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 산책

눈물을 자르는 눈꺼풀처럼 - 함민복 시집

라라와복래 2013. 3. 14. 11:31

 

 

눈물을 자르는 눈꺼풀처럼

함민복 시집

창비시선 357

2013.02.22

 

양철지붕이 소리 내어 읽는다

씨앗은 약속

씨앗 같은 약속 참 많았구나

그리운 사람

내리는 봄비

물끄러미 바라보던 개가

가죽 비틀어 빗방울을 턴다

봄비야

택시! 하고 너를 먼저 부른 씨앗 누구냐

꽃 피는 것 보면 알지

그리운 얼굴 먼저 떠오르지 _‘봄비’ 전문

 

[아래는 창비 홈페이지 시집 소개에서 가져온 글입니다.]

눈물을 자르는 눈꺼풀처럼

뜨겁고 깊고

단호하게

순간순간을 사랑하며

소중하다고 생각하는 것들을

바로 실천하며 살아야 하는데

현실은 딴전

딴전이 있어

세상이 윤활히 돌아가는 것 같기도 하고

초승달로 눈물을 끊어보기도 하지만

늘 딴전이어서

죽음이 뒤에서 나를 몰고 가는가

죽음이 앞에서 나를 잡아당기고 있는가

그래도 세계는

눈물을 자르는 눈꺼풀처럼

단호하고 깊고

뜨겁게

나를 낳아주고 있으니

봄비처럼 따스한 눈물, 모든 아픔과 희망을 위한 노래

선한 마음에서 우러나는 ‘선천성 그리움’의 힘으로 자본주의 사회에서 소외된 가난한 삶을 노래해온 함민복 시인의 신작 시집 <눈물을 자르는 눈꺼풀처럼>이 출간되었다. 2005년, 10년 만에 네 번째 시집 <말랑말랑한 힘>(문학세계사)을 펴낸 데 이어 다시 8년 만에 선보이는 다섯 번째 시집이다. 요즘 시단의 풍경으로 보자면 꽤나 느린 걸음이지만, “함민복의 상상력은 우리가 기꺼이 공유해야 할 사회적 자본이다”(이문재, 추천사)라는 평이 무색하지 않을 만큼 세월의 무게에 값하는 70편의 수작을 담았다.

부드러운 서정의 힘이 한결 돋보이는 이번 시집에서 시인은 가난한 삶 속에서도 희망의 불씨를 지피는 여유로움이 배어 있는 삶의 철학과, 타자와 더불어 살아가는 세상을 꿈꾸는 “경험에서 이끌어낸 실존론적 사유”(문혜원, 해설)의 세계관을 펼쳐 보인다. 손끝에서 놀아나는 섣부른 수사나 과장 없이 정갈한 언어에 실린 솔직하고 담백한 ‘삶의 목소리’로 일구어낸 시편들이 따듯한 공감을 불러일으키며 잔잔한 울림을 선사한다.

보름달 보면 맘 금세 둥그러지고/ 그믐달에 상담하면 움푹 비워진다// 달은/ 마음의 숫돌// 모난 맘/ 환하고 서럽게 다스려주는// 달// 그림자 내가 만난/ 서정성이 가장 짙은 거울 _‘달’ 전문

타자와 더불어 살아가는 평등한 삶을 지향하는 시인의 사유는 생활 속에서 자연스럽게 드러난다. 흥미롭게도 시인은 “감겨 제 몸을 재고 있”는 줄자(‘줄자’), “살아 움직일 때보다” 더 무거운 고장 난 시계(‘죽은 시계’), 녹이 슬어 버려진 저울(‘앉은뱅이저울’)처럼 본래의 기능을 상실한 사물에 주목하면서 그것들로부터 존재론적인 사유의 바탕을 얻는다. 여기서 시인은 “풍경을 지우며/ 풍경을 그”리고 “건물을 지워/ 건물이 없던 시절을 그려놓는” 안개와도 같은 시각으로 폐기된 사물에서 빛나는 사물성을 읽어내며 “보임의 세계에서 해방된”(‘안개’) 사물 고유의 본성을 감지한다.

나는 나를 보태기도 하고 덜기도 하며/ 당신을 읽어나갑니다// 나는 당신을 통해 나를 읽을 수 있기를 기다리며/ 당신 쪽으로 기울었다가 내 쪽으로 기울기도 합니다// 상대를 향한 집중, 끝에, 평형,/ 실제 던 짐은 없으나 서로 짐 덜어 가벼워지는 _‘양팔저울’ 부분

매일의 고달픈 일상을 힘겹게 이어나가는 현실은 세대나 계층을 불문하고 이 시대를 살아가는 수많은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느낄 법한 비애가 되어버린 지 이미 오래다. 시인 또한 그러한 삶의 남루함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그는 이 남루한 삶의 풍경들을 담담하게 풀어내는 가운데 그 모든 장삼이사들의 끈기 어린 의지적 면모를 살며시 들춰 보여준다.

