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 산책

이승하 시집 <천상의 바람, 지상의 길 - 혜초의 길>

라라와복래 2013. 10. 14. 11:35

천상의 바람, 지상의 길

―혜초의 길

이승하

서정시학 시인선 42

2010-06-05

둔황에서 투루판까지

―혜초의 길 32

또 다시 황사바람이 불어와 눈 비빈다

이 모진 바람 언제부터 불어왔을까

산맥을 넘고 사막을 지나온 시간

바위가 돌이 되듯 시간 쌓였으리

둔황 막고굴에 봉인되어 있던

혜초의 시간 장장 1200년

그동안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태어나고

즉어가면서 참 많이도 울었으리 눈물 없는

서방정토를 꿈꾸며 그렸을까 둔황 벽의 그림을

시간은 바람처럼 왔다 물처럼 가는 것이 아니라

내가 땀 흘리며 그려내는 것

둔황 가는 길 다리 아파 밤하늘 우러르니

캄캄한 저 하늘에 가물가물 별빛 하나

고개 끄덕이며 내 가슴에 불 밝힌다.

 

고원에 바람 불다

―혜초의 길 1

세상은 바다

돛 올리면 집 밖은 전부 길

닻 내리면 바로 거기가 내 집인 것을

통일했다고 천하 얻은 것이 아닌데

고기맛보다 지독한 사치와 향락

목탁 두드리면 배 채울 수 있는 나라

무엇을 바라 머리 깎았단 말인가

갖고 싶은 것이 없어 바닷길 저 너머

부처의 나라에 가보기로 했다네

불법佛法 일어난 까마득한 나라로*

얼마나 많은 인간과 짐승들이

여기 이 고원에서 숨거뒀을까

고원의 모래 알맹이들이여

시간의 역사를 기억하고 있느냐

인간이 나타난 이후의 시간과

이 모래들이 바윗덩어리였을 때의 시간을

바람은 모래둔덕을 만든다

세 마을에 한 번은 장례식이 있고

먹을 것이 없어 우는 아이들

물 한 모금의 자비와

짚신 한 켤레의 보시

자, 또 한 끼 얻어먹었으니 길 떠나자

데칸고원과 파미르고원을 지나

북천축국을 지나 남천축국을 지나

카슈미르를 지나 간다라를 지나

따뜻한 잠자리는 늘 집착

세상은 고통의 바다라고 했다

부처의 나라는 저 모래바람 부는

고원을 넘어가야 있나니

*혜초(704~780)가 당나라로 유학을 떠난 것은 열일곱 살 때(721)였다. 열아홉 살 때 인도와 중앙아시아 순례에 나선 혜초는 4년 동안 부처의 행적 답사를 겸한 여행을 하고 당나라로 돌아와 <往五天竺國傳>을 완성했다. 이 이름은 ‘오천축국을 여행했던 기록’이라는 뜻으로, 천축국은 인도의 중국식 표기이다. 오천축국이란 인도가 넓기 때문에 동서남북과 중앙의 다섯 지방을 구분해 한꺼번에 부른 이름이다.

