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트 살롱

비토리오 레자니니 - 이야기를 찾아보는 그림

라라와복래 2012. 10. 18. 09:23
 

비토리오 레자니니

이야기를 찾아보는 그림

_레스까페(Rescape) 선동기

http://blog.naver.com/dkseon00/140163794168

네이버 블로그 <레스까페>의 쥔장이신 선동기님은 블로그에 올린 글-그림을 모아 아트북스에서 <처음 만나는 그림>(2009)과 <나를 위한 하루 그림>(2012)을 펴내 베스트셀러에 올려놓았습니다.

 

계속되는 장마로 날마다 하늘은 ‘마구 칠한’ 회색 물감 덩어리들의 집합소가 되었습니다. 눅눅함이 지루하기도 하지만 햇빛 아래 눈부시게 빛나던 사물들의 모습이 이제 조금씩 그리워지기 시작했습니다. 화사한 여인들과 표정 밝은 서민들의 모습을 담은 그림을 통해서라도 이제 머지않아 끝날 장마 이후를 떠 올려 봅니다. 이탈리아의 비토리오 레자니니(Vittorio Reggianini, 1858-1938) 작품들입니다. *이 글-그림은 선동기님이 지난 7월 장마가 한창일 무렵 올린 포스트입니다.

 

리허설 The Rehearsal, 43.1.x59.8cm

아니야, 그 대목에서는 좀 더 심각한 표정을 지어야 해. 내 표정과 손짓을 잘 봐. 누나는 동생을 향해 고뇌에 찬 표정과 무언가를 움켜쥘 것 같은 손짓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누나의 무릎에 놓인 책 속의 어느 한 장면을 보여주는 것 같은데, 아마 연극 무대에라도 올라가는 모양입니다. 누나의 역동적인 표정과는 달리 동생의 표정은 해맑습니다. 아직 진정한 고뇌라던가 갈등, 이런 단어들과는 만나본 적이 없겠지요. 문득 리허설이라는 제목 앞에서 서성거리게 됩니다. 리허설을 거치고 나면 본 무대에서는 확실히 실수를 줄일 수 있지요. 살아가는 데는 리허설이 없으니까 실제 무대에서는 실수를 하게 되고 연극은 계속됩니다. 공연 내내 반복되는 실수를 줄여야겠다는 수없는 각오는, 시간이 지나면서 늘 공허했습니다. 훗날 무대에서 내려올 때 관객들에게 무슨 말을 듣게 될까요? 환불해달라, 이것도 연극이라고 보라는 거냐... 리허설은 정말 안 되는 걸까요?

레자니니는 이탈리아 북부 모데나에서 태어났습니다. 루치아노 파바로티도 이곳 출신이라는 말이 기억납니다. 레자니니에 대한 개인 자료는 아주 빈약합니다. 모데나 미술 아카데미에서 그림 공부를 시작했고 훗날 자신이 졸업한 이 학교의 교수가 되었습니다. 모교의 선생님이 된 화가들이 많은데, 다시 한 번 기회가 주어진다면 꼭 해보고 싶은 것 중 하나가 모교의 선생님 되는 것입니다.

어린 미녀 A Young Beauty, 57x 71.8cm

사람이 꽃보다 아름답다는 것은 이제 누구나 다 아는 이야기가 되었지만 소녀의 뒤에 있는 꽃들이 소녀의 자태에 모두 빛을 잃고 말았습니다. 살짝 치켜뜬 눈과 눈빛, 입술로 가져간 손가락, 손가락 끝에 걸린 미소와 분홍빛 실크드레스가 소녀의 미모를 극한까지 끌어올렸습니다. 더구나 나이에 비해 전체적으로 농염함도 보입니다. 웬만한 강심장을 가졌다고 해도 이런 미인이 부탁을 한다면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도 거절하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이 글을 아내가 슬쩍 읽어보더니 낮은 목소리로 물어 왔습니다. 나 젊었을 때와 이 그림 속 소녀 중 누가 더 예뻐? ‘불편한 진실’을 말하기보다는 이럴 때는 피해가는 것이 상책입니다. 글 다 쓰고 나서 말해줄게, 흐름이 끊기면 곤란하지. 아내는 분명히 질문했다는 사실을 잊어버릴 것입니다.

화가가 된 레자니니의 작품 주제는 우아한 부르주아들의 삶, 특히 젊은 여인들의 모습이었습니다. 그런데 만약 그의 주제가 그것이 전부였다면 아마 제 시선을 끌지 않았을 것입니다. 레자니니는 힘든 삶을 살아가는 농부들의 집안 풍경도 중요한 주제로 삼았습니다. 아주 폭넓은 시야를 가졌던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러나 두 개의 서로 다른 세계를 그림에 담았지만 내용은 모두 유쾌한 것들이었습니다.

