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로라하는 세 여신, 헤라, 아테나, 아프로디테가 한자리에 모여 최고의 아름다움을 겨루는 시합이 열리게 되었다. 우승자에게는 황금사과가 주어지는 이 시합의 심사위원으로 이다 산에서 양을 치던 목동 파리스(Paris)가 낙점되었고, 보조진행은 헤르메스가 맡기로 했다…”
이름 하여 ‘파리스의 심판’(The Judgement of Paris)이라 불리는 이 세기의 미의 대결은 고대 그리스 시인 호메로스의 서사시 <일리아스>(Ilias)에 기록된 내용을 근간으로 한다. 훗날 오비디우스, 루키아노스와 같은 고대 로마의 작가들은 이 이야기에 살을 붙이고 옷을 입혔다. 그러자 중세 이후 신화 주제에 눈을 돌린 미술가들 역시 이 흥미롭고 매력적인 사건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게 ‘파리스의 심판’은 서양 미술작품에서 가장 자주 등장하는 신화 주제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세 여신이 ‘파리스의 심판’을 받게 되기까지
여신들의 미의 대결의 발단은 바다의 여신 테티스와 인간 펠레우스의 결혼식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플랑드르 출신으로 로마와 브뤼셀에서 활동한 화가 헨드리크 드 클레르크(Hendrik de Clerck)가 얀 브뤼겔(Jan Brueghel the Elder)과 함께 그린 <테티스와 펠레우스의 결혼>에 묘사된 신화 속 장면을 살펴보자. 화면 중앙에 마련된 잔칫상에 혼사의 주인공 테티스와 펠레우스, 그리고 초대된 하객들이 둘러앉아 있다. 기록에 따르면 결혼식은 펠리온 산에서 거행되었고 이 자리엔 거의 모든 올림포스 신들이 초대받았다고 한다. 화면 상단에 축가를 부르는 무사이 여신들도 보인다. 이때 유일하게 초대받지 않은 불화의 여신 에리스가 등장했다. 화면의 오른쪽 윗부분, 검은머리를 휘날리며 날아와 오른팔을 내밀고 있는 이가 바로 에리스이다. 그녀의 손에는 황금사과가 쥐어져 있었다.

드 클레르크 <테티스와 펠레우스의 결혼> 1606~1609년. 동판에 유채, 54x76cm, 루브르 박물관
그 사과는 곧 잔칫상 한가운데 떨어질 찰나였다. 사과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가장 아름다운 여신에게”. 밤의 여신 닉스가 혼자 낳은 딸인 에리스는 고통과 전쟁, 살인, 싸움, 거짓 등을 불러일으키는 여신이었다. 초대받지 못한 자의 복수의 표지인 사과 한 알은 곧 효력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여신들은 서로 사과를 갖겠다고 다투었고 결국 최고의 세 여신만이 남았다. 제우스의 아내이자 신들의 여왕 헤라, 전쟁과 지혜의 여신 아테나, 그리고 미와 사랑의 여신 아프로디테가 바로 그들이었다. 옥신각신하는 세 여신들 사이에서 제우스는 난처했다. 그는 인간들 중 가장 잘생긴 파리스에게 심판을 맡기기로 결정했다. 파리스는 트로이의 왕 프리아모스의 아들로 태어났으나 조국 트로이를 멸망하게 할 운명을 타고 났다는 이유로 이다 산에 버려진 비운의 왕자였다. 다행히 목동 아겔라오스에 의해 구조되어 훌륭한 청년이 된 파리스는 자신의 왕자 신분을 되찾았으나 여전히 아내인 님프 오이노네와 함께 이다 산에서 양을 치며 지내고 있었다. 제우스는 전령의 신 헤르메스를 불러 여신들을 데리고 파리스를 찾아갈 것을 명했다.

