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 산책

[아주 짧은 초상화] 나와 전혀 다른 꿈 - 한승오 | 농부

라라와복래 2013. 5. 13. 09:21

[아주 짧은 초상화]

나와 전혀 다른 꿈

한승오 | 농부

그녀는 책상 위 노트북 컴퓨터를 열고 전원 버튼을 누른 뒤, 모니터에 바탕화면이 뜨는 동안 두 손을 손바닥이 위로 향하게 펼쳐놓고 손가락 하나하나를 뚫어지게 쳐다보며, 내가 이 손가락들을 움직이는 걸까? 아니면 이 손가락들이 나를 움직이는 걸까? 라고 중얼거리곤 했다. 그것은 그녀의 무의식적인 입버릇 같은 것이기도 했고, 절망적인 넋두리 같은 것이기도 했다.

독신의 그녀는, 일찍 남편과 사별한 언니와 함께 살았다. 언니는 출판 교정, 교열 일을 했고 그녀는 언니가 수정한 교정본 원고를 컴퓨터에 한글파일로 입력하는 일을 했다. 두 사람은 그 일로 생계를 꾸렸다. 그녀는 아주 오래 전부터 타자를 쳤다. 그녀의 손은 수동식타자기에서부터 전동타자기, 워드프로세서 단말기와 지금의 컴퓨터에 이르는 모든 기기의 자판에 단련되어 왔다. 그녀의 타자 실력은 1분에 400타를 넘었다. 지금껏 그녀는 타자기와 컴퓨터의 자판에서 벗어난 일을 해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어떤 꿈속에서, 그녀는 자판도 없이 맨손가락만으로 컴퓨터에 원고를 입력하고 있었다. 자신의 손을 뒤집어보자 손가락 하나하나 끝에는 한글 자모음이 돋을새김으로 새겨져 있었다.

육 년 전, 그녀는 장곡마을의 인근에 있는 살림농업학교에 입학했다. 그 결정은 함께 살던 언니에게도 당혹스러울 정도로 갑작스러운 것이었지만, 눈을 휘둥그레 뜨고 있던 언니에게 그녀는 내 자신이 죽도록 지겨워서 그래, 라고 간단히 한마디 했을 뿐이었다.

살림농업학교의 입학 면접에서 그녀는, 이 소리에서 벗어나고 싶어요, 라고 말하며 자기 앞의 책상 위에 열 손가락을 올려놓고 컴퓨터 자판을 두드리는 시늉을 했다. 면접을 보는 세 명의 선생들 중 한 사람이 그게 무엇을 뜻하느냐고 묻자 그녀는, 이십 년 가까이 해온 타자 일이 나를 짓눌러요. 이제는 나와 전혀 다른 꿈을 한번 꾸고 싶어요, 라고 말하며 자신의 두 손을 쳐다보더니, 마흔 살이 다 된 여자에게 그게 가능한 일인지 모르겠지만요, 라고 작은 목소리로 덧붙이며 얼굴을 붉혔다.

또 다른 선생이 힘든 농사일을 해낼 수 있겠냐고 묻자, 서울에서 태어나 자라 농사일을 해본 적은 한 번도 없어요. 하지만 제 손에 난생처음 호미가 들릴 거라고 생각하면 가슴이 떨려 와요. 어쩌면 그게 꿈의 입구가 될지도 몰라요, 라고 조금 떨리는 목소리로 말한 그녀는 마치 꿈을 꾸는 듯 흔들리는 눈빛으로 교실 창문 밖을 쳐다보았다. 또 다른 선생이 ‘생명살림농법’에 대해서 아는 것이 있느냐고 묻자, 아무것도 몰라요. 단지 제 자신이 살고 싶을 뿐이에요, 라고 짧게 말한 그녀는 면접시간 중 처음으로 선생들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2년 교육과정은 오전에는 무농약 무비료 무경운에 근거한 생명살림농법 강의로, 오후에는 농사실습으로 이루어졌다. 학생 수는 이십 명이 채 안 되었고, 모두 기숙사 생활을 했다. 식사는 학교 농장에서 나오는 생산물로 자급했는데, 주 메뉴는 현미밥과 유기농 채소였고 학교 양계장에서 나오는 계란이 곁들여졌다. 학교는 학생들에게 소식과 채식을 권장했다. 학교 안에서 합성세제 사용은 원칙적으로 금지되었고, 대신에 학교 비누공장에서 폐식용유로 만든 비누가 사용되었다. ‘생명살림’에 근거한 유기농사법과 생활법은 그녀에게 낯설고 힘들었지만, 그런 만큼 신선해서 좋았다. 마치 전혀 새로운 꿈처럼.