사람을 만나 울다

―혜초의 길 4

걸어온 길 뒤돌아보니

구름이 덮여 있는 천길 낭떠러지

앞 바라보니 안개라 길도 없다

험한 골짜기에 도둑들이 들끓으니 몸조심하라고?*

왜 겁나지 않겠는가 눈물 솟구칠 정도로

걸어온 길도 험로였는데

가야 할 길은 무일푼의 길인가

암중모색의 길, 이 넓은 천지간에

사람이 사람 만나 살 부비며 살아가는데

천상천하에 나를 아는 이는

그대밖에 없구나

신라는 등 뒤 천리 먼 길

토화라국도 어느덧 국경

토번으로 가는 길은 더욱 낯설다

노을은 대지 다시 붉게 취하게 하는데

또 하룻밤 등 붙일 잠자리가 있을지

밥 한 술 얻어먹을 수 있는 어느 담벼락 밑이면

나는 또 짚신 벗고 앉아

먹을 갈며 나 자신을 갈아야 한다

*그대 서쪽 토번 멀다고 한탄하나 나는 동쪽 길 먼 것을 애달파하네

길 황량하고 구름 산은 엄청 높고 험한 골짜기에는 도둑도 많다지

새 나는 산봉우리 너무 높아 놀라는데 사람들은 외나무다리 어렵게 건너네

평생에 눈물 흘린 적 없었으나 오늘은 내 한없이 눈물 흘리고 있네

혜초의 시 중에 <吐火羅國 逢漢使入蕃 略題四韻 取辭>를 번역해 보았다. 제목의 뜻은 ‘토화라국에서 토번으로 가는 한나라 사신을 만나 그가 한 말을 취해 시를 짓는다’이다. 토화라국(吐火羅國)은 현재의 아프가니스탄과 러시아 국경 지대에 자리 잡은 나라이다. 토번(吐藩)은 티베트의 한역 이름이기도 한데 그 당시 토화라국 수도의 이름이기도 했다. 시에서 말하는 ‘동쪽’은 신라일 것이다.

바람이 불어오는 길

―혜초의 길 24

그대 아는가 바람이 불어오는 길을

바람은 때로 길도 잃게 하지만

열흘 넘게 부는 바람은 없더라

바람도 쉬어 가는 파미르고원

바람인들 왜 힘들지 않겠는가

바람은 제각각 다르지

어제 불던 바람, 오늘 부는 바람과 다르고

여름에 부는 바람, 겨울바람과 다르지

길도 다르다

어제 간 그 길이 영원히 그 길이 아니듯

사람이 만든 길로 짐승 같은 사람이 가기도 한다

강도를 만나도 빼앗길 것이 없었을 혜초

어제는 바람을 업고

오늘은 바람을 안고

토화라국에서 만난 눈, 땅 갈라져라 휘몰아쳤지만*

봄바람 불면 그 길 또한 열리지 않던가 혜초여

*혜초가 남긴 시. ‘차디찬 눈 얼음까지 끌어 모으고 찬바람 땅 갈라져라 매섭게 분다.’

시인의 말

혜초가 간 길을 따라가 보다

문단 선후배 시인들과 함께 중국 시안(西安)으로 가는 직항기에 몸을 실은 것은 2000년 7월 18일이었다. 서울→시안→우루무치→투루판→하미→둔황으로 이어진 여정은 그 옛날 중국과 서역 각국 간의 비단무역을 계기로 만들어진 실크로드 중 천산북로를 택해 우루무치에서 둔황(敦煌)으로 거슬러 내려오는 여정이었다. 그 여행길 어디를 가나 여기가 혜초(慧超, 704-780)가 바랑을 메고 걸어갔던 길이겠거니, 하고 생각했다.

혜초의 <왕오천축국전(往五天竺國傳)>이 발견된 곳은 둔황의 막고굴 중 하나인 장경동(藏經洞)이었다. 막고굴은 중국 감숙성(甘肅省)에 있는데, 전진(前秦) 건원 2년(366) 승려 낙준(樂僔)에 의해 조성되기 시작한 후 천여 년에 걸쳐 진행되었지만 무슨 이유인가로 사람의 손을 타지 않고 묻혀 있었다. 최초의 발견자는 1899년 헝가리의 지질학자 로치(L. de Loczy)였다. 그의 학계 보고 이후 러시아ㆍ영국ㆍ일본ㆍ프랑스 등 열강이 둔황의 고서와 그림에 눈독을 들여 수십 상자씩 자기 나라로 가져갔다. 러시아의 고고학자가 벽화 10여 장을 뜯어가자 미국도 벽화 20여 장과 불상을 가져갔으니 막고굴은 열강들의 집단 도굴로 아수라장이가 되었다.