[왼쪽] 레이에르 판 블로멘달 <파리스와 오이노네> 1655년. 캔버스에 유채, 272x176cm, 팔라초 다쿠르지오, 볼로냐. 이다 산의 요정 오이노네와 파리스의 다정한 모습이다. 파리스를 사랑한 오이노네는 그와 결혼해 아들 코리투스를 낳았으나 훗날 파리스는 오이노네를 버리고 헬레네와 함께 트로이로 가버린다.
[오른쪽] 도나토 크레티 <헤르메스와 파리스> 1745년. 캔버스에 유채, 123x110cm, 팔레 데 보자르, 릴. 신들의 전령사 헤르메스는 날개 달린 모자 페타소스, 날개 달린 샌들, 그리고 두 마리의 뱀이 감긴 지팡이 카두케우스를 들고 이다 산으로 파리스를 찾아간다. ‘파리스의 심판’ 주제와 관련하여 그는 일반적으로 양치기 개와 지팡이를 든 모습으로 그려진다.
헤르메스와 함께 이다 산기슭에 도착하여 파리스 앞에 선 세 여신. 16세기 독일의 화가 루카스 크라나흐(Lucas Cranach the Elder)가 묘사한 이 장면을 살펴보자. 흥미롭게도 크라나흐는 그림의 배경을 자신이 살고 있는 동시대로 설정했다. 그려진 풍경은 푸르게 펼쳐진 목초지가 아니라 북유럽의 가파른 산세를 보여준다. 무장한 헤르메스는 투명한 구체로 그려진 불화의 사과를 든 채 파리스에게 세 여신을 소개하고 있다. 목동인 파리스는 16세기의 갑옷을 입고 마치 꿈결인 듯 얼떨떨한 표정을 짓고 있으며 세 여신은 평소 그들이 지니고 다니는 어떠한 상징물도 없이 당대 여인들의 머리모양을 하고 각기 다른 방향의 누드로 등장한다. 챙이 넓은 모자를 쓴 여인이 화면 왼쪽 상단의 에로스로 보이는 푸토(putto: 날개 달린 아기 천사)를 지목하고 있어 아프로디테로 추측해볼 수 있지만 확실하지는 않다. 세 여신 모두가 누드로 묘사된 것은 고대 그리스의 문헌이 아니라 헬레니즘기의 예술과 문화를 반영한 로마 시대 오비디우스와 루키아노스의 문학적 전통에 따른 것이다. 크라나흐는 ‘파리스의 심판’을 주제로 12점의 작품을 제작했다고 한다. 당시 이러한 신화 주제는 화가들로 하여금 ‘훌륭한 군주는 균형을 유지해야 하기 때문에 파리스처럼 신의 선물인 영광, 권력, 사랑 중 하나만 선택하면 안 된다’는 교훈적인 메시지를 덧입혀 전달하는 한편, 무엇보다 중세 시대에 제한되었던 여인의 누드를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도록 했을 것이다.

[왼쪽] 크라나흐 <파리스의 심판> 1528년경. 나무에 유채, 101.9x71,1cm,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뉴욕
[오른쪽] 니클라우스 마누엘 <파리스의 심판> 1517~1518년. 캔버스에 템페라, 223x160cm, 바젤 공립미술관, 바젤. 크라나흐보다 10년 정도 앞서 제작된 스위스 화가 니클라우스 마누엘(Niklaus Manuel)의 작품이다. 크라나흐처럼 마누엘도 파리스를 당대 스위스 신사로 그려놓았다. 그러나 세 여신의 복장 및 누드 표현에 있어 크라나흐와 차이를 보인다.
파리스가 선택한 가장 아름다운 여신은?

루벤스 <파리스의 심판> 1639년경, 패널에 유채, 199x379cm, 프라도 미술관, 마드리드. 세 여신이 각각 누구인지는 그녀들과 함께 등장하는 사물이나 동물, 혹은 인물들을 보면 알 수 있다. 화면 중앙의 흰 베일을 두르고 있는 여신은 그녀 오른쪽 바닥에 내려놓은 투구와 방패로 보아 전쟁의 여신 아테나(미네르바)이다. 붉은 망토를 팔에 걸치고 화살통을 맨 천사 에로스(쿠피도/큐피드)를 대동하고 나타난 미의 여신 아프로디테(베누스/비너스), 마지막으로 뒷모습을 보이고 있는 여신은 화면 맨 오른쪽 어둡게 그려진 공작새로 짐작하건대 헤라(유노/주노)이다.
크라나흐처럼 플랑드르의 대가 루벤스(Pieter Pauwel Rubens) 역시 ‘파리스의 심판’을 여러 번 그렸다. 사건의 전개 순서에 따라 1639년 작품부터 살펴보면, 파리스 앞에서 여신들이 한창 미를 뽐내고 있는 중임을 알 수 있다. 헤르메스는 황금사과를 들어 보이며 여신들의 경쟁심을 자극한다. 나무기둥에 걸터앉아 목동의 지팡이에 기댄 파리스는 턱을 손에 괴고 여신들을 바라보고 있다. 그러나 여신들의 눈부신 나신 앞에 넋이 나간 듯한 그의 표정으로 보아 제대로 된 판결은 어려울 듯하다. 사실상 판정의 기준은 다른 곳에 있었다.

