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 산책

서정의 세계를 노래하는 시인 황동규

라라와복래 2013. 12. 5. 19:21

서정의 세계를 노래하는 시인 황동규

1958년 미당(未堂) 서정주의 추천으로 <현대문학>을 통해 등단한 시인 황동규. 이순(耳順)을 넘긴 나이에도 3년에 한 권꼴로 시집을 펴내며 젊은 시인 못지않은 부지런한 시작(詩作)을 이어가고 있다. 문인으로서의 운명에 감사하며 글쓰기에 대한 갈망으로 50년 넘는 세월을 올곧게 걸어온 시인. 오늘도 우리말을 정갈하게 빚어 문학의 새 길을 모색하는 시인 황동규의 삶과 마주해보자. *이 인터뷰의 시점은 2013년 12월입니다. 황동규 시인은 1938년생으로 올해(2018) 팔순(八旬)입니다.


Q. 선생님의 유년 시절이 궁금합니다. 어떤 환경에서 성장하셨나요?

1938년 평안남도 영유군 숙천이라는 곳에서 태어났습니다. 하지만, 제가 만 일곱 살이 되던 1946년에 가족이 모두 월남을 해서 북에서의 추억이 뚜렷하게 남아 있지는 않아요. 월남하던 때는 생생히 기억합니다. 우리 가족이 월남할 때만 해도 삼팔선이 완전히 통제가 됐을 때는 아니었어요. 달구지를 타고 남쪽으로 내려가는데, 소련군이 우리 가족이 타고 있던 달구지를 멈춰 세우더군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지요. 그런데, 하는 말이 참 재미있었습니다. 자기들이 축구시합을 하는데 인원이 부족하니 젊은 사람 몇 명만 축구시합의 인원수를 채워 달라는 요구였어요. 정말 축구시합이 끝나니 가던 길을 보내 주더군요. 그 정도로 1946년 초반까지는 삼팔선이 그렇게 험한 곳이 아니었어요.

월남 후 서울에 정착을 했고, 저는 덕수초등학교에 재입학을 했습니다. 아버님께서는 서울고등학교에서 교사 생활을 하셨어요. 덕분에 저희 가족은 교내 사택에서 살았죠. 서울고등학교가 당시는 경희궁 터에 있었어요. 터가 넓고 꽃과 나무가 무성하게 우거진 곳이었죠. 지금의 서울에서는 만나기 힘든, 아름다운 자연이에요. 대부분의 학교가 6천 평 정도라고 하면, 당시 서울고등학교는 3만 평 정도는 됐을 겁니다. 사택에서 살았지만 커다란 교정을 마당삼아 놀았고, 봄이 되면 친구들을 불러 학교 이곳저곳을 구경시켜주곤 했죠.

그러다 한국전쟁이 났고, 1951년 1․4후퇴 때 대구로 피난을 갔어요. 어려운 살림에 생활도 곤궁해졌습니다. 저는 살림을 도와야겠다는 생각에 신문팔이를 시작했어요. 그다음엔 동생을 데리고 좌판을 하며 껌, 담배, 초콜릿 같은 것을 팔았습니다. 경찰한테 좌판을 몇 번 걷어 차였던 기억이 나기도 해요. 그러다 다시 부산으로 피난을 갔는데, 그때 당시 부산 서면 근처에 미군 부대가 있었어요. 저는 엉터리 영어로 미군 부대에서 물건을 사서 남포동에 있는 상점에 갖다 팔아 돈을 조금씩 벌었어요. 그 돈을 집안 살림에 보태곤 했죠. 그 생활이 특별히 힘들다고 느껴지지는 않았습니다. 그때는 모두가 다 고생을 할 때였고, 저 역시 마찬가지였으니까요. 부산에서의 피난살이가 마냥 즐거운 추억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특별히 괴로운 추억이 된 것도 아니에요.


황동규 시인에게는 ‘소설가 황순원의 아들’이라는 수식어가 늘 따랐다. 인터뷰나 강연을 가면 아버지 황순원과 연관을 짓는 질문을 많이 받기도 했다. 그에게 아버지는 극복과 경쟁의 대상이었다. 음악이나 미술은 부자나 형제끼리 성공하는 사례가 많으나 문학은 다르다. 문학은 체험이 중요한데, 아버지와 아들은 체험을 공유하기 때문이다. 황 시인은 아버지에게 배운 것도 많지만 안 배우려고 노력하고, 달라야 한다고 노력했던 것이 오늘의 자신을 만들었다고 말한다.

Q. 부모님은 어떤 분이셨어요? 소설가였던 아버지께서는 문학을 하겠다는 아들의 뜻을 존중해 주셨나요?

아버님(소설가 황순원)은 문학밖에 모르시는 분이었고, 어머님은 생활력이 상당히 강한 분이셨습니다. 소설가의 아내였던 우리 어머님은 정말 고생을 많이 하셨어요. 궁핍한 생활 속에서도 아버님께서 작품 활동에 집중할 수 있도록 그야말로 그림자 내조를 펼치셨지요. 그래서인지 제가 문학을 하겠다고 했을 때 굉장히 반대하셨습니다. 아버지가 글 쓴다고 고생하는 것을 곁에서 다 보셨으니 아들만큼은 고생하지 않았으면 하셨던 거죠.