그 무렵 베트남은 프랑스의 식민지였는데 하노이에 있던 극동학원 소속 30대의 젊은 교수 펠리오도 소문을 듣고 둔황에 가서 책자 스물네 상자와 회화와 직물류 다섯 상자를 헐값에 사서 프랑스로 보냈다. 그 속에 너덜너덜한 두루마리 족자 한 권이 들어 있었고, 그 족자에는 한자 5893자가 총 227행에 걸쳐 빼곡하게 적혀 있었다. 앞뒤가 떨어져 나가고 없어 책자의 제목도, 누가 쓴 것인지도 알 수 없었다. 펠리오는 당나라 혜림(慧琳)이 지은 <일체경음의(一切經音義)>라는 불경주석서를 통해 족자를 쓴 사람의 이름이 혜초임을 알아냈고, 책자의 제목이 ‘往五天竺國傳’이란 것도 알아냈다. 그 당시 중국은 인도를 ‘천축국’이라고 불렀는데 인도가 워낙 넓기 때문에 동서남북 사방과 중앙을 합쳐 인도 전역을 ‘오천축국’이라 불렀다. 따라서 책의 제목은 ‘오천축국을 여행한 것을 기록한 글’이란 뜻이다.

열일곱 살 어린 나이에 중국으로 유학을 가 불도를 닦으며 학업에 정진하던 혜초가 불교의 발상지이며 석가모니의 유적지인 인도 순례의 길에 오른 것은 723년, 그의 나이 겨우 열아홉 살 때였다. 배를 타고 동남아시아를 거쳐 인도에 도착한 그는 동부 인도에서 서북 인도를 돌아 중앙아시아 드넓은 땅을 편력했으며, 데칸고원과 실크로드, 파미르고원을 거쳐 당나라로 돌아왔다. 여행기는 당의 안서 대도호부가 있던 쿠차(Kucha, 龜玆國)에 도착하는 727년 11월로 끝난다.

<왕오천축국전>은 8세기경의 인도와 중앙아시아에 대해서 쓴 전 세계에서 단 하나밖에 없는 기록문이라고 한다. 여행하면서 들른 각 지역의 정치 상황, 생활 수준, 마을의 모습과 음식, 의복, 습속, 산물, 기후, 불교 신앙의 정도 등을 그가 기록하지 않았더라면 신라 승려 혜초의 이름이 후세인의 뇌리에 남지 않았을 것이다.

혜초는 여행을 끝내고 당나라로 돌아와 장안 천복사에서 인도 승려 금강지와 함께 밀교를 연구하는 과정에서 인도 경전을 한자로 번역했다. 번역 사업 도중 금강지가 죽었고, 그의 수제자인 불공삼장과 함께 계속 밀교를 연구했다. 774년 불공삼장마저 죽자 밀교의 원로급 성직에 임명되어 오로지 밀교 연구에 전력을 다했다. 혜초는 6년 뒤 산서성에 있는 오대산의 건원보리사에 들어가 번역 사업에 마지막 힘을 쏟다 세상을 떠났으므로 고국 땅은 끝내 밟지 못하였다.

혜초는 <왕오천축국전>에 자기가 고생한 이야기는 일체 쓰지 않았다. 하지만 당나라도 낯선 땅이었을 텐데 인도는 오죽했을까. 말인들 제대로 통했을까, 길인들 제대로 닦여 있었을까. 낯선 마을에서의 불편한 잠자리와 입에 맞았을 리 없는 식사, 지역에 따라 물맛도 달랐을 것이고, 전염병 도는 마을도 틀림없이 있었을 것이다. 엄동설한 산악지방의 눈보라와 일망무제 사막지대의 모래바람을 맞으며 혜초는 무엇을 생각했을까. 우기에는 열흘 이상 비를 맞으며, 건기에는 우물도 말라붙은 고원을 지나며 그는 걷고 또 걸었을 것이다. 모기와 빈대 같은 벌레에 줄곧 물리며, 물 한 모금을 갈망하며. 기이한 풍광에 넋 잃은 것이 어디 한두 번이었을까. 땀과 먼지에 찌든 탁발승의 의복 또한 거지꼴이었을 터.

<왕오천축국전>이 여행기로만 된 책자였다면 딱딱한 문헌으로서의 가치밖에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다섯 수의 시를 거기에 남겼다. 그가 얼마나 감수성이 풍부한 젊은이였던가를 나는 다섯 수의 시를 통해 충분히 느낄 수 있다. 시를 통해 그의 체취를 맡을 수 있으며 숨소리를 들을 수 있다. 슬플 때 눈물 흘리고 기쁠 때 웃을 줄 알았던 신라인 혜초. 속세를 떠난 승려였지만 그는 그 이전에 감정이 풍부한 시인이었다. 혜초가 걸어갔던 5만리 길을 따라 걸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지만 그의 길고 긴 여행에 동참하는 마음으로 시 61편을 써보았다. <왕오천축국전>에는 오천축국만 아니라 모두 40개 나라에 대한 것이 기록되어 있다.