엿듣기 Eavesdropping, 95.2x60.3cm

커튼을 살짝 열고 방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습니다. 얼굴 가득히 떠오른 미소와 허리춤에 가 있는 손을 보면 마음속에서 기쁨이 마구 터져 나오는 것 같습니다. 문 너머의 상황이 대강 짐작이 됩니다. 여인이 사랑하는 남자가 결혼 승낙을 얻기 위해 집을 찾아왔고 집안어른들과의 면담이 잘 되어가고 있는 모양입니다. 결혼이 두 사람의 결합이라기 보다는 집안의 결합이었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굳이 두 개를 분리할 필요가 있을까요? 두 사람의 만남은 결국 집안의 만남으로 이어지는 것인데, 늘 시대는 어느 한쪽에 더 많은 무게를 두었습니다. 커가는 아이들을 보면서 나는 어느 쪽에 더 무게를 두고 있는 것일까... 고민해야겠습니다. 레자니니의 실크 재질의 천에 나타나는 주름 묘사는 봐도 봐도 참 대단합니다.

유혹 Seduction, 76.2x101.6cm

남자가 여인에게 말을 건네기 위해 몸을 기울이자 여인의 몸은 팔걸이 쪽으로 더 기울어졌습니다. 부채를 든 손의 모습이나 남자의 시선을 피해 천정으로 향하고 있는 눈빛, 그리고 남자를 향해 뻗어 있는 손동작까지 여인의 모습은 유혹 덩어리입니다. 그런데 제 느낌입니다만 아무래도 순박한 남자가 당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두 사람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는 또 다른 여인은 보석함을 열었습니다. 아마 남자가 그동안 선물로 준 것이겠지요. 그녀의 눈은 ‘조금 더 하면 더 많이 나올 것 같아. 계속해.’ 마치 그렇게 말하는 듯합니다. 바닥에 떨어진 꽃 한 송이, 철없는 남자의 미래가 아니었으면 좋겠습니다.

레자니니의 낭만적인 작품들은 늘 이야기를 던져주고 있습니다. 풍속화들의 특징 중 하나이지요. 그러나 이야기의 결말을 보여주지는 않습니다. 그림을 보는 관객들이 구체적인 것을 상상하게 만들었습니다. 저도 그의 작품들을 이렇게, 저렇게 봤는데 그때마다 전혀 새로운 이야기가 만들어지더군요. 화가가 되지 않았으면 레자니니는 어쩌면 소설가가 되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갓난아기 보기 Admiring the Newborn, 67.5x91cm

갓난아기를 보러 잠깐 들렀습니다. 아직 강보에 쌓인 아이를 향해 손을 내밀자 갓난아기도 손을 내밀었습니다. 이제 세상에 갓 태어난 아이의 눈에는 모든 것이 신기하겠지요. 아이를 중심으로 모인 여인들의 얼굴이 모두 행복해 보입니다. 그것은 새로운 식구가 생겨났다는 기쁨도 있지만 아이의 미래가 잘되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도 함께 하기 때문이지요. 어떤 조건도 없이 누군가의 앞날을 축복하는 것, 시간 날 때마다 해야 할 일 중의 하나입니다. 누군가가 빌어준 축복 때문에 태어나서 지금의 이 모습으로 여기까지 왔으니까 말입니다.

러브 레터 The Love Letter

남자가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준비했던 편지를 슬쩍 밀어 넣었습니다. 얼굴을 마주 보고 편지를 건네주고 싶지만 혹시라도 거절을 당하면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이 되니까 차선책으로는 그만인 방법이지요. 섬세한 몸짓과 여인의 표정에서 긴장감과 동시에 좋은 결과를 기다리는 애틋함도 보입니다. 편지를 보고 깜짝 놀랄 남자의 모습도 상상이 됩니다. 좋은 결과가 있을 것 같습니다. 기다려 보시지요.

19세기 후반 피렌체는 유럽과 미국의 돈 많은 그림 수집상들이 머무는 인기 있는 곳이었습니다. 많은 화가들이 피렌체에 모여서 앞선 세기의 풍속화를 그렸고 이 작품들은 사람들의 인기를 끌었기 때문이지요. 레자니니도 피렌체로 거처를 옮겼고 그곳에서 활동 중인 화가들과 친교를 맺게 됩니다.

