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 산책

귀에는 세상 것들이 - 이성복

라라와복래 2012. 12. 11. 06:40
 

 

귀에는 세상 것들이

―이성복

귀에는 세상 것들이 가득하여

구르는 홍방울새 소리 못 듣겠네

아하, 못 듣겠네 자지러지는 저

홍방울새 소리 나는 못 듣겠네

귀에는 흐리고 흐린 날 개가 짖고

그가 가면서 팔로 노를 저어도

내 그를 부르지 못하네 내 그를

붙잡지 못하네 아하, 자지러지는 저

홍방울새 소리 나는 더 못 듣겠네

출전 : <남해 금산>(문학과지성 시인선 52)

 

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시편 가득 영롱한 새 울음소리가 자지러지게 울리는 듯하다. 시인의 내면, 영혼에서 울려오는 그 소리는, 한편 그 소리를 도리질하는 시인의 내면, 영혼의 절망에 찬 탄식으로 더욱 자지러진다.

신기(神氣)가 오른 듯한 시집 <남해 금산>에서 옮겼다. 1986년 7월 5일 초판 발행. 자서(自序)에 따르면 ‘대체로 지난 6년 사이 씌어진’ 시들이라니 1980년부터다. 책날개에 소개됐듯이 ‘서정적 시편들로 서사적 구조를 이루고 있는’ 시집이다.

음풍농월(吟風弄月)이란 말이 있다. ‘맑은 바람과 밝은 달을 읊으며 즐긴다’는 어여쁜 뜻을 가졌다. 그런데 그 쓰임이 혹독하다. 세상이 어찌 돌아가든 개의치 않고 저 혼자 한가한 시를 읊는 시인들에게는.

탐미적 시인 이성복이 ‘홍방울새 소리’를 못 듣게 만든 ‘흐리고 흐린 날’의 시들, 그 서정에 가슴이 두근두근하고, 그 서사에 가슴이 저리다. 이를테면 ‘이곳에 입에 담지 못할 일이 있었어! 가담하지 않아도 창피한 일이 있었어! 그때부터 사람이 사람을 만나 개울음 소리를 질렀다.’(<남해 금산>에 실린 시 ‘그리고 다시 안개가 내렸다’에서) [동아일보 2012.12.10]

 

이성복 1952년 경북 상주에서 태어나 서울대 불문과와 같은 과 대학원을 졸업했다. 1977년 겨울, 시 ‘정든 유곽에서’를 계간 <문학과지성>에 발표하며 등단했다. 시집 <뒹구는 돌은 언제 잠 깨는가> <남해 금산> <그 여름의 끝> <호랑가시나무의 기억> <아, 입이 없는 것들> <달의 이마에는 물결무늬 자국> 등과 시선집 <정든 유곽에서>, 산문집 <나는 왜 비에 젖은 석류꽃잎에 아무 말도 못했는가> <네 고통은 나뭇잎 하나 푸르게 하지 못한다>, 사진에세이 <오름 오르다> <타오르는 물> 등을 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