부모님께서는 제가 의과대학이나 법과대학을 가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때는 문․이과의 구분이 없었기 때문에 의대와 법대를 모두 진학할 수가 있었거든요. 어머니께서는 제가 법대나 의대에 응시하면 당시 돈 20만 환인가를 주겠다고 하실 정도였어요. 그런데 저는 문학을 하지 않는 삶은 매력이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하는 수 없이 반대가 약한 아버지를 공략해 문학을 하겠다는 허락을 받아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아버지께서는 제가 문학 쪽으로 나가는 데 대해 완강하게 반대하신 건 아니었어요. 물론 탐탁하게 생각하지도 않으셨죠. 아마 ‘나같이 고생하지 말고 잘살아라’ 하는 생각이셨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결국 아버지께서는 “후회하지 않을 일은 뭐든 해도 좋다”라고 말씀하셨죠. 물론, 속으로는 의사가 되기를 원하셨을지도 모르지만요. 그러고 보면 저도 상당히 반항한 셈입니다.

저희 아버님, 어머님은 상당히 차분한 성격이셨지만, 조부님은 그 연세의 어른치고 굉장히 깬 분이셨어요. “제사를 너무 엄격하게 지내서 나라가 이 지경이 됐다”고 하시면서 아버지 3형제를 밖에 세워 두고 혼자 제사를 지내실 정도였으니까요. “너희들까지 있을 필요 없다”고 하시면서요. 저희 조부님으로 말씀드릴 것 같으면 독립운동을 하시다가 1년 6개월 동안 감옥살이를 하셨던 분이셨어요. 평양에서 활동하셨던 대표적 독립투사이셨다고 들었습니다. 대단하신 분이시죠. 대학에 입학한 후에도 술과 담배는 어른에게 배워야 한다며 저를 불러 앉히시고는 직접 가르치셨어요. 어떻게 보면 조금은 과격하셨고, 그러면서도 굉장히 분명한 분이셨죠. 제 성격에도 그런 면이 있습니다. 아마 조부님의 영향을 받은 거겠죠.

Q. 문학에 대한 소질은 언제 발견하신 거예요?

초등학교에 입학하기 얼마 전, 아버님께서 원고지 뒷면에 ‘가갸거겨’부터 한글을 정서하셔서 저에게 주시면서 외우게 하셨어요. 당시는 일제강점기여서 학교나 관공서에서는 우리말을 입에 대지도 못하게 했을 때였는데도, 아버님은 일본 가나보다 한글 가갸거겨를 먼저 가르치셨습니다. 내용을 이해하지는 못했지만 성경책을 읽을 정도가 됐으니 우리말을 아주 일찍 배운 셈이죠.

그렇게 글을 일찍 배워서인지 책도 자연스럽게 빨리 접하게 됐습니다. 아버님 덕분에 집에 책이 많았거든요. 초등학교 3학년 때 소년잡지를 읽었고, 방정환 선생님이 만든 <소파 동화집>이며 박태원 선생이 번역한 <삼국지>, 벽초 홍명희 선생의 <임꺽정> 등을 읽었어요. 하지만, 그때부터 ‘앞으로 문학을 하며 살겠다’고 결심했던 건 아닙니다. 고등학교 2학년 때는 작곡가가 되려고 생각했으니까요.

1950년대 서울 풍경을 아는 사람은 이해할 겁니다. 부산에서 서울에 올라오니 서울이 완전히 폐허가 되어 있더군요. 이집트나 희랍처럼 장엄한 폐허가 아니라, 말 그대로 폐허였죠. 명동에 나가면 시공관(市公館)과 명동성당만 남아 있었어요. 건물 안으로 들어가 보면 전부 인간의 분뇨로 가득했죠. 그래서 시각적인 즐거움을 맛볼 수 없었습니다. 오히려 당시 명동에 있던 ‘르네상스’나 인사동의 ‘돌체’ 등과 같은 음악다방 혹은 음악실에서 맛보는 청각적 즐거움이 대단했어요. 저는 청각적인 즐거움이라도 얻어보려고 음악에 몰두했습니다. 학교가 끝나면 음악다방에 가서 음악을 들었고, 그러다 작곡을 해야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 한 1년 정도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었어요.

그러던 어느 날, 친구와 함께 베토벤 음악을 듣고 휘파람으로 불었어요. 친구는 음을 정확하게 소리 내 부는데 저는 정확하게 불지를 못했습니다. 제가 아주 약간 발성 음치였거든요. 작곡가가 되는 데 발성 음치가 큰 문제가 되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그 당시에는 몰랐던 거죠. 조금 과장되게 표현하자면, 눈물을 머금고 작곡가가 되길 포기했습니다. 그래서 음악과 가장 비슷한 시를 선택한 거예요.