편지 The Letter, 50.2x40cm

기다리던 답장이 왔습니다. 편지의 첫 줄을 읽는 순간부터 떠 오른 입가의 웃음은 편지를 읽어 내려 갈수록 점점 짙어졌습니다. 단어 하나, 줄 바꿈 하나에 담긴, 편지를 보낸 사람의 속마음은 두 번째 읽을 때 살펴도 늦지 않습니다. 편지를 한창 쓸 때는 편지 내용의 반은 시나 소설이었던 것 같습니다. 해야 할 이야기를 이리저리 돌리다보면 소설이 되었고 시가 되었죠. 생각해보면 그때의 유치함이 오늘에 와서는 소중한 재산이 되었습니다. 두 여인 중에서 받은 편지의 주인공은 누구일까요? 아무래도 마음의 여유가 더 있어 보이는 왼쪽 여인으로 보이는데, 어떠신지요?

이끌림 The Attraction, 70.4x49.8cm

창밖으로 누군가 지나가는 소리가 들리자 고개를 돌렸는데 좋아하는 남자였습니다. 급한 대로 의자에 놓여 있던 꽃송이들 중에 한 송이를 집어 들었습니다. 그 바람에 몇 송이는 바닥에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여기 좀 봐요. 목소리를 내고 싶지만 그것은 머릿속 생각이고 몸은 꽃 한 송이를 그 남자에게 말없이 던지는 것뿐입니다. 날아 온 꽃이 발 앞에 떨어지고 꽃을 주어 든 남자는 사방을 두리번거리다가 열린 창으로 자신을 빼꼼히 바라보는 여인을 발견하겠지요. 여인이 던진 것은 꽃이 아니라 마음이었습니다.

레자니니가 피렌체에서 친하게 지낸 화가로는 페데리코 안드레오티가 있습니다. 두 사람은 비슷한 주제와 비슷한 소도구들 그림에 담았습니다. 심지어는 모델도 같이 썼다고 하는데,그래서였을까요? 레자니니의 그림 속 여인들이 어디서 본 듯하다 싶었습니다.

선발된 선수 The Draft Player, 43.1x59.8cm

제목을 선수 선발로 할까 하다가 선발된 선수로 정했습니다. 누나 앞에서 판세를 설명하고 최종 결과를 헤아리는 소년의 모습 때문이었습니다. 체스 판이 보이고 탁자 위에는 바둑돌 같은 것이 쌓여 있습니다. 혹시 우리의 ‘알까기’ 같은 것일까요? 동생의 심각한 모습이 누나는 귀여운 모양입니다. 빙그레 웃는 얼굴에는 여유가 넘치고 있습니다. 승부에는 별 관심이 없는, 혹시 자신이 이겼더라도 동생이 이겼다고 해줄 준비가 되어 누나의 모습이죠. 가난하지만 훗날까지 서로 의지하면 살아갈 두 사람의 모습에서 세상 모든 누나들의 동생에 대한 마음을 떠올려 봅니다.

가족을 노래함 Serenading the Family, 83x72cm

참 가난한 살림입니다. 변변한 식탁도 없어 의자로 대신했습니다. 밥을 먹는 동생을 위해 누나가 기타를 잡았습니다. 한껏 목청을 키우다보니 노래를 부르는 누나의 표정이 이상해졌지만 그것을 바라보는 동생이나 엄마는 즐겁습니다. 이런 그림을 만나면 저도 덩달아 기분이 좋아집니다. 어떻게든 먹고살 수만 있다면 그 외의 것은 사람들이 만들기 나름이거든요. 얼마 전 끝난 ‘추적자’라는 연속극의 회장 집 식탁이 떠오릅니다. 그 근사한 식탁에서 오가는 이야기는 음모와 불의에 관한 것들뿐이었습니다. 극단적인 상상의 결과물이기는 하지만 벽이 검게 그을린, 닭과 개가 함께 있는 이 풍경이 적어도 사람 사는 냄새가 훨씬 진합니다. 물론 우리 주변에는 이런 분위기 속에서 사는 사람들이 더 많습니다. 그래서 세상은 잠시 삐걱거려도 제대로 굴러가는 모양입니다.

1907년과 1908년 그리고 1910년에 피렌체 미술가협회 주관으로 레자니니의 작품 전시회가 열립니다. 실제와 환상, 감각과 관능을 결합한 작품을 발표한 레자니니는 살아서도 그리고 세상을 떠난 후에도 성공한 화가로 남았습니다. 모더니즘이 유럽을 휩쓸었지만 그의 작품은 사람들에게 여전히 잊혀가는 낭만의 세계로 들어가는 문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