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 산책

시인 백석(白石) 이야기

라라와복래 2012. 10. 19. 06:29

시인 백석(白石) 이야기

시인 백석(白石)의 이야기를 몇 편의 시를 소개하면서 시작합니다. 시에 대한 제 감상은 따로 적지 않습니다. 백석의 시어와 배경 스스로 읽는 이의 가슴 속에서 저마다 공명을 불러일으킬 터이니까요. 백석에 대해서는 자야(子夜)와의 애절한 사랑 이야기를 중심으로 이야기하렵니다. 자야 김영한은 삼청각ㆍ청운각과 더불어 우리나라 3대 요정의 하나로 한 시절 뭇 정객들이 요정정치를 하였던 성북동 대원각의 주인이었습니다. 법정(法頂) 스님에게 1997년 당시 시가 1천여억 원이었던 그곳을 시주하여 지금은 길상사(吉祥寺)가 되었지요. 자, 그럼 시 감상부터 할까요.

여우난곬족

명절날 나는 엄매아배 따라 우리집 개는 나를 따라 진할머니 진할아버지 있는 큰집으로 가면 얼굴에 별자국이 솜솜 난 말수와 같이 눈도 껌벅거리는 하로에 베 한 필을 짠다는 벌 하나 건너 집엔 복숭아나무가 많은 新里 고무 고무의 딸 李女 작은李女 열여섯에 사십이 넘은 홀아비의 후처가 된 포족족하니 성이 잘나는 살빛이 매감탕 같은 입술과 젖꼭지는 더 까만 예수쟁이 마을 가까이 사는 土山 고무 고무의 딸 承女 아들 承동이 六十里라고 해서 파랗게 뵈이는 山을 넘어 있다는 해변에서 과부가 된 코끝이 빨간 언제나 흰옷이 정하든 말끝에 설게 눈물을 짤 때가 많은 큰골 고무 고무의 딸 洪女 아들 洪동이 작은 洪동이

배나무접을 잘하는 주정을 하면 토방돌을 뽑는 오리치를 잘 놓는 먼섬에 반디젓 담그려 가기를 좋아하는 삼춘 삼춘엄매 사춘누이 사춘동생들이 그득히들 할머니 할아버지가 있는 안간에들 모여서 방안에서는 새옷의 내음새가 나고 또 인절미 송구떡 콩가루차떡의 내음새도 나고 끼때의 두부와 콩나물과 뽂운 잔디와 고사리와 도야지비계는 모두 선득선득하니 찬 것들이다

저녁술을 놓은 아이들은 외양간섶 밭마당에 달린 배나무동산에서 쥐잡이를 하고 숨굴막질을 하고 꼬리잡이를 하고 가마 타고 시집가는 놀음 말 타고 장가가는 놀음을 하고 이렇게 밤이 어둡도록 북적하니 논다

밤이 깊어가는 집안엔 엄매는 엄매들끼리 아르간에서들 웃고 이야기하고 아이들은 아이들끼리 웃간 한 방을 잡고 조아질하고 쌈방이 굴리고 바리깨돌림하고 호박떼기하고 제비손이구손이하고 이렇게 화디의 사기방등에 심지를 멫번이나 돋구고 홍게닭이 멫번이나 울어서 졸음이 오면 아릇목싸움 자리싸움을 하며 히드득거리다 잠이 든다. 그래서는 문창에 텅납새의 그림자가 치는 아츰 시누이 동세들이 욱적하니 흥성거리는 부엌으론 샛문틈으로 장지문틈으로 무이징게국을 끓이는 맛있는 내음새가 올라오도록 잔다