학교 졸업식 날, 오랜만에 만난 언니에게 그녀는 활짝 웃으며, 나 결혼할 거야. 이곳에서 새롭게 살고 싶어, 라고 말했다. 언니가 어떤 남자냐고 묻자, 시골에서 태어나 자라 농사를 지어온 사람이야. 아마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나와는 정반대의 사람일 거야. 그 사람 덕분에 나도 다른 사람이 될 수 있을 거야, 라고 말한 그녀는 오른손을 들더니 집게손가락으로 졸업생들 중 한 사람을 가리켰다. 키가 큰 그 남자는 눈매가 크고 순박했고 몸매는 군살 없이 다부졌고 목소리는 우렁우렁했고 경상도 말씨를 썼다. 눈으로 그 남자를 쫓고 있는 언니에게 그녀는, 나보다 일곱 살 연하야. 내가 먼저 청혼했어, 라고 조용히 말했다. 언니가 아무 말 없이 놀란 눈으로 그녀를 쳐다보자, 그녀는 언니의 시선을 피하며 자신의 한 손을 눈앞으로 들어 올리더니, 이 손가락 깊숙이 박힌 자판의 활자들이 이제 하나둘 없어질 거야, 라고 혼잣말처럼 말했다.

 

그녀는 그 남자와 결혼했고 장곡마을에서 삼 년을 살다가 이혼했다. 그 후, 그녀는 다시 서울의 언니 집으로 돌아왔다. 그녀는 자신의 결혼생활에 대해, 혹은 그 남자에 대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가끔 예전의 자기 책상 앞에 앉아 노트북 컴퓨터를 열고 자판 위에 오른손을 힘없이 올려놓고는, 이 자판의 활자들이 여전히 내 꿈을 빼곡히 채우곤 했어. 그런 꿈은 절대 지워지지 않았어, 라고 넋두리처럼 혼잣말을 했을 뿐이었다. 언니 또한 그녀에게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단지, 결혼생활 동안 더욱 악화된 피부병이 그녀의 얼굴과 피부에 남긴 심각한 발진과 습진의 자국을 보고 그녀의 상처를 짐작했을 뿐이었다. 그녀는 바깥출입을 하지 않으려 했고 아무와도 말하지 않으려 했다.

 

언젠가부터 그녀는 집안에서 하루종일 컴퓨터 자판만 두드렸다. 손에 잡히는 대로 아무 책의 아무 페이지나 펼쳐놓고, 혹은 집안에 들어온 피자가게 광고전단지를 펼쳐놓고 그 글자들을 그대로 자판으로 옮겼다. 그렇게 벗어나려 했던 것이건만, 그녀는 다시 컴퓨터 자판 앞에 앉을 수밖에 없었다. 그녀의 가느다랗고 기다란 손가락이 자판을 두드리기 시작한다. 탁, 타닥, 타다닥 자판을 두드리는 속도가 빨라질수록 그 소리는 마치 우레 소리처럼 요란해진다. 긴 머리칼이 살짝 가리고 있는 가녀린 그녀 어깨가 마치 소나타를 열정적으로 연주하는 피아니스트의 그것처럼 들썩인다. 손가락 하나하나가 자판을 누르는 소리는 마치 피아노 건반의 울림 같은 명징한 음률이 되어 그녀 귀에 닿는다. 그 순간 그녀 눈이 반짝이며 얼굴에 잠시 생기가 돈다.

어느 날 그녀는 책상 위에 신문을 펼쳐놓고 눈에 보이는 글자들을 컴퓨터에 입력하고 있었다. 언니가 조용히 그녀에게 다가와 책상 위에 두툼한 복사물 묶음을 올려놓으며, 할 수 있으면 이 자료를 컴퓨터에 입력해 봐, 라고 말했다. 하지만 신문을 향해 고정된 그녀의 시선은 전혀 움직이지 않았다. 언니는 복사물 묶음을 그녀 눈앞으로 좀 더 가까이 가져다 놓으며, 어느 교수의 회갑기념논문집으로 출간할 자료래. 칠팔십 년대에 발표한 논문들이라 컴퓨터에 한글파일로 다시 입력해야 돼, 라고 언니는 설명했다. 그녀는 자판 위에 있던 두 손을 무릎 위에 내려놓고 한동안 모니터에 깜박이는 커서를 가만히 응시하였다. 잠시 후, 내가 다시 이 일을 할 수 있을까, 아니 이 일을 용납할 수 있을까, 라고 말한 그녀는 옆에 서 있는 언니에게로 고개를 돌려 불안하게 흔들리는 눈빛을 던지더니, 시간은 계속 내 밖에서 흐르고 있는 거 같아. 난 그 시간 안으로 한 발도 들여놓지 못하고 있고, 라고 힘들게 말을 이었다. 그녀는 깊은 한숨을 내쉰 후 눈길을 복사물 묶음으로 천천히 돌리더니, 다시 갈 수 있을까? 나와 전혀 다른 꿈을 꾸려 했던 그곳으로, 라고 희미하게 덧붙인 그녀의 목소리는 핏기 없는 얼굴처럼 창백했다.

올해 봄, 그녀는 예전에 살던 장곡마을 인근의 마을로 혼자 이사했다. 그녀의 단출한 이삿짐 안에는 노트북 컴퓨터와 회갑기념논문집 자료가 들어 있었다. [경향신문 2013.05.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