슐리만의 신화: 영웅인가 사기꾼인가?
그리스-로마 신화와 거기에 등장하는 신과 영웅들의 이야기를 다룬 책들은 많은 사람들이 어렸을 때부터 접하게 되는 고전 중 하나이다. 특히 요즘은 콘텐츠의 다양화로 글자로 된 책뿐 아니라 만화책, 애니메이션, 게임, 영화 등으로 더 손쉽게 사람들이 신화의 내용을 접할 수 있게 되었다. 특히 아이들은 글자로 된 지루한 책의 내용이 아닌 더 쉽고 생생한 시각적 이미지로 이 고전을 접하고 있다. 그렇다면 부모님들이 아이들에게 흔히 꿈과 희망, 창의력을 키우게 하기 위해 읽히는 책들 중 하나인 고대 그리스의 신과 영웅들의 이야기를 통해 요즘 아이들은 정말로 어떠한 꿈을 꾸고 있을까? 아이들은 이 신화와 이야기들을 읽고 보며 어떠한 생각을 하고 있을까?
여기, 지금으로부터 약 140년 전에 고대 그리스의 시인인 호메로스의 <일리아스>에 매혹되어 신화를 현실로 끌어 올린 인물이 있다. 어렸을 때 아버지가 사준 책에 나온 트로이 전쟁 이야기를 읽고 그것을 믿어버린, 그래서 트로이를 발굴하고자 했던 하인리히 슐리만이 그 주인공이다. 단 한 페이지의 흑백의 그림이 그의 인생을 송두리째 사로잡아 그는 마침내 ‘잃어버린 세계’를 발견했다.
지금까지도 사람들은 흔히 슐리만을 전설 속의 트로이를 발굴했다고 알고 있다. 그는 그 사실로 세계적으로 유명해진 인물이며, 실제로도 고고학적으로 매우 중요한 고대 도시들을 발굴했다. 하지만 슐리만은 유명한 만큼 논란과 비난의 대상이기도 하다. “과학적 고고학의 아버지”, “새로운 학문의 선구자”, “의심할 바 없는 학자”로 찬란한 조명을 받는 반면, “더러운 도굴자”, “사기꾼”, “비과학적인 완전한 고고학의 초심자”, “문명 파괴자”와 같은 정반대의 신랄한 비난을 받기도 한다. 한 인물에 대해 이렇게까지 정반대되는 평가가 공존하는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 그는 1870년 본격적으로 트로이 발굴에 착수하기 이전에는 무역과 은행업 등을 하는 사업가였다. 그리고 마흔이 넘은 나이에 고고학을 공부하며 발굴 작업에 뛰어든 인물이었다. 슐리만에 대한 엇갈리는 평가는 그의 이러한 배경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트로이로 가는 길의 시작, 호메로스와의 운명적 만남
“내가 인생 후반기에 트로이나 미케네를 발굴할 수 있었던 것은 8년 동안 어린 시절을 보냈던 독일의 어느 작은 마을에서 이미 예정되어 있었다고 할 수 있다.” ―하인리히 슐리만의 자서전 중
1823년 슐리만은 목사였던 아버지의 부임지를 따라 옮긴 독일 북부에 위치한 바렌과 펜츨린 사이의 작은 마을인 안커스하겐에서 8년간 어린 시절을 보냈다. 슐리만은 자서전에서 자신이 그때부터 신비롭고 불가사의한 일에 쉽게 빠져들었고, 보물이 묻혀 있다는 마을의 전설을 철석같이 믿었다고 회고한다. 그의 아버지는 성직자였지만 고대의 역사에 매우 흥미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종종 헤르쿨라네움이나 폼페이와 같은 고대 로마 도시의 비극적인 몰락 과정을 슐리만에게 들려주었다. 또한 호메로스의 서사시에 등장하는 영웅들의 활약이나 트로이 전쟁의 일화들을 들려주곤 했는데, 슐리만은 그때마다 그 이야기에 빠져들었고 아버지로부터 이제는 트로이가 그 흔적도 찾아볼 수 없다는 이야기를 듣고 슬픔에 빠지기도 했다.