여우난곬족 : 여우가 난 골 부근에 사는 일가 친척들

진할머니 진할아버지 : 아버지의 외할머니와 외할아버지

매감탕 : 엿을 고아낸 솥을 가셔낸 물. 혹은 메주를 쑤어낸 솥에 남아 있는 진한 갈색의 물

토방돌 : 집채의 낙수 고랑 안쪽으로 돌려가며 놓은 돌. 섬돌

오리치 : 야생오리를 잡으려고 키를 끈 달린 막대기로 받쳐 물가에 세워 놓은 것

반디젓 : 밴댕이젓

숨굴막질 : 숨바꼭질

화디 : 등경(燈檠). 등경걸이.나무나 놋쇠 같은 것으로 촛대 비슷하게 만든 등잔을 얹어놓는 기구

홍게닭 : 새벽닭

텅납새 : 턴낪새. 처마의 안쪽 지붕이 도리에 얹힌 부분. 부고장 같은 것이 오면 방안에 들이기를 꺼려 이곳에 끼워놓는 풍속이 있었음

무이징게국 : 징거미(민물새우)에 무를 숭덩숭덩 썰러 넣고 끓인 국

백석과 자야의 운명적인 만남과 사랑과 헤어짐

우리나라 현역 시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시인으로 평가된 바 있는 백석(본명 백기행白夔行)은 1912년 평북 정주에서 태어났으며 같은 정주 출신 시인 김소월과 오산학교 선후배 사이로 10살 위 소월을 무척 따르고 선망하였습니다. 오산학교 졸업 후 일본 아오야마 학원(靑山學院)에서 영문학을 전공하고 귀국하여 1934년 조선일보에 입사해 잡지 <녀성> <조광>의 편집을 맡았습니다. 1935년 8월 조선일보에 ‘정주성(定州城)’을 발표하면서 작품 활동을 시작하였고, 1936년 서정시집 <사슴>을 출간하면서 문단의 혜성으로 떠올랐는데, 한정판 100부 출간 탓에 당시 문학 지망생들에게 이 시집을 필사하는 것이 대유행이었으며, 윤동주도 이 시집을 필사해서 간직했었다고 합니다. ▶“한국 시가 낳은 가장 아름다운 시”(평론가 김현), “한국 사람만이 미득(味得)할 수 있는 최상의 시”(평론가 유종호). “난 나의 ‘시 스승’으로 먼저 백석 시인을 댄다”(시인 신경림) 등의 찬사가 잇는 백석은 한국 현대시사의 전설입니다.

조선일보를 퇴사하고 함흥 영생여고보에서 영어교사로 재직하던 백석은 1939년 홀연히 만주로 떠납니다. 호구를 위해 소작일 등 닥치는 대로 일을 하다 일제의 패망과 더불어 귀국 길에 올라 잠시 신의주에서 거주하고는 고향 정주로 돌아옵니다. 분단 이후 월북작가로 분류되어 백석의 문학적 성과와 활동은 한국문학에서 매몰되고 세인에게는 한동안 완전히 잊힌 작가가 되고 맙니다. 그러다가 1988년 해금이 되자 백석 붐이 일어 ‘우리 문학의 북극성’이라는 찬사를 받습니다. 극악무도했던 유신시절 대학 때 시집 <사슴>을 어렵게 복사하여 무슨 불온문서인 양 몰래 돌려 가며 읽던 기억이 새롭습니다. 지금은 고등학교 교과서에도 실리고 수능시험에도 자주 출제될 정도니, 금석지감(今昔之感)!

백석과 자야 김영한과의 운명적인 만남은 조선일보 퇴직 후 함흥 영생여고보 영어교사로 재직하던 중에 이루어집니다.

“나는 시인 백석과 1936년 가을 함흥에서 만났다. 그의 나이 스물여섯, 내가 스물둘이었다. 어느 우연한 자리였었는데, 그는 첫 대면인 나를 대뜸 자기 옆에 와서 앉으라고 했다. 그리곤 자기의 술잔을 꼭 나에게 건네었다. 속으로 나는 잔뜩 겁에 질려 있었지만, 그의 행동거지에는 조금의 흐트러짐도 없었다. 자리가 파하고 헤어질 무렵, 그는 "오늘부터 당신은 이제 내 마누라요" 하고 단정적으로 말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나의 의식은 거의 아득해지며 바닥 모를 심연 속으로 빠져 들어가는 듯했다. 그것이 내 가슴 속에서 아직도 지워지지 않고 있는 애틋한 슬픔의 시작이었다.” ― 자야 여사의 회고  ▶100부 한정판으로 찍은 백석 시집 <사슴>(국립중앙도서관 소장). 1936년 1월 20일 선광인쇄주식회사에서 낸 시집 표지에 ‘조선총독부 도서관장 서지인’이 뚜렷합니다. <사슴>은 2005년 계간 시인세계의 설문조사에서 한국 현대시 100년사 최고의 시집으로 꼽혔습니다.