좌판의 생선 대가리는/ 모두 주인을 향하고 있다// 꽁지를 천천히 들어봐// 꿈의 칠할이 직장 꿈이라는/ 쌜러리맨들의 넥타이가 참 무겁지 _‘금란시장’ 전문

벌써 17년째, “수직에 중독”(‘직각자’)된 도시를 떠돌다 강화도 뻘밭에 터를 잡고 자연의 순리대로 살아가는 시인은 ‘딱딱하게 발기만 하는 현대 문명’(‘딱딱하게 발기만 하는 문명에게’ - <말랑말랑한 힘>)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를 감추지 않는다. “문명의 세례”인 듯 “방사능비에 젖으며” 날아가는 기러기 떼를 무연히 바라보던 시인은 그토록 “환호하던 원자력 밝은 빛”이 결국은 “어둠”(‘봄비, 2011, 한반도, 후꾸시마에서 날아온’)이 되고, “산업화 열기에/ 깨 진 오 존 층 파 편 이/ 납덩이가 되어/ 산탄 외탄 총알이 되어” “우리들의 폐에 날아와 박히고 있”는 사태에 이르자 “생명을 총으로 만들어놓았으니” “우리는 자발적으로 추방되어야 할 뿐”(‘공기총’)이라고 일침을 가한다. 시인은 또 유전자 조작으로 “슈퍼 옥수수/ 슈퍼 콩/ 슈퍼 소”를 개발해내는 현실을 개탄하며 “꼭 그리해야 사람들이 살아갈 수 있다면” 차라리 “꼬막 밥그릇”이 어울릴 만큼 “사람들이 작아지는 방법을 연구해보”(‘농약상회에서’)자며, 자연의 존귀함과 생명에 대한 경외심을 일깨운다.

물이 법(法)이었는데/ 법이 물이라 하네// 물을 보고 삶을 배워왔거늘/ 티끌 중생이 물을 가르치려 하네// 흐르는 물의 힘을 빌리는 것과/ 물을 가둬 실용화하는 것은 사뭇 다르네// 무용(無用)의 용(用)을 모르고/ 괴물강산 만든다 하니// 물소리 어찌 들을 건가/ 새봄의 피 흐려지겠네 _‘대운하 망상’ 전문

함민복의 시는 꾸밈없는 삶의 기록이다. 시인은 삶의 어느 한 순간도 가벼이 보지 않고 소중한 의미로 받아들이며 세상의 모든 존재들에게 애틋한 마음을 건네며 다가선다. 가난을 일으켜 세우는 긍정의 힘이 있기에 그의 시는 가난하면서도 따듯하다. “흔들리지 않으려 흔들리고/ 흔들려 흔들리지 않으려고/ 가지 뻗고 이파리 틔우”(‘흔들린다’)며 “먼 길 걸어온 사람들 목을 축여줄 수 있”(‘폐타이어 3’)기를 소망하는 그의 시는 더 나은 삶과 사회, 지금과는 다른 세상을 꿈꾸는 모든 이들에게 따스한 위로가 될 것이다. 메마른 대지를 촉촉하게 적시는 봄비처럼 그렇게.

 

시인의 말

8년 만에 정식 시집을 낸다

달력들의 전투대형은 단순하다

7열 횡대,

붉거나 검은 전투복

지피지기여도 백전백패

이 이상한 전투가 아름답기도 한 것은

내 육체의 텃밭인 턱에

수염이 끈덕지게 자라듯

내 마음의 비탈이 차차

늙어왔음 때문일지도 모른다

다리 아파 다리 펴고 싶은 의자에

다리 아파 앉고 싶은 사람처럼

염치없이

시 의자에 푹신 앉아보았으나

시를 앉혀보지는 못한 미안한 마음 절감하며

삐꺼덕,

시집을 엮는다

강화에서 함민복

 

추천사 _이문재(시인)

아이러니. 역설과 함께 모든 뛰어난 시가 요청하는 기법이다. 아니, 상상력이다. “흔들리지 않으려 흔들렸었구나/ 흔들려 덜 흔들렸구나”(‘흔들린다’)라는 절창이 함민복 시의 중핵을 이루는 아이러니다. 그렇다고 이 시집이 역설과 포개지는 아이러니의 향연인 것만은 아니다. 함민복의 시는 생명은 물론 사물, 도구, 지구에 대한 예의와 겸손을 동반한다. 사찰을 보수할 때 나온 나무토막에 대한 예우, 비행기를 타고 구름 위를 날아가는 인간의 송구스러움. 이런 예의와 겸손이 그의 시세계에 품격을 부여한다.