Q. 그 시절 주로 어떤 책들을 읽으셨는지 궁금합니다.

제가 처음 읽은 서양 소설은 박목월 선생이 번역한 앙드레 지드의 <좁은 문>이었어요. 제가 문학을 시작할 때만 해도 우리나라에는 번역된 외국 문학작품이 거의 없었습니다. 대부분 일본어로 번역된 책을 중역한 경우가 많았죠. 그러니 제대로 된 세계문학이 없어서 못 읽는 형편이었어요. 외국어를 하지 않고는 세계문학 작품을 접할 수 없었던 겁니다.

좋은 문학을 읽으려면 외국어를 알아야겠다 싶어 영어를 공부했어요. 시인으로는 랭보를 좋아했고, 도스토옙스키에도 심취해 <악령>,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등 그의 전집을 거의 다 읽었을 정도였습니다. 물론, 엉터리 영어로 읽은 거겠죠. 한국 작가들 중에서는 김소월을 특히 좋아했습니다. 김소월은 천재이기도 하지만 그의 시는 우리 정서의 결정체입니다. 김소월의 시는 내용을 모르고 읽어도 금방 좋다는 걸 느낄 겁니다.

Q. 전공으로 국문학이 아닌 영문학을 선택하셨습니다. 특별한 이유가 있으셨나요?

외국어를 하지 않고는 세계문학을 접할 수 없었습니다. 영문학을 선택한 것도 영어를 통해 세계문학을 읽어봐야겠다는 이유에서였죠. 아마 지금 제가 대학에 입학한다면 국문과를 선택할지도 모릅니다. 지금은 세계문학 작품들이 번역이 잘 되어 있으니까요. 지금은 번역된 작품만으로도 세계문학에 대한 깊이와 넓이를 가질 수 있지요. 그리고 영어 외에 다른 외국어에는 자신이 없었습니다. 제 독일어 실력으로 외국 작품을 읽는다는 것은 어림없는 생각이었지요. 그렇게 영문과에 입학할 때만 해도 영어를 통해 세계문학을 읽겠다는 것이었지, 영문학 자체를 공부하겠다는 생각은 별로 없었습니다. 당연히 영문과 선생이 될 거라는 생각도 하지 못했어요. 물론, 나중에 영문학에 정을 붙이니 좋은 문학이라고 여기게 되더군요.

대학교 3학년 때부터 영문학 책을 읽고, 셰익스피어의 작품도 읽었습니다. 석사 학위 논문도 <햄릿>을 대상으로 썼고, 후에 영국 에든버러 대학에서는 <멕베스>를 대상으로 논문을 썼습니다. 그때는 셰익스피어에 반해 있었죠. 셰익스피어의 작품은 공부하면 할수록 매력이 넘치고 재미가 있어요. 작품 속 인물들이 독립적으로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 잘 가르쳐주는 게 바로 셰익스피어 작품입니다. 그의 비극에는 내세관이 있는데도 인간 위주로 묘사하고 있어요. 어쩌면 인간적으로 살다 죽겠다는 것이 비극이죠. 그게 바로 셰익스피어 작품의 아름다움입니다. 영문학을 했다는 것이 저로서는 참 다행스럽습니다. 영국과 미국을 망라한 문학을 배우다보니 참 다채로웠습니다. 낭만주의 시대에는 영국 시가 최고이고, 그다음 20세기에는 미국 시가 제일 풍부합니다. 엘리엇, 에즈라 파운드 등의 작품들이 대표적이죠. 매우 다양하고 폭이 넓습니다.

Q. 고교 시절 쓴 시 ‘즐거운 편지’로 등단하셨습니다. 어떤 계기로 쓰여진 시인지 궁금합니다.

대학교 2학년 때 미당 서정주 선생께서 ‘시월’, ‘동백나무’, ‘즐거운 편지’를 차례로 추천해 문단에 등단했습니다. 그중 대중들이 가장 많이 알고 있는 ‘즐거운 편지’는 고등학교 졸업 때 나눠준 교지에 실린 작품입니다. 짝사랑하던 연상의 여인을 대상으로 썼죠.

제가 이 시를 쓸 때 물려받은 연애시의 전통은 김소월의 ‘진달래꽃’과 한용운의 ‘님의 침묵’이었습니다.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말없이 고이 보내 드리오리다// 영변의 약산 진달래꽃…” 이 시를 보면 애인은 화자를 버리고 떠나고 화자는 뒤에 남아 있습니다. 그리고 자기의 사랑을 생각해서 “말없이 고이 보내 드리오리다” 하고 바라지요. 고려가요 ‘가시리’에 깃들인 “가시난 닷 도셔 오쇼셔(가시는 즉시 돌아오십시오)”가 제가 이 시를 쓰기 전까지 이어진 연애시의 전통적 정서입니다. “내 기다림은 끝났다”라고 노래하지만, 결국 저세상에 가서라도 기다릴 테니 “가시난 닷 도셔 오쇼셔”라고 바라는 것이지요. 한용운의 ‘님의 침묵’도 마찬가지예요. “아, 님은 갔습니다. 그러나 나는 님을 보내지 않았습니다”라는 노래는 돌아오라는 얘기지요.

