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 산책

한강 시집 - 서랍에 저녁을 넣어두었다

라라와복래 2013. 12. 3. 06:12

서랍에 저녁을 넣어두었다

한강

문학과지성 시인선 438

2013.11.15

165쪽

저녁의 소묘 5

죽은 나무라고 의심했던

검은 나무가 무성해지는 걸 지켜보았다

지켜보는 동안 저녁이 오고

연둣빛 눈들에서 피가 흐르고

어둠에 혀가 잠기고

지워지던 빛이

투명한 칼집들을 그었다

(살아 있으므로)

그 밑동에 손을 뻗었다

 

상처 입은 영혼에 닿는 투명한 빛의 궤적들

인간 삶의 고독과 비애,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맞닥뜨리는 어떤 진실과 본질적인 정서들을 특유의 단단하고 시정 어린 문체로 새겨온 한강이 첫 시집 <서랍에 저녁을 넣어 두었다>를 출간했다. 1993년 계간 <문학과사회> 겨울호에 시가 실리고 이듬해 <서울신문>에 단편이 당선되어 본격적인 창작 활동을 시작한, 올해로 등단 20년차인 한강은 그간 여덟 권의 소설 단행본을 출간하는 틈틈이 쓰고 발표한 시들 가운데 60편을 추려 이번 시집을 묶었다. ‘저녁의 소묘’ ‘새벽에 들은 노래’ ‘피 흐르는 눈’ ‘거울 저편의 겨울’ 연작들의 시편 제목을 일별하는 것만으로도 그 정조가 충분히 감지되는 한강의 시집은, 어둠과 침묵 속에서 더욱 명징해지는 존재와 언어를 투명하게 대면하는 목소리로 가득하다. “말과 동거”하는 숙명을 안은 채 “고통과 절망의 응시 속에서 반짝이는 깨어 있는 언어-영혼”(문학평론가 조연정)을 발견해 가는 시적 화자의 환희와 경이의 순간이 빛-무늬처럼 고스란히 독자에게 전염된다.

내가 가진 모든 생생한 건/부스러질 것들/부스러질 혀와 입술,//따뜻한 두 주먹/부스러질 맑은 두 눈으로//유난히 커다란 눈송이 하나가/검은 웅덩이의 살얼음에 내려앉는 걸 지켜본다//무엇인가/반짝인다 (‘저녁의 소묘 4’)

죽음에서 삶이, 어둠에서 빛이 탄생하는 아이러니

늦은 오후에서 한밤으로 건너가는 시간(저녁), 다시 한밤에서 날이 새기 직전의 시공간(새벽)에 주로 깨어 있는 시인은 “부서진 입술//어둠 속의 혀”로 “허락된다면 고통에 대해서 말하고 싶어” (‘피 흐르는 눈 3’) 한다.

이 어스름한 저녁을 열고/세상의 뒤편으로 들어가 보면/모든 것이/등을 돌리고 있다//고요히 등을 돌린 뒷모습들이/차라리 나에겐 견딜 만해서 (‘피 흐르는 눈 4’)

인간의 삶에 구체적이고 특별한 불행들이 생겨나기 이전, 시인은 “아직 심장도 뛰지 않는/점 하나로/언어를 모르고/빛도 모르고/눈물도 모르며/연붉은 자궁 속” “죽음과 생명 사이,/벌어진 틈”(‘마크 로스코와 나’)에서 고통의 기원과 진실의 정체를 묻는다. 이를 위해 “어깨를 안으로 말고/허리를 접고/무릎을 구부리고 힘껏 발목을 오므려서” (‘심장이라는 사물’) 자신의 피 흘리는 육체를 담보 삼는 일도 마다 하지 않는다.

누군가 내 몸을 두드렸다면 놀랐을 거야/누군가 귀 기울였다면 놀랐을 거야/검은 물소리가 울렸을 테니까/깊은 물소리가 울렸을 테니까/둥글게/더 둥글게/파문이 번졌을 테니까 (‘눈물이 찾아올 때 내 몸은 텅 빈 항아리가 되지’)

몸속에 맑게 고였던 것들이/뙤약볕에 마르는 날이 간다/끈적끈적한 것/비통한 것까지/함께 바싹 말라 가벼워지는 날 (‘해부극장 2’)

마르고 텅 비어가는 그 육체는 영혼과 떼려야 뗄 수 없는 동지(同志)이기에 결국 영혼도 부서지고, 돌이킬 수 없는 상실감과 균열의 느낌은 어김없이 찾아든다.