시를 쓰면서 정수일 선생의 번역서이자 해설서인 <혜초의 왕오천축국전>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정수일 선생께 마음 깊이 감사를 드린다. 그리고 고은, 김규현, 한정섭 님의 책자를 통해서도 많은 일깨움을 얻었다. 감사를 드린다. 실크로드 여행 10년 만에 시집을 묶어 큰 짐을 내려놓은 기분이다. 혜초의 다섯 수 한시를 연구한 논문 <순례자의 여수와 향수의 시학>은 <한국문예창작> 제16집에 실려 있다.

이승하 1960년 경북 의성에서 태어나 김천에서 자랐다. 중앙대 문예창작학과 및 동 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고, 1984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시가, 1989년 <경향신문> 신춘문예에 소설이 당선되어 등단했다. 대한민국문학상, 지훈상, 시와시학상 등을 수상했다. 저서로는 시집 <사랑의 탐구> <욥의 슬픔을 아시나요> <폭력과 광기의 나날> <생명에서 물건으로> <뼈아픈 별을 찾아서> <인간의 마을에 밤이 온다> <천상의 바람, 지상의 길> 등이, 시론집 <한국의 현대시와 풍자의 미학> <생명 옹호와 영원회귀의 시학> <한국 현대시 비판> <백 년 후에 읽고 싶은 백 편의 시> <한국 현대시에 나타난 10대 명제> <이승하 교수의 시 쓰기 교실> 등이 있다. 2013년 현재 중앙대 문예창작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설화의 길에서 문학의 길로 걸어 나오게 하다

박성민 l 시인

지금으로부터 1300여 년 전 신라의 젊은 학승 혜초(慧超, 704-787)가 인도 전역과 중앙아시아 일대 5만 리 넘는 길을 두 발로 순례하였고, 그 구법 순례의 기록이 <왕오천축국전>이다. 이승하 시인은 두루마리에 필사된 이 여행기가 발견된 중국 둔황(敦煌) 석굴이 있는 실크로드를 여행하고 돌아온 이후 10년 동안 혜초 여행의 의미와 길의 의미를 탐색하며 연작시 61편을 써 시집으로 묶었다. 4년 동안 5만리 길을 걸은 혜초는 물론이거니와 10년 동안 ‘혜초의 길’이라는 한 주제에 천착한 이승하 시인의 집념과 인내심 역시 대단하다는 생각이 든다.

혜초의 여행은 요즈음 말하는 관광(tour)이 아니다. 우리가 떠올리는 관광의 낭만적인 풍경은 근대 이후에나 가능한 것이었다. 근대적 교통수단의 발달은 나귀에 짐을 싣고 걸어서 천 리를 가야만 했던 힘겨운 길을 버스나 기차가 몇 시간에 도착하도록 해주었다. 교통수단의 발달은 고대에 여행을 떠나는 사람이 품었던, 홍수나 가뭄, 폭풍우 등 자연에 대한 외경 같은 것을 없애버리고 차창 밖으로 비치는 자연을 하나의 풍경으로 전락시키고 말았다. 근대 이전의 서구 교육에서는 여행을 무척 중요하게 여겨 청소년들을 위해 여행을 정규 교과과목의 하나로 운영하기도 했다. 여행을 통해 서구의 청소년들은 미지의 세계를 가보는 모험심을 기를 뿐 아니라 고난과 시련의 과정을 스스로 경험함으로써 정신적으로 더욱 성장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여행의 영어 표기인 ‘travel’이 고생, 어려움, 노고, 곤란 등의 뜻을 지닌 ‘trouble'과 같은 어원이라는 것은 고대의 여행이 얼마나 힘겨운 일이었는가를 시사해 준다. “구름이 덮여 있는 천길 낭떠러지”나 “험한 골짜기에 도둑이 들끓으니 몸조심하라”(사람을 만나 울다 - 혜초의 길 4)는 구절에서 보듯이 곳곳에서 도둑이나 강도가 들끓는 미지의 땅으로 혜초는 걸어간 것이다. 전쟁터를 지나가거나 강도를 만나면 죽을 각오를 해야만 하는 이방으로의 장거리 여행이란 유서를 미리 써놓고 출발해야 하는 역경과 고난, 시련의 길이었을 것이다. “강도를 만나도 빼앗길 것이 없었을 혜초”(바람이 불어오는 길 - 혜초의 길 25)였겠지만, 살아서 돌아온다는 보장을 할 수 없는 여행길, 그 길을 혜초가 간 것이다. 혜초는 40개국의 풍속과 풍광, 정치 상황, 생활 수준, 음식, 의복, 산물, 기후, 불교 신앙의 정도 등을 기록하였다고 한다.