백석이 ‘자야(子夜)’라 부른 김영한(金英韓)은 관철동 반가(班家)에서 태어났으나 가세가 몰락하자 조선 권번에 들어가 ‘진향(眞香)’이라는 기명을 받고 기생이 됩니다. 그러나 평범한 기생은 아니었습니다. 정악계의 대부인 금하 하일규 선생에게 궁중무와 여창가곡을 배우고, 파인 김동환의 추천으로 잡지 <삼천리>에 수필을 발표해 ‘문학기생’이라는 별칭도 듣습니다. 훗날 자야는 여창가곡을 복원하는 데 힘쓰면서 김진향이라는 기생 때 이름으로 <선가 하규일 선생 약전>(도서출판 예음, 1993)을 펴내기도 합니다. 이렇듯 국악계에서는 김진향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져 있죠.

자야의 총명함은 조선어학회 회원이던 해관 신윤국 선생의 눈에 띄어 그의 주선으로 1935년 일본 유학을 떠납니다. 이듬해 해관이 함흥교도소에 투옥되자 유학을 포기하고 귀국 함흥으로 가지만 면회가 이루어지지 않자 실력자와 접촉하기 위해 다시 권번에 들어가 기생 옷을 입습니다. 그 때 마침 영생고보에 부임해 온 백석과 어느 연회자리에서 만나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댄디보이 백석’과 ‘문학기생 진향’은 운명을 직감합니다.

백석은 퇴근하면 으레 진향의 하숙집으로 가 밤을 지샙니다. 어느 날 백석은 진향이 사 온 <당시선집>을 뒤적이다가 이백(李白)의 시 ‘자야오가(子夜吳歌)’를 발견하고는 그에게 ‘자야’라는 아호를 지어줍니다. ‘자야오가’는 장안(長安)에서 서역(西域)으로 수자리하러 간 낭군을 기다리는 여인 자야의 애절한 심정을 노래한 곡이죠. 하늘이 맺어준 여인에게 ‘자야’라는 이름을 지어준 것은 백석 자신이 두 사람의 운명을 알고 있었던 것이나 아닌지... 1937년 함흥 영생고보 교사 시절의 백석

“나의 이 깊은 외로움도 그때 백석이 이 ‘자야’란 호를 나에게 붙여주었을 때부터 이미 결정되고 마련된 운명이었던 것일까. 아니면 그는 아직도 그의 원정(遠征)이 끝나지 않아서 돌아오지 못하고 있는 것일까.” ― 자야 여사의 회고

함흥에서의 운명적 만남, 그리고 사랑, 이별과 해후의 반복, 사랑을 위한 현실 도피. 자야는 함흥에서 서울로 먼저 올라옵니다. 백석이 당시로는 최고의 직장인 고보 영어교사 자리를 그만두게 된 것도 자야 때문입니다. 백석은 조선축구학생연맹전 대표선수 인솔교사로 서울에 와서는 학생들은 여관에 투숙시켜 놓고 자신은 청진동 자야의 집에서 사랑을 불태웁니다. 인솔교사를 잃어버린 학생들은 모처럼 상경한 기분에 들떠 떼를 지어 유흥장으로 몰려다니다 학생 지도 합동 단속 교사에게 적발됩니다. 이 사실이 밝혀져 학교는 발칵 뒤집혔고 백석은 미련 없이 사표를 던지고 서울로 올라와 청진동에서 자야와 살림을 차립니다. 비슷한 시기에 이상(李箱)도 황해도 배천(白川)에서 만난 기생 금홍이와 함께 서울로 올라와 종로 우미관 뒤편에 살림을 차리고, 현재의 교보문고 뒤편 피맛길에서 훗날 ‘오감도’가 탄생하게 되는 제비 다방을 엽니다.