함민복 시인은 자신의 시를 “인간과 세계를 번역하는 것”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그의 시에 의해 우리의 삶, 사회, 문명이 새로운 의미를 획득한다. 보이지 않는 것, 애써 보지 않으려는 것들이 그의 시에서 재탄생한다. 누가 망자를 영구차 위에 올려놓자고 제안하는가, 누가 장애인 주차 표시가 매번 장애인 차에 깔리는 사태를 목격하는가. 누가 차라리 사람이 작아지는 방법을 궁구하자고 발언하는가.

급진 민주주의자 로베르토 웅거는 말했다. “상상력은 기억을 예언으로 전환시키는 능력이다.” 그렇다. 여기 상상력의 발휘가 있다. 상상력의 전위가 있다. 시의 궁극 목표는 인간과 세계를 변화시키는 데 있거니와 더 나은 삶과 사회를 꿈꾸는 것이 시의 권리이자 책무다. 지금과 다른 세상을 꿈꾸는 모든 사람들에게 함민복의 시를 권한다. 함민복의 상상력은 우리가 기꺼이 공유해야 할 사회적 자본이다. 함민복의 시를 마음껏 갖다 쓰자. 함민복의 시를 불씨 삼아 불타오르자. 우리, 마음껏 상상하고, 있는 힘을 다해 변화하자.

 

함민복, 딴전 부리느라 세상을 뜨겁고 단호하게 살지 못함을 자성하다

함민복 시인(51)의 신작 시집 <눈물을 자르는 눈꺼풀처럼>(창비)은 ‘뜨겁고 깊고 단호하게’ 세상을 살지 못한다는 자성의 기록이다. 보기 드문 전업시인으로 강화도에서 소박한 삶을 살아가는 그이지만, 자신의 삶은 늘 ‘딴전’일 뿐 주변 사람들과 수평으로 연대하고 그들의 아픔에 동참하는 실천이 부족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딴전 부리는 사이 시간은 계속 흘러 죽음을 향하면서도 ‘눈물을 자르는 눈꺼풀처럼’ 눈을 한번 질끈 감았다 뜸으로써 삶이 새롭게 시작되는 경이로운 순간을 맞이한다.

“혼자 오랫동안 살아왔는데 늦게 결혼(2011년)을 하면서 새로운 관계들이 생겼습니다. 제가 누구의 이모부가 됐고요.(웃음) 좀 더 수평적으로 확산된 타인의 삶에 대해 생각하게 되더군요.”

시 ‘흔들린다’는 참죽나무를 가지치기 할 때 전해지는 떨림을 지켜보면서 평범한 삶을 유지하는 일의 고단함과 아슬아슬함을 노래한다.

나무는 최선을 다해 중심을 잡고 있었구나/ 가지 하나 이파리 하나하나까지/ 흔들리지 않으려 흔들렸었구나/ 흔들려 덜 흔들렸었구나/ 흔들림의 중심에 나무는 서 있었구나// 그늘을 다스리는 일도 숨을 쉬는 일도/ 결혼하고 자식을 낳고 직장을 옮기는 일도/ 다/ 흔들리지 않으려 흔들리고/ 흔들려 흔들리지 않으려고/ 가지 뻗고 이파리 틔우는 일이었구나 _‘흔들린다’ 부분

아프리카 남수단에서 봉사활동을 하다 선종한 이태석 신부가 병으로 발이 뭉개진 한센인들의 신발을 맞춰주기 위해 도화지에 발 모양을 그리던 일을 회고한 글을 읽었을 때 느꼈던 서늘한 감동을 담은 시도 있다.

이번 시집은 시인 함민복을 강하게 각인시킨 전작 <말랑말랑한 힘>을 낸 지 7년 만이다. “가난이 자연적인 소재와 어우러질 때 그것이 갖는 소박함, 내어줌 혹은 비워둠 등 훼손되지 않거나 일부러 채우지 않는 여유와 자유로움을 상징한다”(문학평론가 문혜원)는 평가를 받는 그의 시 세계는 이번 시집에서도 계속 이어진다. 표제시로 대표되는 수평적 삶에 대한 희구를 노래한 시들(1부)에 이어 제 몸을 감고 있는 줄자, 살아 움직일 때보다 더 무거운 고장난 시계, 녹슬어 버려진 저울 등 본래의 기능을 상실한 사물로부터 존재론적 사유를 펼친 시들(2부), 원체험으로 남아 있는 어렸을 때의 자연과 인간의 과도한 욕망으로 훼손된 현재의 자연을 대비한 시들(3부)도 있다.

침출수, 아, 썩어 피 썩어서도/ 지상으로 오르지 말란 말인가// 울음 무덤 위에/ 긴 장마(‘구제역 이후’), 물이 법(法)이었는데/ 법이 물이라 하네// 물을 보고 삶을 배워왔거늘/ 티끌 중생이 물을 가르치려 하네(‘대운하 망상’) 같은 시들을 보면, 낮고 조용하게 살아가는 이 시인의 과격함을 느낄 수 있다. [경향신문 한윤정 기자 2013.0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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