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화 속 그리스 신화
무사이
예술가들에게 영감을 주는 아름다운 여인을 두고 흔히 뮤즈(muse)라고 부른다. 이는 사실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무사’(Mousa)에 해당하는 영어 ‘Muse’에 관습적인 의미가 덧붙여진 것이다. 무사 여신은 대개 복수로 ‘무사이’(Mousai)라고 표현되는데, 문학과 과학 그리고 예술과 같은 고대의 주요 학문과 지적 활동을 주관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들의 기원과 인원수에 대해서는 기록자마다 차이가 있지만 대체로 올림포스의 주신 제우스와 기억의 여신 므네모시네 사이에서 태어난 아홉 자매라고 전해진다.
고대 그리스의 주요 학문을 담당하는 아홉 여신
고대 그리스 시대에 무사이는 본래 그 수가 세 명이었다가 점차 네 명, 일곱 명으로 불어나다가 급기야 아홉 명까지 언급되기에 이른다. 그러나 아홉 명의 이름까지 낱낱이 기록한 이는 시인 헤시오도스가 처음이었다고 한다. 그는 <신통기>(神統紀 Theogonia, 신들의 계보)에서 제우스가 티탄 신에 속하는 므네모시네에게서 얻은 아홉 명의 딸 이름을 열거했다. 이들의 역할은 당시 그리스의 주요 학문 분야를 담당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고대 후기에 이것이 보다 체계적으로 정리된다. 2세기에 제작된 로마 시대의 석관에는 각 분야의 상징물을 지닌 아홉 명의 무사이가 새겨져 있는데, 밝혀진 바에 따르면 다음과 같다.

작자 미상, <뮤즈들의 석관>, 150년경. 흰 대리석, 68x205x61.5cm, 루브르 박물관 소장.
왼쪽부터 차례대로, 책을 들고 있는 무사 클레이오(Kleio 또는 Clio), 웃는 가면을 든 희극의 무사 탈리아(Thalia), 연가를 담당하는 에라토(Erato), 플루트와 같은 관악기를 쥐고 있는 서정시의 무사 에우테르페(Euterpe), 찬가와 무언극의 무사 폴리힘니아(Polyhymnia 또는 Polymnia), 월계관을 쓰고 책을 든 서사시의 무사 칼리오페(Kaliope 또는 Caliope), 현악기의 일종인 리라를 든 가무의 무사 테르프시코레(Terpsichore), 바닥에 놓인 지구의 옆으로 기다란 컴퍼스를 대고 있는 천문의 무사 우라니아(Urania), 그리고 마지막으로 슬픈 가면을 머리에 쓴 채 왼쪽을 향해 있는 이가 비극의 무사 멜포메네(Melpomene)이다.
상징물을 통해 각 여신들의 분야를 파악
이처럼 아홉 명의 무사이 여신들을 각 학문 분야별로 나누어 정리한 대표적인 고대 후기의 저술가로 파비우스 풀겐티우스를 들 수 있다. 그의 저술은 후대의 화가와 조각가들에게 널리 읽혔다고 한다. 이탈리아 초기 르네상스 화가 코즈메 투라(Cosme Tura)가 벨피오레 궁전의 스투디올로(studiolo)를 장식하기 위해 그린 아홉 명의 무사이 중 두 개의 패널화를 감상해보자. 도식적인 형태와 섬세한 묘사, 강렬한 색채가 다분히 중세적인 분위기를 풍긴다. 하나는 서사시와 웅변의 무사 칼리오페로 추정되는 여인을 그린 것이고, 다른 하나는 춤과 합창의 무사 테르프시코레를 그린 것이다.

[왼쪽] 코즈메 투라, <칼리오페>, 1450년경, 패널에 유채 및 달걀 템페라, 116x71cm, 런던 내셔널 갤러리 소장
[오른쪽] 코즈메 투라, <테르프시코레>, 1450년경, 패널화, 118x81cm, 폴디 페촐리 미술관, 밀라노.
투라의 패널화에는 각 여신의 담당 분야를 알 수 있는 정보가 많지 않아 어떤 무사인지 가려내는 데 어려움이 있다. 그러나 폴겐티우스 이후 체사레 리파(Cesare Ripa)라는 르네상스 시대 이탈리아 미학자가 1593년 고대의 알레고리와 상징들을 정리한 이미지 교본 <이코놀로지아>(Iconolgia)를 출간하면서 상황은 달라진다. 당시는 물론 후대에도 매우 유용한 지침서 역할을 한 이 책으로 인해 예술가들은 작품에 등장하는 각 신들과 의인화에 맞는 상징물들을 적절히 묘사할 수 있었다. 또한 감상자 역시 작품에 묘사된 상징물을 통해 등장인물과 내용을 파악하고 이해할 수 있었다.