백석과 나는 앞서 말한 나의 청진동 집에서 살림을 차렸다. 함흥 시절은 그가 교사의 신분으로 남의 이목도 있고 했기에, 그가 나의 하숙으로 와서 함께 지내다 돌아가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러나 이젠 아무데도 구애받지 않아서 좋았다. 마당 한 뼘 없는 작은 한옥이었지만 안방, 건넌방, 그리고 쪽마루에 딸린 작은 찬방(饌房)이 하나 있어서, 우리들에겐 그지없이 단란한 보금자리였다. 그의 시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에 나오는 ‘아내와 같이 살던 집’은 바로 이 청진동 집을 말한 것이다. 몇 해 전에 나는 친구와 이 집을 일부러 찾아가 보았는데, 뜻밖에도 그곳은 꼬리곰탕을 전문으로 한다는 식당으로 바뀌어져 있었다. 나는 식당 안방에 들어가 음식을 시켜놓고 옛 청진동 시절의 추억에 젖었던 적이 있다. ― 자야 여사의 회고 ◀조선 권번 기생 시절의 자야 김진향

두 사람의 사랑은 뜨거웠지만 시대 환경은 어렵고 차가웠습니다. 고향의 부모는 기생과 동거하는 아들을 못마땅하게 생각해 백석을 자야에게서 떼어놓을 심사로 결혼을 시키기로 합니다. 백석은 고향으로 내려가 부모가 정한 여자와 혼인을 올리지만 족두리를 풀어 내린 지 며칠 되지도 않은 새색시를 내버려두고 도망쳐 나와 자야의 품으로 돌아옵니다. 이런 식으로 강제 결혼을 하고 다시 도망치기를 두 차례. 자식으로서 부모에 대한 효심과 사랑하는 이와 함께 하고 싶은 열망 사이에서 괴로워하던 백석은 자야에게 만주 도피행을 설득하지만 자야는 거절합니다. 시 ‘나와 나타샤와 흰당나귀’는 이때의 백석의 심경을 을은 작품입니다.

나와 나타샤와 흰당나귀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오늘밤은 푹푹 눈이 나린다

나타샤를 사랑은 하고

눈은 푹푹 날리고

나는 혼자 쓸쓸히 앉어 燒酒를 마신다

燒酒를 마시며 생각한다

나타샤와 나는

눈이 푹푹 쌓이는 밤 흰당나귀 타고

산골로 가쟈 출출이 우는 깊은 산골로 가 마가리에 살자

눈은 푹푹 나리고

나는 나타샤를 생각하고

나타샤가 아니 올 리 없다

언제 벌써 내 속에 고조곤히 와 이야기한다

산골로 가는 것은 세상한테 지는 것이 아니다

세상 같은 건 더러워 버리는 것이다

눈은 푹푹 나리고

아름다운 나타샤는 나를 사랑하고

어데서 흰당나귀도 오늘밤이 좋아서 응앙응앙 울을 것이다.

출출이 : 뱁새

마가리 : 오막살이

1939년 백석은 홀연히 만주 신경으로 떠납니다. 자야에게 단 한마디의 그 어떤 기별도 남겨두지 않은 채… 그리고 그 길이 자야와의 영원한 이별이 되고 맙니다. 만주에서 백석은 여러 일에 종사하다가 해방 직전에는 이곳저곳을 전전하며 소작 일을 하는 등 몹시도 고달픈 생활을 합니다. 일제가 패망하자 귀국 신의주 변두리의 한 하숙방에서 잠시 묵게 되는데 이때에 시 한 수를 써서 서울의 친지에게 부칩니다. 이것이 남한에서 발표한 그의 마지막 시이자 오늘날 많은 시인들이 애송하는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南新義州 柳洞 朴時逢方)’이라는 유명한 시입니다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南新義州 柳洞 朴時逢方)

어느 사이에 나는 아내도 없고, 또,

아내와 같이 살던 집도 없어지고,

그리고 살뜰한 부모며 동생들과도 멀리 떨어져서,

그 어느 바람 세인 쓸쓸한 거리 끝에 헤메이었다.

바로 날도 저물어서,

바람은 더욱 세게 불고, 추위는 점점 더해오는데,

나는 어느 木手네 집 헌 삿을 깐,

한 방에 들어서 쥔을 붙이었다

이리하여 나는 이 습내 나는 춥고, 누긋한 방에서,

낮이나 밤이나 나는 나 혼자도 너무 많은 것 같이 생각하며,

딜옹배기에 북덕불이라도 담겨 오면,

이것을 안고 손을 쬐며 재위에 뜻없이 글자를 쓰기도 하며,

또 문밖에 나가디두 않고 자리에 누어서,

머리에 손깍지벼개를 하고 굴기도 하면서,

나는 내 슬픔이며 어리석음이며를 소처럼 연하여 쌔김질 하는 것이었다.