[왼쪽] 루벤스 <파리스의 심판> 1636년경. 캔버스에 유채, 145x194cm, 내셔널 갤러리, 런던
[오른쪽] 루벤스 <파리스의 심판> 1625년경. 캔버스에 유채, 139x174cm, 내셔널 갤러리, 런던
세 여신은 각각 파리스에게 자신을 승자로 뽑아주는 대가로 다음의 조건들을 내걸었다. 헤라는 부귀영화와 권세를, 아테나는 전쟁에서의 승리와 명예를, 아프로디테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을 약속했다. 파리스는 더 생각해볼 겨를도 없이 아프로디테를 뽑기로 했다. 1636년에 그려진 루벤스의 작품에는 미의 여신을 향해 황금사과를 건네려는 파리스와 손으로 자신을 가리키며 살포시 승리의 미소를 띠고 있는 아프로디테가 묘사되어 있다. 화면 왼편에 투구와 메두사 방패를 벗어 던진 아테나가 두 팔을 뒤로 젖힌 채 유혹의 자세를 취해보지만 소용없는 일이다. 공작새를 대동한 헤라는 체념한 듯 외투를 추스르고 있다. 에리스의 사과는 이제 본격적인 불화를 불러올 것이다. 그 사실을 예고하듯이 붉은 기운이 맴도는 하늘에서 머리카락을 흩날리며 복수의 여신 알레토가 왼손에는 저주의 뱀을, 오른손에는 방화의 횃불을 들고 먹구름과 함께 날아가고 있다.
루벤스는 수차례 그린 <파리스의 심판>에서 여신들의 모습을 통해 아름다운 여체를 다각도로 보여준다. 1625년 작품에 묘사된 내용은 승자로 확정된 아프로디테가 정면의 누드를 과시하며 황금사과를 받아 든 순간이다. 그녀의 머리 위로 푸토가 승리의 관을 씌워주고 있으며 왼편에 결과가 만족스럽지 않은 듯 두 눈을 부릅뜬 헤라와 오른편으로는 바닥에 방패와 무구를 벗어 둔 뒷모습의 아테나가 보인다. 화면 맨 오른쪽에 불편한 기색으로 앉아 있는 남녀는 파리스의 아내 오이노네와 그녀의 아버지인 강의 신 오이네우스이다. 파리스는 아프로디테의 약속에 따라 아름다운 헬레네를 차지하게 되지만 훗날 그녀의 구혼자, 혹은 남편 메넬라오스가 불러 모은 그리스 동맹군이 일으킨 트로이 전쟁에서 필록테테스가 쏜 독화살에 맞아 치명적인 부상을 입게 된다. 그러나 이렇듯 심판의 과정을 지켜본 오이노네가 파리스를 용서할 리 없다. 오이노네는 해독제를 주지 않고, 파리스는 결국 죽음을 맞는다. ▶와토 <파리스의 심판> 18세기경. 캔버스에 유채, 47x31cm, 루브르 박물관
이 매력적인 신화 주제는 이후로도 여러 대가들에 의해 그려졌다. 18세기 프랑스의 화가 와토를 통해서도 재현되었고 여인의 아름다움을 그리는 데 일가견이 있는 르누아르의 솜씨로도 남겨졌다. 와토의 경우 대부분 세 여신의 누드를 등장시키는 기존 작품들과는 달리 파리스와 헤르메스의 누드와 함께 미의 여신 아프로디테의 뒷모습 누드만을 그려놓았다.
판정이 끝난 후, 아프로디테는 사과를 건네는 파리스 앞에서 에로스의 도움을 받아 옷을 입고 있다. 메두사 방패를 앞세워 물러나고 있는 아테나와 화면 오른쪽 위편에 조개 수레를 타고 돌아가고 있는 헤라 여신도 보인다. 와토는 루벤스가 여신들의 뒷모습 누드로 과감히 전환했듯이, 이 주제에 대한 일반적인 구성을 탈피하여 그만의 개성이 엿보이는 획기적인 기획을 보여주었다.

르누아르 <파리스의 심판> 1908~1910년경. 캔버스에 유채, 20×61cm, 필립스 컬렉션, 워싱턴 D.C.
세 여신의 누드가 등장한다는 점 때문에 중세 시대 미술에서는 거의 다뤄지지 않았던 ‘파리스의 심판’이 15세기 이후에는 양상이 달라져 미술가들이 선호하는 신화 주제가 되었다. 미술가들은 신화의 개요만 이용하기도 하고 고대 로마 시대에 정리된 사료들을 참고하여 이를 자신들이 사는 당대의 현실에 입각해 재해석하기도 했다. 많은 신화 주제들이 그러하듯이 ‘파리스의 심판‘ 역시 르네상스, 바로크 시기에는 도덕적인 교훈을 전달하는 역할로 이용되기도 했으나 근대 시기로 이행하면서 이러한 기능은 사라지게 되었다.
글 이민수(미술 칼럼니스트) 홍익대학교 미술사학과 졸업, 박사과정에 재학 중이다. 인간, 사회 그리고 미술의 상호 관계와 이 세 가지가 조우하는 특정 순간을 탐구하는 데에서 미술사학의 무한한 매력을 느낀다. 현재 문화센터와 대학에서 미술사를 강의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