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 산책

세상 끝의 봄 - 김병호

라라와복래 2013. 5. 13. 10:25

 

세상 끝의 봄

김병호

수도원 뒤뜰에서

견습 수녀가 비질을 한다

목련나무 한 그루

툭, 툭, 시시한 농담을 던진다

꽃잎은 금세 멍이 들고

수녀는 떨어진 얼굴을 지운다

샛길 하나 없이

봄이 진다

이편에서 살아보기도 전에

늙어버린, 꽃이 다 그늘인 시절

밤새 혼자 싼 보따리처럼

깡마른 가지에 목련이 얹혀 있다

여직 기다리는 게 있느냐고

물어오는 햇살

담장 밖의 희미한 기척들이

물큰물큰 돋는, 세상 끝의 오후

출전: <밤새 이상(李箱)을 읽다>(문학수첩)

 

다른 것이 아닌, 꽃을 쓰는 일에는 무슨 생각이 딸려 오는지요. 꽃을 쓸어 묻는 일에는 무슨 기억이 딸려 오는지요. 살아온 기억보다는 그 너머의 것, 세상에 오기 전의 그림자가 어른거릴 것만 같지 않는지요?

신(神)에게 조금 더 다가가고 싶은 한 영혼이 있습니다. ‘이쪽’의 삶에 묻어나는 질문의 무늬들이 끝내 지워지지 않아 견습 수행자가 된 한 영혼이 있습니다. 막 시작한 또 다른 생이 목련꽃의 낙화들을 쓸고 있습니다. 멍이 든 얼굴들을 쓸고 있습니다. 어머니였다가 아버지였다가 또, 한때 보고 싶은 이였다가 이내 빗자루 끝에 쓸려가는 부질없는 얼굴들.

실은 목련도 밤새 서성이고 망설이며 보따리를 싸서 떠나온 꽃인지 모릅니다. 멀고 먼 밤을 걸어서 온 꽃인지 모릅니다. 어쩌면 이 견습 수녀님, 제 얼굴을 쓸고 있는 목련 나무인지 모릅니다.

세상의 ‘중심’에 서는 일의 내력이 이러할 것입니다.

문학집배원 장석남

 

시ㆍ낭송 김병호 1971년 광주에서 태어났으며, 1997년 <월간문학>, 2003년 문화일보 신춘문예를 통해 등단했다. 시집으로 <달 안을 걷다> <밤새 이상(李箱)을 읽다>, 연구서 <주제로 읽는 우리 근대시>가 있다. 2013년 한국시인협회 ‘젊은시인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