길이 지워지고 없다

포성이 멈추지 않는 땅

반군들의 본거지 혹은 외인들의 주둔지

혜초가 봤을 때도 그랬을 텐데

남아 있는 건물이 몇 없다

지금 대식(大寔, Arabia) 군대에게 진압을 당하고 왕은 핍박을 받아 동쪽으로 한 달 동안 걸어갈 거리로 달아나서 바닥샨(薄特山, Badakhshan)으로 가서 산다. 그러므로 이 땅은 대식국의 지배하에 있다.

대식국 병사에게 칼 맞은 이들

이스라엘의 로켓포 맞은 이들

얼마나 많이 아팠으면

저렇게 몸부림을 치다

사시나무 떨듯이 떨다

장작처럼 굳어버리나

시간은 길을 바꾸고

길의 이름도 바꾼다

길이 사라지니

하늘은 보이지 않는다

숲이 사라지니

마을이 보이지 않는다

마침내 자연 사라지니

길이 보이지 않는다

내가 죽으면 너 길이여

나를 받아줄 수 있겠니  (‘길이 지워지다 혜초의 길 52’ 전문)

2000년 7월 서울→시안→우루무치→투루판→하미→둔황으로 이어진 시인의 여정은 그 옛날 중국과 서역 각국 간의 비단무역을 계기로 만들어진 실크로드 중 천산북로를 택해 우루무치에서 둔황으로 거슬러 내려오는 여정이었다고 한다. 여행길 어디를 가나 이곳이 바로 혜초가 바랑을 메고 걸어갔던 길이겠거니, 하는 생각이 떠나지 않았던가 보다.

먼 길을 떠나는 혜초가 그랬듯이 시인의 옷차림도 가벼웠을 것이다. 장거리를 걷고 걷다보면 어깨에 멘 작은 가방 하나도 무겁게 느껴지는 법이다. 시인의 시편들 역시 장식적인 비유(decorative metaphor) 같은 것들은 탈탈 털어버리고 가장 가벼운 보법으로 머나먼 길을 묵묵히 간다. “꿩이 화려한 깃털로 치장하고 있지만 한 번에 백 걸음 정도의 거리밖에 날지 못하는 것은 살은 쪘으나 힘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매가 아름다운 깃털을 지니지는 못했어도 하늘 높이 날아오르는 것은 골력이 강건하고 그 기세가 맹렬하기 때문이다. 문장의 재능과 역량 역시 그러한 사정과 매우 흡사하다. (중략) 화려한 수사가 풍부하다 해도 작품에 풍과 골이 살아 움직이지 않으면 화려한 수사도 힘을 잃고 운율의 아름다움도 무력해진다.”고 말한 유협의 <문심조룡(文心雕龍)> ‘풍골’편을 떠올리게 하는 것이 그의 시다.