어느/늦은 저녁 나는/흰 공기에 담긴 밥에서/김이 피어 올라오는 것을 보고 있었다/그때 알았다/무엇인가 영원히 지나가버렸다고/지금도 영원히/지나가버리고 있다고/밥을 먹어야지//나는 밥을 먹었다 (‘어느 늦은 저녁 나는’)

그러나 시인은 이런 상실감과 슬픔에 앞도당하지 않고, 오히려 고통과 정면승부를 한다. 스스로에게 재우쳐 다짐하듯 뜨거운 열정으로 가득한 그 목소리는 어느 때보다 단오하다. 짐작건대 그가, 시집의 5부‘캄캄한 불빛의 집’에 실린, 대부분 시인의 20대에 쓰인 시들에서 목도할 수 있는 벅찬 숨결, 더운 핏줄, 열정적 사랑, 푸릇한 청춘의 시절을 통과해 왔기에 가능한 일일 것이다.

정면을 보며 발을 구를 것/발목이 흔들리거나, 부러지거나/리듬이 흩어지거나, 부스러지거나//얼굴은 정면을 향할 것/두 눈은 이글거릴 것/마주 볼 수 없는 걸 똑바로 쏘아볼 것/그러니까 태양 또는 죽음,/공포 또는 슬픔//그것을 이길 수만 있다면/심장에 바람을 넣고/미끄러질 것, 비스듬히 (‘거울 저편의 겨울 9―탱고 극장의 플라멩코’)

薄明 비껴 내리는 곳마다/빛나려 애쓰는 조각, 조각들//아아 첫 새벽,/밤새 씻기워 이제야 얼어붙은/늘 거기 눈뜬 슬픔,/슬픔에 바친다 내/생생한 혈관을, 고동 소리를 (‘첫 새벽’)

삶을 관통하는 불꽃같은 고통, 가슴 시린 한강 언어의 기원

이제 “얼음의 종이를 통과해/조용한 저녁이 흘러”(‘저녁의 소묘 3’)들 때, 어둠 속에서 건너가보는 꿈속에서, 거울 저편의 정오나 혹은 거울 밖 검푸른 자정에서 “동그랗게 뒷걸음질 치는”(‘심장이라는 사물’) 혀를 이용해 시인이 닿고자 하는 것은 순수한 언어, 삶의 본질, 고통과 절망 너머의 어떤 절실함과 회복의 풍경들이다.

내 안의 당신이 흐느낄 때/어떻게 해야 하는지/울부짖는 아이의 얼굴을 들여다보듯/짜디짠 거품 같은 눈물을 향해/괜찮아//왜 그래,가 아니라/괜찮아./이제 괜찮아. (‘괜찮아’)

이제/살아가는 일은 무엇일까/물으며 누워 있을 때/얼굴에/햇빛이 내렸다//빛이 지나갈 때까지/눈을 감고 있었다/가만히 (‘회복기의 노래’)

시집 <서랍에 저녁을 넣어 두었다>에는 침묵의 그림에 육박하기 위해 피 흘리는 언어들이 있다. 그리고 피 흘리는 언어의 심장을 뜨겁게 응시하며 영혼의 존재로서의 인간을 확인하려는 시인이 있다. 그는 침묵과 암흑의 세계로부터 빛나는 진실을 건져 올렸던 최초의 언어에 가닿고자 한다. 이 시집은 그간 한강 문학을 이야기할 때 언급돼 온 강렬한 이미지와 감각적인 문장들 너머에 자리한 어떤 내밀한 기원―성소에 한 발 가까이 다가가는 주춧돌 역할을 하게 될 것이다.

시인의 말

어떤 저녁은 투명했다.

(어떤 새벽이 그런 것처럼)

불꽃 속에

둥근 적막이 있었다.

2013년 11월

한강

뒤표지 산문

전철 4호선,

선바위역과 남태령역 사이에

전력 공급이 끊어지는 구간이 있다.

숫자를 세어 시간을 재보았다.

십이 초나 십삼 초.

그사이 객실 천장의 조명은 꺼지고

낮은 조도의 등들이 드문드문

비상전력으로 밝혀진다.

책을 계속 읽을 수 없을 만큼 어두워

나는 고개를 든다.

맞은편에 웅크려 앉은 사람들의 얼굴이 갑자기 파리해 보인다.

기대지 말라는 표지가 붙은 문에 기대선 청년은 위태로워 보인다.

어둡다.

우리가 이렇게 어두웠었나.

덜컹거리는 소리에 귀 기울이면

맹렬하던 전철의 속력이 서서히 줄어들고 있다.

가속도만으로 레일 위를 미끄러지고 있다.

확연히 느려졌다고 느낀 순간,

일제히 조명이 들어온다, 다시 맹렬하게 덜컹거린다. 갑자기 누구도

파리해 보이지 않는다.

무엇을

나는 건너온 것일까?

한강 1970년에 태어나 1993년 계간 <문학과사회> 겨울호에 시 ‘서울의 겨울’ 외 네 편이 실리고, 이듬해 <서울신문> 신춘문예에 단편소설 ‘붉은 닻’이 당선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소설집 <여수의 사랑> <내 여자의 열매> <노랑무늬영원>과 장편소설 <검은 사슴> <그대의 차가운 손> <채식주의자> <바람이 분다, 가라> <희랍어 시간> 등을 출간했다.