내 가슴이 꽉 메어올 적이며,

내 눈에 뜨거운 것이 핑 괴일 적이며,

또 내 스스로 화끈 낯이 붉도록 부끄러울 적이며,

나는 내 슬픔과 어리석음에 눌리어 죽을 수밖에 없는 것을 느끼는 것이었다

그러나 잠시 뒤에 나는 고개를 들어,

허연 문창을 바라보든가 또 눈을 떠서 높은 턴정을 쳐다보는 것인데,

이 때 나는 내 뜻이며 힘으로, 나를 이끌어 가는 것이 힘든 일인 것을 생각하고,

이것들보다 더 크고, 높은 것이 있어서, 나를 마음대로 굴려 가는 것을 생각하는 것인데,

이렇게 하여 여러 날이 지나는 동안에,

내 어지러운 마음에는 슬픔이며, 한탄이며, 가라앉을 것은 차츰 앙금이 되어 가라앉고,

외로운 생각만이 드는 때쯤 해서는,

더러 나줏손에 쌀랑쌀랑 싸락눈이 와서 문창을 치기도 하는 때도 있는데,

나는 이런 저녁에는 화로를 더욱 다가 끼며, 무릎을 꿇어보며,

어니 먼 산 뒷옆에 바우섶에 따로 외로이 서서,

어두어 오는데 하이야니 눈을 맞을, 그 마른 잎새에는,

쌀랑쌀랑 소리도 나며 눈을 맞을,

그 드물다는 굳고 정한 갈매나무라는 나무를 생각하는 것이었다.

자야 여사의 회고.

“만약에 내가 그때 만주로 함께 갔더라면 어찌 되었을까. 아마도 진작 그곳 생활이 지겨워진 나의 성화에 못 이겨 우리는 다시 서울로 돌아와 함께 살았을 것이다. 그를 만주에서 온갖 고생을 하게하고, 생활고에 시달리게 한 것도 나였고, 국토가 둘로 쪼개어져 그를 다시는 북에서 서울로 돌아올 수 없게 만든 것도 모두 내가 미욱했던 탓이다.

(……)

이때가 해방 직전이었고, 이루 말할 수 없는 생활의 외로움과 고달픔은 그의 마지막 시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에 낱낱이 그렁그렁 박혀 있다. 깊은 밤에 그의 전집을 끌어안고 이 시를 혼자 목이 메어 읽어 가노라면 주체할 길 없이 솟구쳐 오는 뜨거운 눈물을 나는 참지 못한다.

(……)

그와 헤어지고 어느덧 50년 세월이 흘러갔다. 시간이란 게 도무지 실감이 나지 않는다. 내가 이날 이때까지 온갖 곡절을 겪으며 살아온 것도 헤아려보면 모두가 백석에 대한 연민 때문이었고, 또 그를 향한 반발심이 물 끓듯 끓어 넘친 탓이 아닌가 한다. 그때 그를 따라 만주로 가지 않았던 실책으로 내가 그를 비운(悲運)에 빠뜨렸고, 나 또한 서럽게 살아왔다. 어찌 모든 것을 이대로 마감해 버릴 수 있단 말인가.

(……)

나는 지금도 젊은 그 시절의 백석을 자주 꿈에서 본다. 그는 나의 방문을 열고 나가면서 아주 천연덕스럽게 "마누라! 나 나 잠깐 나갔다 오리다" 하고 말한다. 한참 뒤에 그는 다시 들어오면서 "여보! 나 다녀왔소!"라고 말한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는가. 세월을 반백년이나 흘러 보내었는데도……” - <내 사랑 백석>에서

백석은 월북한 적이 없었음에도 월북작가로 분류되어 그의 작품을 1987년까지 읽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니 해방 후 고향 정주로 돌아가 정착한 백석은 월북작가가 아닌 재북작가인 셈이지요.