그분들의 애정시는 ‘사랑은 영원하리라’에서 비롯된 겁니다. 그런데 6․25 사변을 겪고 난 상황을 보니까 ‘사랑은 영원하다’는 생각이 설 자리가 없더군요. 제가 ‘즐거운 편지’를 쓸 무렵은 환도(還都)해서 몇 년 되지 않은 삭막한 때였고, 프랑스에서 건너온 사르트르류의 실존주의가 유행하던 때였습니다. 물론, 저는 고등학생이었기에 실존주의를 잘 이해하지 못했습니다만, 실존주의적인 분위기만은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본질적으로 결정된 사랑은 없다’라는 생각을 하게 된 겁니다. 사랑도 늘 새롭게 만들어 가야 하는 것이고, 늘 선택을 해야 되는 것이라는 생각이 ‘즐거운 편지’ 속에 들어가 있어요.

이건 그때까지 우리나라에 없던 연애시입니다. 남녀가 일생 동안 서로 사랑할 수 있죠. 하지만 그 사랑은 늘 새롭게 만들어 가야 하는 것이지 한번 주어진 사랑의 본질 때문에 일생을 가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이게 ‘즐거운 편지’의 초점입니다. 첫 마디는 역설이고 반어법이지만, 넓은 의미에서 볼 때 “가시난 닷 도셔 오쇼셔”에서 멀지 않습니다. 그런데 둘째 마디에 가서 “내 사랑도 어디쯤에선 반드시 그칠 것을 믿는다. 다만 그때 내 기다림의 자세를 생각하는 것뿐이다”라는 깨달음이 나타납니다. 자신의 사랑이 끝났다고 해서 세상이 끝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우리의 사랑도 언젠가 끝날 수 있다는 조건 속에서 사랑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이야기하고자 한 겁니다.

제 짝사랑의 대상이었던 여인은 ‘즐거운 편지’를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여자 입장에서는 사랑이 영원하다고 해야 좋아하겠죠. “내 사랑도 어디쯤에선 반드시 그칠 것을 믿는다”고 하는 걸 좋아할 리가 있나요? 그분 여동생이 제 초등학교 동창입니다. 시간이 많이 흐른 뒤, 셋이 만나 저녁을 먹을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때 이야기하더군요. “처음에 그 시를 읽었을 때는 싫었는데, 계속 읽어보니 나중에는 좋더라”고요.

즐거운 편지

1.

내 그대를 생각함은 항상 그대가 앉아 있는 배경에서 해가 지고 바람이 부는 일처럼 사소한 일일 것이나 언젠가 그대가 한없이 괴로움 속을 헤매일 때에 오랫동안 전해 오던 그 사소함으로 그대를 불러보리라.

2.

진실로 진실로 내가 그대를 사랑하는 까닭은 내 나의 사랑을 한없이 잇닿은 그 기다림으로 바꾸어버린 데 있었다. 밤이 들면서 골짜기엔 눈이 퍼붓기 시작했다. 내 사랑도 어디쯤에선 반드시 그칠 것을 믿는다. 다만 그때 내 기다림의 자세를 생각하는 것뿐이다. 그 동안에 눈이 그치고 꽃이 피어나고 낙엽이 떨어지고 또 눈이 퍼붓고 할 것을 믿는다.

시인의 작품 가운데 대중적으로 가장 널리 알려진 ‘즐거운 편지’는 고교 시절 짝사랑의 대상이었던 연상의 여인을 두고 쓴 것이었다. 이 작품은 김소월, 한용운으로부터 이어지는 연애시의 전통적 정서를 반영하면서도 “내 사랑도 어디쯤에선 반드시 그칠 것을 믿는다”라는 구절로 사랑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시도해 신선한 충격을 가져왔다.

Q. 영국 에든버러 대학교로 유학을 떠나셨습니다. 당시의 외국 유학이 선생님께 어떤 경험으로 남았는지요?

앞서도 얘기했지만, 저는 스스로 영문과 교수가 되겠다는 생각은 하지 못했습니다. 제가 대학교를 다닐 때는 나라 경제 사정이 굉장히 어려웠거든요. 저는 당시 고등학교 선생님으로 밥벌이를 하면서 문학을 해야겠다고 생각했었지요. 그리고 실제 대학 졸업 후 서울 금란여고 교사를 한 학기 정도 했습니다. 그런데 우리 경제 규모가 갑자기 커지면서 대학교수가 된 셈이죠. 대학교수가 되었지만 제 목표는 문학이었습니다. 그런 면에서 영국에서의 유학 생활은 저에게 많은 충격을 주었습니다. 외국에 나가 보니 우리나라가 처한 현실이 정말 참담하게 다가오더군요. 우리나라는 정말 가진 게 없는 나라라는 것을 깨닫게 됐습니다. 학업적으로는 시험공부 하랴, 페이퍼 쓰느라 정말 바쁘게 지냈습니다. 그런데 학업적으로 영향을 받은 것보다, 다양한 서구 문화를 접한 것이 제 의식을 깨는 데 상당히 도움이 되었습니다.