그런데 왜 이승하 시인은 굳이 혜초를 10여 년 동안이나 써야 했을까. 그것은 토화라국이 대식국에게 점령된 그때처럼 지금 우리 시대도 여전히 폭력과 광기, 혹은 공포와 전율의 나날이라는 생각과 무관하지 않기 때문이 아닐까. 현대사회는 고대보다 더욱 발달된 최첨단 무기로 인해서 대량살상이 가능해졌다. 후기산업사회에 들어 물신주의적 경향이 더욱 팽배해져서 극도의 이기심과 자국주의로 인한 분쟁과 전쟁이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어서 제 정신을 가진 인간을 미치게 만들고 있으며 한편으로는 기아가 자국보호라는 미명하에 방치되고 살육이 세계평화라는 미명하에 자행되고 있다. 이런 만행으로 인한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 우리는 현대의 물신주의적 성향을 하나씩 벗어던져 버리고 혜초가 걸어갔던 고행의 길, 자기 속으로의 여행이 필요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이 시집의 “내 어린 날의 김천시 아랫장터/ 미친 여인 하나가/ 머리 산발한 채 춤추고 있다/ 웃으며, 연신 웃으며 손짓한다”(순례자의 꿈 - 혜초의 길 3)에서의 광녀 체험을 통해서도 나타나는 공포와 전율의 발원지는 어딜까. 이에 대해 시인은 계간 <시와 산문>에 다음과 같은 체험적 시론을 발표한다.

사랑의 고갈이 안타까워 <사랑의 탐구>라는 시집을 냈고, 유토피아에 대한 갈망이 <우리들의 유토피아>를 쓰게 했다. 욥의 고난을 생각하면서 <욥의 슬픔을 아시나요>를 냈고, 폭력과 광기가 없는 세상에 대한 꿈을 담아 <폭력과 광기의 나날>을 냈다. 생태환경이 파괴된 욕망의 늪에서 허우적대며 <생명에서 물건으로>를 냈다. 별들도 아파서 빛나는 것 같아서 <뼈아픈 별을 찾아서>를, 지상에 드리운 어둠을 걷어내고 싶어서 <인간의 마을에 밤이 온다>를 냈다. 등단 25년을 스스로 기념하여 펴낸 시선집의 제목이 ‘공포와 전율의 나날’이었으니, 내가 쓴 시들은 절규가 아니면 신음소리였다.

시인의 상상력은 시공을 초월하여 광활한 사막의 풍경을 현대도시로 옮겨다 놓기도 한다. “길에서 밥 먹는 아이야/ 길이 식탁이 되어 있구나”(집 없는 소년의 저녁시간 - 혜초의 길 33)와 같은 구절이나 “응급실에서였다/ 아파서 고함치는 사람 곁에서/ (보호자인 듯 했으나)/ 휴대폰을 받고서 크게 웃는 사람이 있었다”(사람의 사막 - 혜초의 길 30)에서와 같이 아직도 ‘절규가 아니면 신음소리’를 듣는 상황이 신음소리를 들리는 그대로 쓸 수밖에 없는 이유일 것이다. “오천축국 가서 보고 알았겠지/ 부처에게 길은 집이고 도량이고/ 병원 영안실이었다는 것을// 행려병자들의 집은 길이다/ 거리의 천사들의 집은 길이다/ 노숙자들의 집은 지하철역이나 공원이고// (중략) // 길의 성자 혜초여/ 길은 그대에게도 집이었고/ 부처에게도 집이었으리"(길에서 태어나 길에서 죽는다 - 혜초의 길 26)에서와 같이 그는 사막의 길에서 행려병자들이나 노숙자들을 떠올리기도 한다.

물질적으로 풍요로워졌다고는 하지만, 인간을 가장 야만적이며 비참한 존재로 몰고 가는 전쟁은 아직도 우리 곁에서 멀리 떨어져 있지 않고 세계 곳곳에서 현재진행형의 모습을 하고 있다. 그러므로 시인은 “후세인에게/ 학살자의 말로가 어떤 것인지를 보여주기 위해/ 교수대에 너를 세워/ 목을 옭아매 죽이기로 했다/ 대식국의 영웅 사담 후세인이여”(대식국 영웅의 마지막 길 - 혜초의 길 42)에서와 같이 과거에 다른 나라를 지배하며 강대한 세력을 구가하던 대식국(이라크)의 지도자 사담 후세인이 미국의 압력에 시달리다 공개 처형되는 역사의 순환을 냉철한 시선으로 그려내고 있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혜초가 머나먼 고행의 길을 떠난 시기와 시인 이승하가 실크로드를 여행한 시기는 비슷한 점이 많다. “통일했다고 천하 얻은 것도 아닌데/ 고기맛보다 지독한 사치와 향락/ 목탁 두드리면 배 채울 수 있는 나라/ 무엇을 바라 머리 깎았단 말인가/ 갖고 싶은 것이 없어 바닷길 저 너머/ 부처의 나라에 가보기로 했다네/ 불법佛法 일어난 까마득한 나라로”(고원에 바람 불다 - 혜초의 길 1)에서처럼 혜초가 걸어간 고행의 길을 통해서 물질적으로 부족함이 없는 현실에 안주한 채 타성에 젖어가는 현대인의 삶에 대한 반성을 촉구하고 있다.

