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 산책

18년 만에 팬들 앞에 등장한 작가 무라카미 하루키

라라와복래 2013. 5. 7. 09:20

18년 만에 팬들 앞에 등장한 작가 무라카미 하루키

일본이 낳은 세계적인 작가 무라카미 하루키(村上春樹·64)가 18년 만에 팬들 앞에 등장했다. 하루키는 6일 교토(京都) 시내 교토대학 백주년기념홀에서 열린 공개 인터뷰에서 500명의 팬들을 만나 자신의 문학여정을 회고했다. 이날 행사는 2007년 사망한 임상심리학자 가와이 하야오를 기념하는 가와이 하야오 재단의 초청으로 열렸다. 가와이는 인간에 대한 이해를 한층 넓힌 것으로 평가받는 심리학자로, 하루키와 생전에 교분이 두터웠다. 공개 인터뷰의 테마는 ‘영혼을 보고, 영혼을 쓴다’였다.

하루키가 일본에서 일반 독자들 앞에 선 것은 18년 만이다. 사전 추첨으로 선발된 팬들은 실로 오랜만에 세계적인 작가의 육성에 공감했으며, NHK방송과 교도통신 등 일본 언론들도 이날 행사를 일제히 보도했다.

“내 책 읽고 운다고? 웃긴다는 편이 훨씬 좋아”

회색 재킷에 빨간 바지의 캐주얼한 차림으로 팬들 앞에 등장한 하루키는 30분간의 강연을 통해 자신의 ‘소설론’을 전개했다. 스스로 말하는 ‘하루키 소설’의 키워드는 ‘상처’와 ‘성장’이다. 그는 “사람은 마음의 상처를 입어도 시간이 지나면서 조금씩 성장한다. 이런 성장 이야기를 쓰고 싶었다”고 했다. “정말 슬픈 체험이 소설을 쓰게 하는 힘”이라는 말도 했다. 사람의 진짜 모습은 겉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그가 생각하는 소설은 “그 보이지 않는 이야기를 그려내는 것”이다. 하루키는 “이야기는 사람의 영혼 깊숙한 곳에 있다”며 “소설을 통해 저마다 가진 이야기들이 서로 공명할 수 있고, 이를 통해 마음의 유대를 만들고 싶다”고 말했다.   무라카미 하루키 | 문학동네 제공

하루키의 ‘사생활’에 대한 이야기도 조금씩 흘러나왔다. 하루키는 소문난 마라톤 예찬가이며, 최근에는 미국 보스턴 마라톤대회 폭발 공격 희생자들을 위로하는 글을 미국 신문에 기고하기도 했다. 그는 “달리기는 내게 소설을 쓸 때 달라붙는 어둠의 기운을 날려버리는 퇴마(退魔) 같은 것”이라고 말했다.

하루키는 공개장소에 나오지 않는 것으로 유명하다. 그는 “평범하게 살면서 글을 쓰고 있으며 다른 것에 고개를 디밀고 싶지 않다. 이리오모테 섬 고양이 같은 멸종위기종 동물이라고 생각해주면 고맙겠다”고 했다. ‘이리오모테 고양이’는 오키나와의 섬에 사는 희귀종이다.

하루키의 강연에 이어 문학평론가 유카와 유타카(湯川豊·74)와의 문답 형식으로 공개 인터뷰가 진행됐다. 하루키는 데뷔 이후 내면의 변화 과정을 설명했다. “데뷔 무렵에는 어떻게든 길게 써야지 하고 생각해 결말도 정하지 않은 채 몇 페이지를 써내려가다 보니 술술 써지게 되더라”면서 “나한테 이런 게(재주)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그는 쓰고 싶어도 제대로 써지지 않았던 초기 작품을 ‘편식이 심한 셰프’가 만든 요리에 비유한 뒤 “간신히 쓰고 싶은 것을 쓸 수 있게 되면서 내놓은 작품이 <해변의 카프카>(2002년 출간)였다”고 회고했다. 1979년 데뷔한 이래, 20여 년이 지나서야 쓰고픈 것을 쓸 수 있게 됐다는 얘기다.

하루키가 작가로서 자신을 발전시켜준 작품으로 꼽은 것은 1990년대 전반에 쓴 <태엽 감는 새 크로니클>이다. 그는 또 “소설 쓰기를 즐기던 초기 단계에서, 이 작품을 통해 한 단계 올라갈 수 있었던 것 같다”고 말했다. 기억에 남는 작품으로는 옴진리교가 1995년 3월 도쿄 지하철에 사린가스를 살포한 사건의 피해자들을 인터뷰해 쓴 논픽션 <언더그라운드>(1997년 출간)를 들었다. 그는 “피해자들과 3시간 가량 인터뷰한 뒤 1시간은 족히 울었다”며 이 책이 자신에게는 커다란 경험이었다고 회고했다.

하루키는 <1Q84> 이후 3년 만에 지난달 12일 장편소설인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의 순례의 해>를 펴냈다. 그는 “전작이 일상과 비일상의 경계를 없앤 소설이었다면, 이번에는 현실과 비현실이 부딪치지 않는 리얼리즘 소설을 쓰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세계적인 작가로 유명세를 떨치는 하루키도 새 소설이 독자와 평단으로부터 어떤 반응을 받을지 걱정이 되는 모양이었다. 그는 “퇴보라는 비판을 받을지는 모르지만 나에게는 새로운 실험”이라면서 최대 히트작인 <노르웨이 숲>도 순전히 리얼리즘 소설인데 출간 당시에는 문학적 후퇴라는 평가를 받았다는 후일담을 털어놨다. [도쿄 | 서의동 경향신문 특파원 2013.05.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