로마 바티칸 시스티나 성당 전면을 채운 미켈란젤로의 벽화 <최후의 심판>을 보았던 때가 생각납니다. 그림을 마주하던 순간, 저를 압도하던 그 느낌을 잊을 수 없어요. 예수의 오른편에 서서 영생을 누릴 예수의 제자와 순교자들이 심판을 거부하는 얼굴들을 하고 둘러서 있는 그림입니다. 십자가에 매달리든가 피부가 벗겨진 채 순교한, 다시 말해 인간으로서 최악의 고통을 겪고 의를 위해 기꺼이 목숨을 바친 이들은 구원이나 영생에 도대체 관심이 없는 것이죠. 오히려 최후의 심판을 인간으로서 거부하는 얼굴과 자세로 서 있는 것입니다. 시스티나 성당에서 그 그림을 마주했을 때 몇 분 동안 얼어붙어 있었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제가 그 나이에 갔기 때문에 제가 충격적으로 받아들이고 깊이 생각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너무 어린 나이에 가거나, 혹은 늦은 나이에 가면 그만큼의 감수성을 갖고 보지 못했겠죠.

Q. 1970, 80년대는 학생운동이 대학가를 지배하다시피 했었습니다. 선생님께서는 그러한 현상을 어떻게 바라보셨나요?

영국에서 돌아온 후 서울대학교 교양과정 부교수가 됐을 때 박정희 정권과 그에 반대하는 사람들, 특히 대학생 사이의 투쟁을 맞게 됐어요. 물론 저도 사회 비판 의식을 갖게 되었죠. 하지만, 선생으로서는 학생들이 잡혀가 잘못되면 당연히 마음이 좋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당시 학생운동권의 필독서에 제 시집 <삼남(三南)에 내리는 눈>이 올라 있었습니다. 운동권 학생들이 제 시를 많이 읽었다는 이야기를 듣곤 했죠. 그래서 이를 두고 동료 선생님들이 “황 교수가 배후 조종자가 아니냐”며 놀리곤 했습니다.

황동규 시인은 한국의 대표적인 서정시인이다. 그는 서정시의 요건에 대해 “시인과 시적 자아 사이에 대화가 있어야 된다”고 말한다. 그래서 황 시인은 시를 쓴다는 말 대신 시와 만난다고 한다. 황 시인에게 이 시적 자아는 가장 무서운 독자이기도 하다.

Q. 한국 현대 서정시의 대표주자로 꼽히십니다. 서정시의 가장 중요한 요소는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나요?

서정시에서는 시인과 시적 자아 사이의 대화가 있어야 합니다. 우리나라 시 중에서 좋은 시는 다 그렇습니다. 달리 이야기하면, 저하고 시하고 대화를 한 셈이죠. 그래서 저는 시를 쓴다는 말 대신 시와 만난다고 합니다. 시한테 배우는 게 많습니다. 시는 나보다 더 높은 삶을 요구하니까요. 오히려 시가 나를 쓰고 있는 겁니다.

저는 눈에 모기가 날아다니는 것 같은 비문증(飛蚊症)이 있습니다. 눈물이 나올 만큼 눈을 감았다 떠도 모기가 안 없어지더군요. 괴로웠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벼락같이 시가 저한테 얘기했습니다. “날면 어때!”라고요. 그다음부터 시야에서 모기가 날 때마다 시가 저한테 얘기했던 걸 생각했더니 증상이 서서히 없어지더라고요. 물론 완쾌한 건 아닙니다. 시가 저를 고쳐준 거죠. 그래서 시를 쓴다는 말 대신 시와 만난다고 합니다. 제가 시를 쓰는 게 아니라 시가 저를 쓰고 있는 거예요. ‘모기 그까짓 게 날건 말건 사는 데 치명적이지 않다’라고 시가 저를 타이른 것이지요.

시와 대화를 하게 되면 이렇게 재미난 일도 있고, 때론 슬픈 때도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시적 자아를 의식합니다. 어떻게 보면, 제 마음에 가지고 있는 첫 번째 독자가 ‘시적 자아’인 셈이죠. 이따금 제가 당하기도 합니다. ‘이따위로 써!’ 하고요. 하는 수 없죠. 저에게는 시적 자아가 가장 무서운 독자입니다.

Q. 최근 <사는 기쁨>이라는 시집을 내셨습니다. 이번 시집에서 담고자 했던 것은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보통 시집을 3년 터울로 내는데, 이번 시집은 4년 만에 냈습니다. 4년 동안 공들인 결과죠. 나이가 들고 기가 떨어져 준비 기간이 오래 걸린 것일 수도 있지만, 그만큼 전력투구했다고 자부합니다. 이번 시집을 읽어본 시인들은 이전 시집보다 ‘젊은 시’라고 평하더군요. 저로서는 있는 힘을 다해 썼어요.

느낌과 상상력을 비우고 마감하라는 삶의 끄트머리가

어찌 사납지 않으랴!

예찬이여, 아픔과 그리움을 부려놓는 게 신선의 길이라면

그 길에 한참 못 미치는

아이들의 웃음소리 간간이 들리는 곳에서 말을 더듬는다.

