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 산책

겨우 존재하는 것들 - 유하

라라와복래 2012. 11. 30. 16:27
 

겨우 존재하는 것들

―유하

여기 겨우 존재하는 것들이 있다

쑥국 먹고 체해 죽은 귀신 울음의 쑥국새,

농약을 이기며 물 위를 걸어가는 소금쟁이,

주인을 들에 방목하고 저 홀로 늙어가는 흑염소,

사향 냄새로 들풀을 물들이며 날아오는 사향제비나비,

빈 돼지우리 옆에 피어난 달개비꽃,

삶의 얇은 물결 위에 아슬아슬 떠 있는 것들,

그들이 그렇게 겨우 존재할 때까지, 난 뭘 했을까

바람이 멎을 때 감기는 눈과 비 맞는 사철나무의 중얼거림,

수염 난 옥수수의 너털웃음을 그들은 만졌을지 모른다

겨우 존재하기 위한 안간힘으로,

달개비꽃 진저리치며 달빛을 털 때 열리는 티끌

우주의 문, 그 입구는 너무도 투명하여

난 겨우 바라만 볼 뿐이다

아, 겨우 존재하는 슬픔,

보이지 않는 그 목숨들의 건반을

딩동딩동 두드릴 수만 있다면!

난 그들을 경배한다

출전 : <세상의 모든 저녁>(민음사, 1993)

 

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존재와 비존재의 경계에 있는, 바스러질 듯 연약한 것들에 대한 애정과 연민을 담은 시다. 우주는, 세계는, 중요한 것들로만 이루어진 게 아니다. 세상을 두루 이루는 건 아주 작은, 사소한 것들이다. 그것들은 찬찬히, 자세히 보지 않으면 눈에 띄지 않는다. 시인의 ‘마음의 망막에 맺힌’(유하 시집 <세상의 모든 저녁> 자서에서), ‘겨우 존재하는’ 것들의 모습이, 그것을 그리는 시인의 마음이 독자 가슴의 건반을 딩동딩동 두드린다.

어쩌면 이들 역시 겨우 존재하는지도 모르겠는, 고아, 홀몸노인, 노숙인 들의 안부… 어떨지, 문득 그들 겨울의 애절(哀切)이 사무친다. [동아일보 2012.11.26]

 

유하 시인이자 영화감독. 전라북도 고창에서 태어나 세종대학교 영문과와 동국대학교 대학원 영화학과를 졸업했다. 2004년부터 동국대학교 영상정보통신대학원 영화영상제작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1988년 문예중앙을 통해 시단에 등단했으며 ‘21세기 전망’ 동인으로 활동하고 있다. 시집 <세운상가 키드의 사랑>으로 김수영문학상을 받았다. 그 밖에 출간한 시집으로 <무림일기> <바람부는 날이면 압구정동에 가야 한다> <세상의 모든 저녁> <안 이쁜 신부도 있나 뭐> <천일馬화> 산문집으로 <이소룡 세대에 바친다>가 있다. 1992년 자신의 시집과 같은 제목의 영화 <바람부는 날에는 압구정동에 가야 한다>를 연출해 영화계에 데뷔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