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르페우스(Orpheus)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이들 가운데 가장 유명한 시인이자 음악가로 전해진다. 그는 특히 현악기의 일종인 리라를 다루는 솜씨가 뛰어났는데, 그가 리라를 타며 노래를 부르면 인간은 물론 모든 동물들과 나무, 돌덩이까지 감미로운 그 소리에 매료되었다고 한다. 사실 이러한 오르페우스의 천부적인 재능은 그의 부모로부터 물려받았다고 할 수 있다. 다소 엇갈리기는 하지만 고대의 기록에 따르면 오르페우스의 어머니는 예술가들에게 영감을 제공하는 아홉 무사이* 여신 중 한 명인 칼리오페이고 아버지는 트라키아의 왕 아이그로스 혹은 태양신이자 음악의 신인 아폴론으로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무사이(Musai)는 학예(學藝)를 주관하는 여신을 가리키는 그리스어 무사(Musa)의 복수형입니다. 무사에서 영어 뮤즈(Muse)가 나왔으며 뮤직 또한 여기서 유래된 것입니다. 주신 제우스와 기억의 여신 므네모시네 사이에서 9명의 무사가 태어났으며, 칼리오페는 서정시를 주관하는 여신입니다.
자연을 감동시킨 최고의 연주자
오르페우스의 아버지가 누구인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어쨌든 그는 아폴론으로부터 황금 리라를 선물 받아 연주하는 법을 배웠다고 한다. 또한 칼리오페는 아들에게 시와 노래 솜씨를 전수해 주었다. 이 타고난 음악가가 사나운 맹수와 바위에 둘러싸여 연주하는 모습은 미술 작품의 주요 소재가 되었는데, 특히 17세기경 북유럽 지역의 화가들에게 매우 인기가 있었다. 먼저 플랑드르 바로크 화가 세바스티안 브랑스(Sebastian Vrancx)가 그린 <오르페우스와 동물들>을 보자.

세바스티안 브랑스 <오르페우스와 동물들> 1596년경. 패널에 유채, 55x69cm. 보르게세 미술관, 로마.
바이올린처럼 생긴 악기를 연주하고 있는 오르페우스 주변에 온갖 종류의 동물들이 모여 있다. 나무들도 그를 향해 기울었고 사나운 맹수들마저 포효를 멈추고 천상의 음악에 취해 있다. 그런데 가만 보니 북유럽에서는 볼 수 없었던 이국적인 동물들을 비롯해 유니콘과 같은 상상 속의 동물까지 등장해 있다.

알베르트 코이프 <동물들과 함께 있는 오르페우스> 1640년. 캔버스에 유채, 113x167cm. 개인 소장
이번에는 17세기 중반에 활동한 네덜란드의 화가 알베르트 코이프(Albert Cuyp)의 작품을 살펴보자. <동물들과 함께 있는 오르페우스>라는 이 작품 역시 북유렵 풍경 안에 다양한 동물들이 총망라되었다. 붉은 망토를 두른 오르페우스 주위로 말과 개, 고양이, 염소와 같은 농장 동물들이 보이고 이어서 화면 오른쪽의 단봉낙타와 전면에 배치된 두 마리의 표범이 단연 눈길을 끈다. 저 멀리 언덕 위로는 타조와 코끼리 따위가 그려져 있다. 그야말로 동물도감이 따로 없다. 말하자면 브랑스나 코이프 같은 화가들에게 이 주제는 당시 해상무역과 교류를 통해 소개된 이국적인 동물들을 자연스럽게 그려 넣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던 셈이다.
오르페우스와 에우리디케의 사랑
17세기 북유럽 화가들의 다소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고 오르페우스 신화 가운데 미술가들을 가장 매혹시킨 일화로는 단연 에우리디케(Eurydice)와의 사랑 이야기를 꼽을 수 있을 것이다. 오르페우스는 숲의 요정 에우리디케와 사랑에 빠져 결혼했다. 그러나 신혼의 단꿈도 잠시 어느 날 들판으로 놀러 나간 에우리디케는 양치기 아리스타이오스의 끈질긴 구애를 피해 도망가다 그만 독사에게 복사뼈를 물려 죽게 된다.
견딜 수 없는 슬픔에 괴로워하던 오르페우스는 마침내 저승 세계로 내려가 에우리디케를 데려오기로 결심한다. 그는 스틱스 강의 뱃사공 카론과 저승 문 입구를 지키는 머리 셋 달린 괴물 케르베로스를 리라 연주와 노랫소리로 사로잡아 무사히 저승의 왕 하데스와 페르세포네 앞에 도달할 수 있었다. 피테르 브뢰헬의(Pieter Brueghel)의 아들이자 꽃 정물 화가로 유명한 플랑드르의 화가 대 얀 브뢰헬(Jan Brueghel the Elder)의 작품 <하계에 있는 오르페우스>는 실감 나는 지하세계를 배경으로 하데스를 설득하고 있는 오르페우스를 보여준다. ▶아리 셰퍼 <오르페우스와 에우리디케> 19세기경. 캔버스에 유채, 162x128cm. 블루아 성 미술관 소장