벗어나려다 벗어나려다 못 벗어난

벌레 문 자국같이 조그맣고 가려운 이 사는 기쁨

용서하시게 ―‘사는 기쁨’ 중에서

이 시가 이번 시집에서 가장 중요한 작품입니다. 삶이 기쁘지만은 않잖아요. 저는 신선처럼 살고 싶었습니다. 신선이 살 만한 곳으로 떠나고 싶었지만, 저에게 ‘상상력도 버리고 오라’고 하는 것 같아 안 갔습니다. ‘사는 기쁨’도 그래서 썼죠. 고통 속에서 삶의 찬가를 부른 겁니다. 신선이 되질 못하니까요. 이따금 아이들이 꺄르르르 하며 웃는 소리를 듣지 않습니까? 그것도 삶의 기쁨인 거죠. 서정주 선생도 노년에 신선이 되겠다고 하셨어요. 인간도 예술도 넘어서서 그 이상의 경지를 바라셨죠.

전 그 반대 입장입니다. 어떤 것도 인간을 넘어서서 이루는 건 의미가 없어요. 인간이 유한하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그 속에서 아름다움을 찾는 겁니다. 그래서인지 저는 죽음에 대한 공포가 없어요. 오래 살겠다는 생각도 없고요. 그래서 아내와 아이들한테 무슨 일이 생겨도 생명유지보조장치는 절대로 달지 말라고 다짐을 받아놨죠. 아마 연작시 ‘풍장(風葬)’을 쓰면서 ‘죽음’에 대한 생각이 많이 바뀐 것 같아요. 그 후로 ‘끝’과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버린 거죠. 죽음에 대한 훈련을 했다고 할까요?

제가 처음 작곡가가 되려고 했을 때 베토벤이 56년 3개월쯤 살았으니, 저는 그보다 10년만 더 살았으면 하는 바람이 있었어요. 이제 그 바람을 한참 넘어섰으니, 지금 사는 것은 덤이라고 생각합니다. 덤으로 사니 죽음에 대해 생각을 안 하는 거죠. 기억력도 줄고 몸의 기능도 하나씩 허약해지지만 상상력은 줄지 않았다고 자부합니다. 이번 시집이 마지막이라 생각했는데, 원고와 해설을 넘기고 두 달 정도가 지나고 나니까 또 새로운 스타일의 시가 나오더군요. 시집 한 권쯤은 더 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Q. 음악 감상과 여행을 특히 좋아하신다고 들었습니다. 음악과 여행에 대한 선생님의 생각이 궁금합니다.

작곡가가 꿈이었으니 음악을 자주 들었고, 여행을 워낙 좋아해서 여행도 많이 다녔어요. 여행은 자기 일상에서 벗어나는 기회를 줍니다. 즐겁죠. 하지만, 시를 쓰는 것은 고통을 많이 주지 않습니까. 그래서 저는 시를 쓰기 위해 여행을 한 적은 한 번도 없습니다. 그러면 여행의 재미가 없어지기 때문이에요. 고통을 위해 기쁨을 찾겠습니까? 여행은 여행이고 시는 시일 뿐입니다. 여행 자체를 즐기다보면 여행의 체험이 시 속에 들어오는 거죠. 자기가 사는 곳을 떠나 새로운 풍물을 보고,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것. 얼마나 좋습니까?

작곡가가 되기를 포기했지만 저는 그림을 볼 때도, 시를 쓸 때도 음악을 느낍니다. 시를 쓸 때 어떤 연은 알레그로, 어떤 연은 안단테로 하죠. 한때 작곡가가 되려고 했던 생각이 잠재의식 속에 남아서 그런지도 모르겠습니다. 지금도 글을 쓸 때는 음악을 틀어 놓는 경우가 많아요. 어떻게 보면 음악은 인간이 향유할 수 있는 미(美) 가운데 가장 정제된 것입니다. 음악이야말로 내용을 파악하기 이전에 향유할 수 있는 예술이죠. 물론, 가장 정제됐다고 해서 가장 위대한 예술 장르라는 말은 아닙니다. 요즘 젊은 사람들을 보면 음악에 미치지 않습니까? 영향력이 대단해요. 미술 작품을 보고 그렇게 미치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겁니다. 어떻게 하면 문학을 그 경지로 끌고 갈 수 있을까. 그게 제가 바라고 고민하는 바입니다.


황동규 시인에게 시는 호기심의 다른 말이다. 주변에서 그의 시가 젊다고 말하는 건, 아직 호기심이 줄지 않았다는 말로 받아들인다. 시인은 호기심을 잃지 않으면 아직 늙지 않은 것이라고 강조한다.

Q. 작품 활동을 꾸준히 하고 계십니다. 글을 이끌어가는 힘은 어디에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시나요?

호기심이죠. 주변에서 제 시가 젊다고 말하는 건, 제가 아직 호기심을 줄이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저는 지금도 이따금 흥미 있는 책을 만나면 밤늦게까지 읽습니다. 밤에 잠이 깨 시상이 떠오르면 일어나 앉아 컴퓨터 자판을 두드리고요. 글을 쓰게 하는 원동력은 호기심입니다. 호기심을 잃지 않으면 아직 늙지 않은 겁니다.