올해 이승하 시인은 제자이자 후배인 차창룡 시인의 출가 소식을 접하게 된다. 행자 생활을 하고 있는 곳은 합천 해인사다. 어느덧 중견 시인의 대열에 서 있던 제자가 속세의 모든 것을 다 훌훌 던져버리고 절로 난 길로 걸어갔다. “부처님이 그러하셨듯이 저는 앞으로 끊임없이 길을 갈 것이고, 길에서 꿈을 펼칠 것이며, 길 위에서 생을 마감할 것입니다.”라는 말을 남기며 떠나서 행자 생활을 하고 있다. 이에 이승하 시인은 “자네의 용기가 부러웠고 나의 용기 없음이 부끄러웠다. 오늘은 열일곱 젊은 나이에 중국 당나라로 떠났던 어린 스님 혜초의 용기를 새삼 생각해보네.”라는 편지를 쓴다(사보 <청암>에 수록되어 있음). “영원히 이어갈 부처의 말씀”과 “길들의 종교”가 제자의 앞날에 펼쳐지기를 기원하면서.

하늘 아래 영원한 것 없더라도

그대 꿈꾼 것은 영원이 아니었던가

영원히 이어갈 부처의 말씀

영원히 이어갈 길들의 종교

그대 걸어갔던 그 길

지금은 잡풀만 무성해도

그때 그곳으로 사람이 걸어갔었다

사람을 불쌍히 여겼던 사람이

사람이 걸어가는 길을 사랑했던 한 사람이

가보지 않았는데 어찌 길이라 할 수 있으리

그대 땀으로 썼던 두루마리 족자 하나

천년이 넘는 시간의 길 묵묵히 걸어왔으니

하늘 아래 영원한 것도 있구나

그대 살아생전에 만났던 사람 다 죽고 없지만

그들은 모두 길 되어 있으리

그들이 길 되었음을 그대 기록하였기에

나 이제 집 떠날 수 있을 것 같다 혜초여  (‘다시 길 떠나는 그대 - 혜초의 길 61’ 전문)

이승하 시인은 머리말에 썼듯이 아직도 운전을 배우지 못했으므로 자가용이라는 것을 모르고 사는 사람이다. 그래서 지하도와 계단, 버스 손잡이와 횡단보도, 인도 등에 익숙해져 있는 사람이고 도보가 가능한 거리는 걸어간다. 어찌 보면 현대사회가 요구하는 신속한 이동성과는 거리가 먼, 전근대적인 사람으로 생각되는데 체격 또한 대부분의 장거리 마라토너와 흡사하다. 아마도 모진 더위와 추위를 헤치고, 굶주림과 외로움을 겪으며 이방의 길을 걸었을 혜초의 체격 역시 이승하 시인과 다를 바 없었으리라는 상상을 해본다. 이런 연유 때문일까, “십 년 동안 혜초가 걸었던 길을 생각하며 쓴 연작시들을 세상의 모든 길에게 바치고 싶다”고 말한 이 시집의 머리말은 읽는 사람의 마음을 숙연해지게 한다.

시인은 혜초가 되고, 혜초가 걸었던 길이 되고, 마저 걷지 못한 길이 되고, 앞으로 제자가 걸어가야 할 고행의 길이 되고, 길인지 아닌지도 모를 무형의 바람이 된다. “신화의 길에서 역사의 길로 걸어 나온 그대”(천산북로에서 - 혜초의 길 2)가 <왕오천축국전>을 통해 비로소 역사의 길로 걸어 나온 혜초라고 한다면, 혜초를 “설화의 길에서 문학의 길로 걸어”나오게 한 사람은 바로 시인 이승하다.

―<열린시학> 2010 가을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