대 얀 브뢰헬 <하계에 있는 오르페우스> 1504년. 동판에 유채, 27x36cm. 팔라초 피티, 피렌체
하데스와 페르세포네는 오르페우스가 들려주는 천상의 소리에 감동해 에우리디케를 데려갈 수 있도록 허락했다. 다만 이승에 도달하기 전까지 오르페우스가 절대 에우리디케를 뒤돌아봐서는 안 된다는 조건이 붙었다. 오르페우스는 부지런히 지상을 향해 올라갔다. 이윽고 어두운 지하세계를 거의 다 벗어났음을 알리는 이승의 빛이 희미하게 비쳤다. 그러자 방심한 오르페우스는 에우리디케를 돌아보고야 말았다. 그 순간 사랑하는 아내는 칠흑 같은 어둠 속으로 빨려 들어가 버렸다.
오르페우스의 죽음
오르페우스는 다시금 지하로 내려가 하데스에게 사정해보려 했으나 저승 세계의 문은 두 번 다시 열리지 않았다. 홀로 고향에 돌아온 오르페우스는 실의에 빠져 아무것도 할 수 없었고 이는 그를 죽음으로 몰아갔다. 일설에 의하면 저승에서 돌아온 후 오르페우스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고도 하고 혹은 이때부터 그의 여성 혐오가 시작되었다고도 한다. 에우리디케를 잊지 못하는 마음에 여성을 멀리하고 오직 소년들과만 관계함으로써 동성애자가 되었다는 것이다. 독일 르네상스의 대가 알브레히트 뒤러(Albrecht Durer)의 판화 <오르페우스의 죽음>에는 이러한 내용이 담겨 있다. ◀알브레히트 뒤러 <오르페우스의 죽음> 1494년. 펜 드로잉, 28.9x22.5. 함부르크 미술관
바닥에 떨어뜨린 리라는 무릎 꿇은 건장한 청년이 오르페우스임을 알려준다. 그는 몽둥이를 든 두 여인에게 매를 맞고 있는데, 이들은 오르페우스를 사모한 트라키아 여인들이다. 오비디우스의 <변신 이야기>에 따르면 오르페우스가 트라키아에 동성애를 퍼뜨린 죄로 디오니소스 축제 때 여신도들에게 돌과 몽둥이에 맞아 사지가 찢겨 죽임을 당했다고 한다. 이러한 내용을 참조하듯 뒤러의 판화 속 나무에 걸린 띠에는 ‘오르페우스 남색의 시조(Orfeus der erst puseran)’라고 쓰여 있으며 그 밑으로 악보가 그려진 책이 매달려 있다.
이 잔인하고도 비극적인 이야기는 19세기 프랑스 상징주의 화가들 사이에서 큰 인기를 끌었다. 그 중에서도 귀스타브 모로(Gustave Moreau)는 이 주제를 반복적으로 다루는 한편 상상력을 발휘해 창의적으로 묘사하곤 했다. 그가 1865년경 그린 <오르페우스>에는 한 여인이 레스보스 해안가로 떠밀려온 오르페우스의 머리와 리라를 거두어 이를 유심히 내려다보고 있는 장면이 표현되어 있다. 디오니소스의 여신도들은 오르페우스의 몸을 갈기갈기 찢어 그의 머리를 리라에 박아 헤브로스 강에 던졌는데, 강물을 떠내려 오면서 오르페우스의 머리는 노래를 하고 리라 연주는 계속되었다고 한다. 모로는 이 내용을 토대로 이국적이고 신비로운 분위기의 신화 장면을 탄생시켰다. ▶귀스타브 모로 <오르페우스> 1895년. 패널에 유채, 154x99.5cm. 오르세 미술관
레스보스 해안가에서 거두어진 오르페우스의 리라는 그 후 제우스에 의해 밤하늘의 별자리가 되었는데 이름 하여 거문고자리이다. 또한 오르페우스와 에우리디케 역시 신들에게 선택된 영혼이 머무는 낙원 엘리시온에 거하게 되었다고 전한다. 세부적인 일화에 다소 가려졌을지라도 오르페우스 신화에서 음악은 매우 중요한 모티프이다. 기원전 3세기에 활동한 그리스 시인 아폴로니우스(Apollonius Rhodus)의 서사시 <아르고나우티카>(Argonautika)의 첫 번째 이야기에서 오르페우스가 영혼을 사로잡는 아름다운 연주로 괴물 세이렌의 노래를 제압하고 선원들의 목숨을 구하는 것도 이와 같은 맥락에서 파악할 수 있다. 어떠한 폭력과 마력에도 뒤지지 않는, 저승 세계의 수호자들마저 감동시키는 오르페우스의 음악은 이 신화의 핵심이라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