자신 있게 이야기할 수 있어요. 그냥 남들이 사는 것처럼 살다 죽겠다고 하는 사람이 아니라면 호기심이 꼭 필요합니다. 과학자든, 정치가든, 예술가든 창조를 이끄는 건 호기심입니다. 태양 아래 새로운 건 하나도 없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러나 인생이 똑같은 사람이 없듯, 모든 존재는 다 다르죠. 그리고 또 새로운 존재가 태어나기도 합니다.

그 새로운 존재 혹은 다른 존재들을 형상화시켜 의미를 부여하는 게 창조입니다. 창조라는 게 없는 데서 만들어지는 게 아니에요. 있는 데에서 조금 다르고, 조금 새로운 것, 거기에 형상화를 시켜 의미를 주는 거죠. 관념을 형상화하고, 사물에 의미를 부여하고 정제해 틀을 만드는 데에는 왕도가 없습니다. 어떤 사람은 남과 다르게 생각을 해서 나오기도 할 것이고, 어떤 사람은 문학을 깊이 연구해서 얻어낼 수도 있겠죠. 그건 주어진 조건에 따라 다를 거고, 사람의 성품에 따라 다를 것이며, 주변 환경에 따라 다를 겁니다. 한 가지를 깊이 있게 파고들어 끊임없이 고민하면 다른 것과도 통하게 되어 있습니다.

Q. 한국 문단을 이끌어갈 젊은 작가들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요즘 젊은 작가들의 작품에 서사가 부족하다는 지적이 있습니다. 서사가 부족한 건 자기 삶에 그만큼 밀착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삶이라는 것은 문학의 원천입니다. 그래서 삶을 제대로 보고 ‘다른 사람은 어떻게 사는가?’, ‘어떻게 즐거움을 얻는가?’를 관찰해야 합니다. 자신이 성공할 생각만 하고, 정치에 정신없이 참여하면 서사가 없어지게 됩니다.

요즘은 무슨 일을 해도 정치로 환원될 수 있는 때입니다. 그럴 때일수록 예술가는 자신의 예술을 보호할 의무가 있습니다. 예술에 참여할 권리만 있는 게 아니라 자신의 예술, 자신의 문학을 보호할 의무도 있는 겁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예술가들이 정치에 참여하는 것을 반대하지는 않습니다. 그것이 권리이고, 자기의 의식을 표현하는 것도 좋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예술가로서의 의무도 지켰으면 좋겠습니다. 문학을 지키는, 예술을 지키는 의무와 권리는 함께 있어야죠.


30년이 넘는 세월 동안 교수 생활을 한 황동규 시인은 교육의 요체는 ‘사람을 만드는 일’이라 말한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 진실을 외면하지 말라고 강조하는 그는 학생들이 경제적 빈곤과 외로움을 두려워하지 말고 자부심을 갖고 자신의 길을 걸어가길 바란다고 전한다.

Q. 요즘 젊은이들에게 해주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면요?

책을 많이 읽었으면 좋겠습니다. 책을 읽되 자기 입맛에 맞는 책만 골라서 읽는 게 아니라, 입맛에 맞지 않는 책도 노력해서 읽으라고 말해주고 싶습니다. 문장이 거칠고, 내용이 어려운 책일지라도 읽어야 합니다. 읽고 싶은 책만, 쉬운 책만 읽는 건 독서가 아니에요. 책을 읽는 것을 즐기되, 이따금 읽기 힘든 책도 읽을 것. 그것이 제가 젊은 사람들에게 당부하고 싶은 유일한 것입니다.

Q. 문인으로 살아오신 삶에 만족하시나요?

문학은 고생한 것에 비해 얻는 게 너무 적습니다. 모든 학문 가운데에서 보답이 가장 적은 게 문학인 것 같아요. 하지만, 보답이 가장 적을지라도 제가 문학을 한 것을 후회하지는 않습니다. 후회를 한다면, ‘내가 이 작품에 전력투구를 했는가, 못했는가’에 단서가 있습니다. 전력투구를 했으면 후회가 없고, 그렇지 못했으면 후회를 하는 거죠. 황동규에게 문학이 없으면 황동규가 별 볼일 없는 존재가 되는 겁니다. 그래서 저는 문인으로 살아온 삶을 후회하지 않습니다.

Q. 마지막으로 우리 시대에 어떤 인물로 기억되고 싶으신가요?

누가 뭐라고 해도 자기 자신의 길을 꿋꿋하게 걸어간 사람. 저는 단순한 노동을 하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자신의 길을 꿋꿋하게 걸어간 사람을 존경합니다. ‘황동규는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평생 동안 최선을 다해 열심히 한 사람이다’라고 기억해줬으면 좋겠습니다.