백석의 연인 자야는 1987년까지 세상에 전혀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백석문학이 해금이 된 1987년 11월, 시인 이동순(李東洵. 영남대 교수)은 <백석 시선집>(창작과 비평사)을 펴냈는데 한 달 뒤 단정하고 기품 있는 음성의 할머니로부터 뜻밖의 전화를 받습니다. 이 할머니는 자신을 처녀 시절 백석과 뜨거운 사랑을 나눴던 사람이라고 소개합니다. 이동순은 곧장 서울로 올라와 자야 김영한 여사로부터 백석 시인과 관련된 한 많은 생애를 듣습니다. 자야 여사는 이동순에게 자신을 백석이 지어 준 이름 ‘자야’로 불러 달라고 부탁하고는 백석과 얽힌 지난날을 털어놓습니다. ▶젊었을 때의 자야 여사

이동순은 1차로 백석과 관련된 자야의 생애를 엮어서 <창작과 비평>에 ‘백석, 내 가슴 속에 지워지지 않는 이름’ 이라는 제목으로 글을 발표하여 세상에 백석의 여인, 자야 여사의 존재가 알려집니다. 이 글이 나온 뒤에 어느 날 자야 여사에게 이동순은 백석과 보낸 3년간의 이야기를 써 보라고 권합니다. 자야는 백석과의 사랑의 세월에 대한 원고를 집필하는 과정에서 너무 무리를 해 두 번씩이나 병원에 입원하기도 했으나 평생을 사모한 사랑이기에 심혈을 기울여 1995년에 <내 사랑 백석>(문학동네)을 출간합니다, 이 책의 출간으로 미스터리로 남아 있던 백석의 삶이 비로소 복원된 것이지요.

생전의 자야 여사는 백석의 생일인 7월 1일이 되면 하루 동안 일체의 음식을 입에 대지 않았다고 합니다. 사랑하는 연인 백석에 대한 그리움과 미안함을 그렇게라도 표현하고 싶었던 것이겠지요. 자야 여사에게는 백석의 시를 혼자 읽는 게 가장 큰 생의 기쁨이었다고 합니다.

“백석의 시는 자신에게 있어 쓸쓸한 적막(寂寞)을 시들지 않게 하는 맑고 신선한 생명의 원천수였다.”

자야 여사는 1997년 창작과 비평사에 2억 원을 기부해 ‘백석문학상’을 제정하고, 이어 성북동 깊숙한 산자락에 있는 옛 대원각 7000여 평의 대지와 건물 40여 동 등 1천억 원 대의 재산을 법정 스님에게 시주하여 그의 법명 길상화(吉祥華)를 딴 길상사를 세웁니다. 이 일이 세인의 입에 오르내리자 자야 여사는 “없는 것을 만들어서 드려야 하는데, 있는 것을 내놓는 것이니 의미가 없다”는 말만 남기고 자신을 감추었습니다.

2000년 4월 길상사 경내에 세운 서울대 최종태 교수의 작품 관세음보살상. 성모상을 닮은 관세음보살상이라 하여 유명한데, 그 앞에 서면 자야 여사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백석과 자야, 그들의 사랑이야기를...

임종 열흘 전 문병 간 한 기자가 었습니다.

“그 사람 어디가 그렇게 좋았어요?”

“천억이 그 사람 시 줄만 못해. 다시 태어나면 나도 시 쓸 거야.”

유언대로 자야 여사는 사후 화장되어 한겨울 눈이 하얗게 쌓인 길상사 마당에 뿌려졌습니다. 까치가 날아와 몹시 울었다고 합니다. 백석일까?

백석은 한동안 1963년경 사망한 것으로 알려졌으나 2001년 뜻밖에도 이북에서 결혼한 두 번째 부인으로부터 가족사진과 함께 소식이 날아 들어와 그가 1995년 11월경 사망했음이 확인되었습니다. 안타깝게도 자야는 이 소식을 생전에 못 듣고 말았군요... 백석은 해방 후 민족주의 지도자 고당 조만식 선생의 비서를 지내면서 솔료호프의 <고요한 돈 강>을 번역하고 김일성종합대학에서 국문학을 강의했으며, 6ㆍ25 전쟁 중에는 중국에 머물다 휴전 후 귀국하여 협동농장의 현지 파견작가로 활동했다고 합니다. ◀1980년대 만년의 백석. 두 번째 부인 리윤희씨, 둘째 아들 막내딸과 함께 찍은 가족사진. 자야 여사는 이 사진을 못 보고 타계했다..

정리 : 라라와복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