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대가 없다면
―미겔 에르난데스
그대의 눈이 없다면 내 눈은
외로운 두 개의 개미집일 따름입니다.
그대의 손이 없다면 내 손은
고약한 가시다발일 뿐입니다.
달콤한 종소리로 나를 가득 채우는
그대의 붉은 입술이 없다면
내 입술도 없습니다.
그대가 없다면 내 마음은
엉겅퀴 우거지고 회향 잎마저 시들어가는 고난의 길입니다.
그대 음성이 들리지 않으면 내 귀는 어찌 될까요?
그대라는 별이 없다면 나는 어디를 향해 떠돌까요?
그대의 대꾸 없어 내 목소리는 자꾸 약해집니다.
바람결에 묻어오는 그대 냄새 좇아
희미한 그대 흔적을 더듬어봅니다.
사랑은 그대에게서 시작돼
나에게서 끝납니다.
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사랑으로 마주보는 눈을 잃은 내 눈은 뜨고 있어도 뜬 게 아니다. 개미떼가 우글거리는 듯 따끔거리고 어지럽다. 그대의 보드라운 손을 잡을 수 없으니 내 손을 마구 휘두르고만 싶구나. 사랑하는 이여, 왜 내 곁을 떠났나요? 내 가슴에는 아직 사랑의 불이 타오르고 있는데! 대상을 잃은 잉걸불이 그 가슴을 애태워 이렇듯 뜨거운 실연 시가 태어났다.
‘사랑하는 사람만이 날 수 있다. 그렇지만, 누가 그토록 사랑하는가?’로 시작되는 시 ‘비행(飛行)’의 시인이기도 한 미겔 에르난데스(1910-1942)는 스페인 내전이 끝난 뒤 정치범으로 투옥돼, 새파랗게 젊은 나이에 감옥에서 죽었다. 슬픈 정열의 시들을 품고. [동아일보 2012.10.29]
동아일보에 지난 9월 중순부터 매주 월, 수, 금요일에 연재하고 있는 ‘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를 소개합니다. 황인숙 시인(54)은 1984년 등단했으며, 감각적인 문체로 시와 소설, 수필을 넘나드는 전방위 여류 작가입니다. ‘행복한 시 읽기’라는 제목은 문학평론가 김현의 ‘행복한 책읽기’에서 따왔다고 하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