의 누이와 아내로서 가정과 결혼, 출산의 여신이 되었다는 것은 명백한 권위 실추이자 모권 신화로부터 부권 신화로 이행해가는 과정, 즉 가부장제 이데올로기의 확립에 따른 것이라고 학자들은 설명한다. 더욱이 제우스의 끊이지 않는 외도 앞에 헤라는 만물의 어머니에서 한낱 질투의 화신으로 변해버린다. 그리고 가정을 지키기 위해 남편이 아닌 상대 여인들과 자식들을 해코지한다.

제임스 베리 <이다 산 위의 주피터와 주노> 1790~1799년. 캔버스에 유채, 127×101.6cm, 셰필드 미술관
실로 바람둥이 제우스의 일화는 그리스-로마 신화가 남성 본위의 부권 신화임을 잘 드러내 보여준다. 제우스는 아내인 헤라 이외에도 수많은 여신 및 여인들과 관계하여 자식을 얻고, 이들은 올림포스 신족의 대열에 합류하거나 인간세계의 영웅이 된다. 지혜의 여신 메티스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테나, 티탄 신족 레토에게서 얻은 쌍둥이 남매 아폴론과 아르테미스, 역시 티탄의 딸인 마이아가 낳은 헤르메스, 이 밖에도 데메테르에게서 페르세포네가, 인간인 세멜레에게서는 디오니소스가 태어났다. 그러나 이들 가운데 아버지 제우스의 권좌를 위협하는 자식의 탄생은 원천적으로 봉쇄되었다. 메티스가 낳는 아들이 아버지를 내칠 것이라는 예언을 들은 제우스는 임신한 메티스를 작게 만들어 삼켜버린다. 그리고 몇 달 후 제우스는 극심한 두통에 시달리게 되었는데, 이때 그의 머리에서 완전 무장한 지혜와 전쟁의 여신 아테나가 태어났다. 결국 아버지를 대신할 아들의 탄생은 저지된 것이다.

르네 앙투안 우아스 <제우스의 머리 속에서 무장한 채 태어난 미네르바> 17세기경. 캔버스에 유채, 135.5cm×190.5cm, 베르사유와 트리아농 궁
‘아버지 신(father-god)’ 제우스의 능력과 권위는 여인들과의 관계에서 더욱 극명하게 드러난다. 그는 자신이 맘에 둔 여인이라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취하고 만다. 특히 자주 쓰는 방법은 ‘변신술’이다. 소아시아의 공주 에우로페에게는 멋진 황소로 변신해 접근하고 얌전한 테베의 공주 안티오페에게는 사티로스로, 아르고스의 왕 아크리시오스의 딸 다나에에게는 황금 비로 변신해 욕망을 성취한다. 스파르타의 왕비 레다를 유혹하기 위해서는 그녀가 좋아하는 백조가 되고, 정숙한 아내 알크메네에게는 남편 암피트리온의 모습으로 다가간다.

프랑수아 부셰 <에우로페의 납치> 1734년. 캔버스에 유채, 273.5x230.8cm, 왈러스 콜렉션

클림트 <다나에> 1907~1908년. 캔버스에 유채, 77×83cm, 개인 소장
제우스의 이와 같은 변신술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일까? 신화 서술가들은 그것이 질투 많은 헤라의 눈을 피하기 위해, 혹은 사랑하는 대상에 쉽게 접근하기 위함이었다고 전한다. 그러나 제우스가 취한 여인들의 정황을 한번 살펴보자. 여인들은 한 치의 의심도 없이 눈앞에 보이는 대로 믿고 받아들인다. 이상한 낌새를 알아챈다 해도 이미 때는 늦었다. 강력한 ‘아버지 신’을 거부할 힘도 의지도 부족하다. 게다가 이들에게서 출생한 자식들은 모두 영웅이지 않은가? 어쩌면 차라리 제우스가 변신하는 것이 나을 수도 있다. 강의 신 이나코스의 딸 이오는 헤라에게 현장이 발각되자 제우스에 의해 암소로 변해버렸으니 말이다. 많은 여성학자들이 그리스-로마 신화에 깃든 남성우월주의를 지적할 만도 하다.

피터르츠 라스트만 <이오와 함께 있는 주피터를 발견하는 주노> 1618년경. 목판에 유채, 런던 내셔널 갤러리
학자들은 이처럼 제우스가 헤라를 비롯한 여신, 또는 여인들과 수많은 관계를 맺는 것에 대해 이방에서 전해진 신흥종교가 토착종교와 결속하고 협력하는 과정을 그린 것이라고 해석하기도 한다. 혹은 제우스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반인반신의 영웅설화는 왕족과 영웅의 혈통을 업그레이드시키기 위해 인간들이 만들어낸 욕망의 산물이라고 설명하기도 한다. 그 어떤 만화책보다 판타지 소설보다, 드라마보다 흥미진진한 그리스-로마 신화를 다시금 펼쳐본다. 이번엔 조금 삐딱한 시선으로.
글 이민수(미술 칼럼니스트) 홍익대학교 미술사학과 졸업, 박사과정에 재학 중이다. 인간, 사회 그리고 미술의 상호 관계와 이 세 가지가 조우하는 특정 순간을 탐구하는 데에서 미술사학의 무한한 매력을 느낀다. 현재 문화센터와 대학에서 미술사를 강의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