사진 앨범


김현을 추억하며 황동규 시인에게 가장 기억에 남는 친구는 단연 김현(작고, 문학평론가)이다. 김현 선생은 같은 대학의 교수 동료이자 황 시인이 자주 나갔던 <문학과 지성사>에도 같이 출입했고, 사는 동네도 같아 자주 어울리는 친구였다. 1년에 두어 번씩 여행도 함께 떠났던 사이인 김현 선생은 황 시인의 삶의 페이지에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됐다. 목포문학관 김현 선생 흉상 앞에서 찍은 사진으로, 둘째 줄 왼쪽에서 다섯 번째가 황동규 시인이다.


서정의 기본은 사랑이다 ‘사랑이 서정의 기본’이라 말하는 황동규 시인. 그는 대학원 재학 시절 만난 아내와 결혼했다. 영문과 교수인 황 시인의 아내는 평생을 시인이자 교육자로 살아온 남편을 뒷바라지하며 묵묵히 그의 삶을 응원했다. 한국문학상 수상식 당시 아내 고정자 교수와 함께 찍은 사진.


이산문학상 수상식에서 황 시인은 문학을 하기 위해서는 음악과 미술 등에서 요구되는 감성과, 철학 등 인문학에 필수적인 냉철한 지성을 모두 겸비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김명인 시인의 이산문학상 수상식에 심사위원으로 참석했을 당시 찍은 사진으로, 가장 왼쪽이 황동규 시인, 차례로 당시 운영위원장인 정명환 교수, 김명인 시인, 심사위원인 오생근 교수다.


그의 여행은 시가 된다 여행을 좋아하는 황 시인은 대학생 시절부터 장학금을 받고 과외교사 일을 하며 여비를 모아 여행을 떠났다. 일상을 벗어나 여행지에서 그의 눈에 들어온 사람과 사물, 풍경은 쓰고 지우고 다시 쓰는 과정을 통해 시가 되었다. 2006년 중국 절강성에서, 왼쪽부터 평론가 홍정선, 황동규 시인, 소설가 임철우. 


2007년 일본 벳부 온천에서 오현 스님과 함께  황동규 시인은 여건만 되면 여행을 떠난다. 여행 자체를 즐기다 보면 여행의 체험이 시 속에 들어오기도 한다.

글쓰기를 게을리하지 않는 시인 하루 연습하지 않으면 자기가 알고, 이틀 연습하지 않으면 동료가 알고, 사흘을 연습하지 않으면 청중이 안다고 말하는 황 시인. 그는 글을 쓰기로 마음먹은 그날부터 쓰는 것을 멈추지 않고 있다.


글쓰기의 고통을 달래주는 동료들 황동규 시인은 일주일에 한 번 사당동과 인근에 사는 동료 문인들과 이른바 ‘사당동패’라는 모임을 갖는다. 모임은 참석하는 이들에게 글 쓰는 고통과 외로움을 서로 삭여주고 다듬어주는 시간이 된다. 불영계곡에서 찍은 사진. 왼쪽부터 사당동패 김윤배 시인, 김명인 시인, 이숭원 평론가, 황동규 시인, 홍신선 시인이다


내소사 지장암의 일지 스님과 함께 2009년 전북 부안의 내소사 지장암의 일지 스님과 함께 찍은 사진. 일지 스님은 황동규 시인의 오랜 친구로 2009년 발표한 ‘토막잠’이란 작품에도 등장한다. 황 시인은 시에서 “지장암 가득 꽃을 피우고 사는/ 아름답고 꼿꼿한 비구니 일지스님 곁에 이름 모를 꽃 하나/ 하도 예쁘게 피어 있길래/ "참 환장하게 곱네요." 하니,/ "파 가세요!”/ 라고 적었다. 시인은 일지 스님을 “참 좋은 스님”이라고 소개했다.

시인 황동규 1938년 평안남도 숙천에서 태어났다. 해방 이후 월남했고 한국전쟁 때는 대구와 부산에서 피난살이를 경험했다. 유명한 문인을 아버지로 둔 덕에 좋은 점도 많았지만, 늘 그분의 명성에 누를 끼치지 않기 위해, 그분과 다르기 위해 노력했다. 의대나 법대를 진학하기를 희망하신 부모님과는 달리, 문학이 좋았던 시인은 제대로 된 세계문학을 접해야겠다는 생각에 영문과로 진학해 영문학의 참맛을 깨우치게 된다. 고교 시절 쓴 ‘즐거운 편지’로 대학교 2학년 때 미당 서정주 시인의 추천으로 문단에 등단, 이후 한국 서정시를 대표하는 시인으로 우뚝 섰다. 시는 시인과 시적 자아 사이의 대화라고 생각하여 ‘시를 쓴다’는 표현 대신 ‘시와 만난다’고 말하는 시인. 적지 않은 나이에도 왕성한 창작욕으로 3, 4년에 한 권씩 시집을 내는 그는 글을 쓰게 만드는 원동력을 호기심에서 찾는다. 창조를 이끄는 호기심을 줄이지 않는 시인, 문학의 원천을 삶 그 자체에서 찾는 시인의 바람은 문인으로서 평생 최선을 다해 열심히 한 사람으로 기억되는 것이다.

출처 : 네이버캐스트 인물>문학인>한국문학인 2013.1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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