[왼쪽] 외스타슈 르 쉬외르, <클리오, 에우테르페와 탈리아>, 17세기경, 패널에 유채, 130x130cm, 루브르 박물관 소장.
[오른쪽] 외스타슈 르 쉬외르, <멜포메네, 에라토와 폴림니아>, 17세기경, 패널에 유채, 130x138cm, 루브르 박물관 소장.
아폴론을 수행하며 인간의 예술적ㆍ지적 창조력을 주관
신화에 따르면 이들 아홉 여신은 태양신이자 예술의 신 아폴론을 수행하며 그와 함께 파르나소스 산(또는 헬리콘 산)에 거주했다고 한다. 17세기 프랑스의 화가 시몽 부에(Simon Vouet)가 그린 <아폴로와 뮤즈>는 화면 중앙에 6현의 리라를 연주하고 있는 아폴론과 그 주위에 모여 앉은 무사이 여신들을 보여준다. 자세히 살펴보면 여신들은 그가 담당하는 분야의 상징물들과 함께 그려져 있어 감상자들의 이해를 돕는다. 예를 들어 그림 오른쪽의 세 여신 가운데 화관을 쓰고 파피루스 두루마리를 들고 있는 여인은 폴리힘니아, 지구의를 뒤로 하고 앉은 푸른 옷의 여인은 우라니아이다.

시몽 부에, <아폴로와 뮤즈>, 1640년, 캔버스에 유채, 부다페스트 미술관 소장.
한편 지혜의 여신 아테나(미네르바) 또한 무사이 여신들과 관계가 깊다. 신화에 따르면 이 여신들이 산다고 알려진 헬리콘 산에는 히포크라네라는 샘이 있었는데, 이 샘은 아테나 여신이 무사이 여신들에게 선물한 천마 페가소스가 그녀들의 노래를 듣고 대지를 걷어차자 그곳에 물이 솟으면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고대 로마의 시인 오비디우스는 아테나 여신이 무사이 여신들의 노래와 연주를 감상하기 위해 이곳을 방문했다고 기록한 바 있다. 프랑스 고전주의 화가 자크 스텔라(Jacques Stella)가 그린 이 장면을 보자. 화면 오른쪽에는 아테나 여신이 서 있고 무사이 여신들이 샘 주변에 모여 있다. 한 여신이 손으로 가리키는 쪽으로 페가소스도 보인다.

자크 스텔라, <뮤즈들의 숲에 있는 미네르바>, 17세기경, 캔버스에 유채, 116x162cm, 루브르 박물관 소장.
무사이 여신들이 이처럼 아폴론을 수행하고 아테나 여신의 방문을 받는 것은 그들이 인간에게 필요한 지적인 영역, 즉 예술과 학문을 관장하는 신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들에게도 조금씩 차이가 있다. 아폴론은 태양신으로서 모든 것을 굽어보고 가장 먼저 아는 경험적 지식을, 아테나는 인간의 문명화에 필요한 지혜를, 그리고 무사이 여신들은 인간의 예술적ㆍ지적 창조력을 주관한다는 것이다. 호메로스나 헤시오도스와 같은 시인들이 무사이에게 의지해 그들의 장대한 서사시를 풀어냈듯이, 후대인들 역시 무사이로부터 예술적ㆍ지적 영감을 받고자 했다. 무사이 여신들과 함께 등장하는 예술가의 초상화가 적지 않은 것은 바로 이 때문이라 할 수 있다.
글 이민수(미술 칼럼니스트) 홍익대학교 미술사학과 졸업, 박사과정에 재학 중이다. 인간, 사회 그리고 미술의 상호 관계와 이 세 가지가 조우하는 특정 순간을 탐구하는 데에서 미술사학의 무한한 매력을 느낀다. 현재 문화센터와 대학에서 미술사를 강의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