*위 글은 <문학과지성사> 홈페이지 시집 소개에서 전재했습니다.

 

등단 20년차 소설가 한강… 서랍 속에 넣어두었던 시들로 첫 시집 출간

“인생과의 육박전, 살아서 살아있음을 말하라”

소설가 한강씨(43)가 시집 <서랍에 저녁을 넣어 두었다>(문학과지성사)를 내놨다. 등단 20년 만의 첫 시집이다. 그동안 작가는 소설집 3권과 장편 5권을 출간하며 소설가로서 확고한 입지를 구축했지만, 공식적인 문필업의 시작은 1993년 계간 <문학과사회> 겨울호에 시 5편을 발표하면서였다.

시인은 1일 전화통화에서 “그동안 쓴 시 100편과 2년 전 그간 쌓인 시들을 정리해야겠다고 생각하고 나서 새로 쓴 시 20편을 합해 120편 중 60편을 골라 묶은 것”이라며 “문예지에 띄엄띄엄 발표한 10여편을 제외하면 미발표 시들”이라고 말했다.

시집은 모두 5부로 구성돼 있다. 5부에 실린 시들은 ‘저녁의 소묘 5’를 제외하고는 모두 20대에 쓴 것들이다. 그 다음은 3부, 1부, 2부 순으로 쓰였다. 4부는 올해 5월 무렵에 쓰인 시들이다. 등단하던 20대부터 지금까지의 궤적이 담긴 셈이다. 작가는 “긴 시기가 하나로 묶여지길 바라면서 시기적 편차에 따라 시들이 다르게 느껴지지 않도록 시집의 결을 골랐다”고 말했다. 그러니 이 시집을 읽는다는 것은 시적인 소설을 쓴다는 평가를 받아온 한강씨가 지난 20년 동안 관통해 온 마음의 풍경을 시라는 가장 밀도 높은 언어 형식을 통해 들여다보는 일에 가깝다.

시적 화자의 마음은 오랜 고통에 사로잡혀 있다. 그 고통의 기원이 무엇인지는 구체적으로 드러나지 않는다. 다만 삶의 어느 한 시기에 “내 영혼이 부서졌다는 걸 깨달았던 순간”(‘피 흐르는 눈 3’)이 있었으며 시적 화자가 여전히 “가장 처절하게 인생과 육박전을 벌이고 있다”(‘그때’)는 사실만은 분명하다.

시적 화자는 “피 흐르는 눈”(‘피 흐르는 눈’)을 가졌다. 그 눈으로 들여다본 마음의 심연은 엑스레이 사진처럼 해골만 남은 채 텅 비어 있다. “뻥 뚫린 비강과 동공이/ 곰곰이/ 내 얼굴을 마주 본다/ 혀도 입술도 없이/ 어떤 붉은 것, 더운 것도 없이”(‘해부극장 2’) 고통에서 빠져나왔다고 생각한 순간, 이전의 고통은 허깨비로 느껴질 정도의 새 고통이 엄습한다. “내가 가장 처절하게 인생과 육박전을 벌이고 있다/고 생각했을 때, 내가 헐떡이며 클린치한 것은 허깨/비였다”(‘그때’). 생각조차 고통일 때 언어는 점점 침묵과 닮아간다. “입술을 열었다가 나는/ 단단한 밀봉을 배운다”(‘저녁의 소묘 3’). 그러므로 생각도 고통도 없는 시체가 된다는 것, 하나의 사물이 된다는 것은 오히려 기막히게 좋은 일이다. “죽는다는 건//마침내 사물이 되는 기막힌 일//그게 왜 고통인 것인지//궁금했습니다”(‘심장이라는 사물’). 그럼에도, 살아야 한다. “너, 홀씨 흔들리는 꽃들 있었다/ 거기 피어 있었다/ 살아라, 살아서/ 살아 있음을 말하라”(‘유월’)

시집의 마지막 시인 ‘저녁의 소묘 5’에는 시적 화자가 나무를 향해 손을 뻗는 이미지가 나온다. 이 시에는 작가의 체험이 투명하게 반영돼 있다. “지난 5월 초였다. 봄이 많이 지났는데도 잎이 안 피는 까만 나무를 봤다. 죽은 나무라고 생각했는데 갑자기 잎이 피기 시작했다. 몇 달 지켜보다 시집 원고를 넘길 즈음 이 시를 썼다. 이 시집 전체에 고통도 있고 침묵도 있지만 시집의 끝은 죽음과 삶 사이에서 삶 쪽을 향해 가는 나무로 맺고 싶었다. 마침표를 찍듯 쓴 시다.” [경향신문 정원식 기자 2013.12.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