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 산책

추석 무렵 - 맹문재

라라와복래 2013. 9. 12. 11:09

추석 무렵

맹문재

흙냄새 나는 나의 사투리가 열무맛처럼 담백했다

잘 익은 호박 같은 빛깔을 내었고

벼 냄새처럼 새뜻했다

우시장에 모인 아버지들의 텁텁한 안부인사 같았고

돈이 든 지갑처럼 든든했다

빨래줄에 널린 빨래처럼 평안한 나의 사투리에는

혁대가 필요하지 않았다

호치키스로 철하지 않아도 되었고

일기예보에 귀 기울일 필요가 없었다

나의 사투리에서 흙냄새가 나던 날들의 추석 무렵

시내버스 운전사의 어깨가 넉넉했다

구멍가게의 할머니 얼굴이 사과처럼 밝았다

이발사의 가위질소리가 숭늉처럼 구수했다

신문대금 수금원의 눈빛이 착했다

 

‘처럼’으로 엮인 은유의 매듭이, 촌스럽기 그지없는 이 순박한 환유의 두름이 우리를 무장해제시킨다. ‘흙냄새 나는 사투리’가 불러들이는 것들은 무엇인가. 그 고향의 말은 어떻게 곰살스럽고 나긋해지고 있는가.

하늘은 청신하고 바람은 선량하다. 세상은 잘도 익어서 돈이 든 지갑처럼 든든하다. 그 맛은 담백하고 냄새는 새뜻하고 소리는 구수하다. 사람들 눈꼬리 입꼬리가 한결 순해져 바라보는 시선 또한 멀고 깊다. 그러니, “대출이자는 푯대처럼 저 멀리에서/ 다시 손짓하고 있”(‘이자를 향해 달린다’)더라도 잠시 접어두자. “아파트 관리비며 도시가스비며 전기세며 아이들 학원비를/ 구호를 외치며 납부”(‘착지점, 이자’)해야 하더라도 그것들도 잠시 묻어두자. 서울에서 나고 자란 사람들조차도 네온사인 불빛에서 고향을 느끼는 추석 무렵이라 하지 않는가. 수구초심의 무렵이라 하지 않는가.

우리들 추석 무렵 또한 보름달만 같기를, 그 달빛을 마음의 랜턴 삼아 남은 한 해 비출 수 있기를, 얄따란 돈지갑도 덩달아 두둥실 두둑해지기를,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이 시만 같기를!

정끝별 | 시인ㆍ문학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