슐리만은 그가 트로이를 발굴할 꿈을 키운 어린 시절의 결정적인 계기로 그의 아버지가 슐리만이 여덟 살일 무렵 크리스마스 선물로 사준 루트비히 예거의 <어린이를 위한 세계사>라는 책의 삽화를 본 것이었다고 적고 있다. 그 삽화는 트로이의 거대한 성벽과 스카이아 성문, 불타는 트로이 도시를 왕족 중 유일한 생존자인 아이네이아스가 아버지 앙키세스를 들쳐 업고 아들의 손을 잡고 빠져나오는 장면이었다. 소년 슐리만은 그 거대하고 웅장한 성벽이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렸다는 것을 믿을 수 없었고, 고대의 영웅들이 활약했던 신화 속의 도시를 사실로 믿었다. 마흔 살이 넘은 이후에야 발굴에 착수했던 슐리만의 트로이에 대한 열정의 불씨는 이때부터 조금씩 타오르고 있었던 것이다.
트로이의 화재를 피해 아이네이아스가 아버지를 업고 도망치는 장면, <트로이 화재 이후 도망치는 아이네이아스>, 루벤스, 17세기경.
하지만 이 불씨는 슐리만이 더 성장하여 청장년 시절을 보내고 대부호가 되는 동안 잠시 묻어 두어야 했다. 그는 14세에 학교 교육을 마치고 퓌어스텐베르크라는 작은 도시에서 식품점 수습사원으로 일하게 된다. 그는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장사 일을 하며 아버지가 들려준 고대 영웅들과 트로이의 이야기를 까맣게 잊고 살았다. 그렇게 고된 생업에 매달리던 중 슐리만의 열정에 다시 숨길을 불어 넣은 운명적인 만남이 나타났다. 어느 날 그가 일하던 가게에 술 취한 손님이 들어와 낭랑한 목소리로 어떤 시를 크게 낭송하였던 것이다. 슐리만은 그 외국어로 된 시를 단 한마디도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감동을 받았다. 그리고 그것이 호메로스의 <일리아스> 중 한 구절을 그리스어로 낭송한 것이라는 것을 알고는, 자신의 돈을 탈탈 털어 그 술 취한 사람에게 술을 사주고 그 시를 전부 낭송하게 했다. 슐리만은 가난했지만 그 돈이 전혀 아깝지 않았다.
이후 슐리만은 천신만고를 겪으며 일을 하고 장사를 배웠으며, 그 와중에 난방도 되지 않는 다락방에서 열심히 어학 공부를 했다. 여기서 슐리만의 또 다른 진면목이 드러나는데, 그는 2년 만에 그만의 독특한 공부법으로 영어, 프랑스어, 네덜란드어, 스페인어, 포르투갈어, 이탈리아어를 익혔다. 그는 자신은 이 언어 중 한 언어를 6주만 공부하면 유창하게 말하고 쓸 수 있다고 자신했다. 어학에서와 마찬가지로 슐리만은 사업에서도 성공하여 1845년에는 자신의 무역회사를 세웠는데, 이는 운도 작용했지만 그의 능률적인 시간 활용과 엄청난 노력의 결과라고 할 수 있다. 그는 1854년에는 스웨덴어와 폴란드어를 배웠다.
이렇게 언어 공부에 몰두했던 그가 그렇게 감동받았던 호메로스의 언어인 그리스어를 배우지 않았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슐리만은 사업이 점점 성공가도에 오르면서도 트로이 발굴의 꿈을 접지 않고 늘 그것에 대한 열망을 품고 있었다. 하지만 발굴을 위해서는 막대한 부가 필요했다. 슐리만이 그리스어를 최후까지 남겨 두었던 것은 꿈을 이루기 위한 충분한 준비가 되기도 전에 자신의 사업을 내팽개치고 트로이 발굴에 모든 열정을 쏟게 될까 두려웠던 것이다. 그는 1856년이 되어서야 그리스어 공부를 시작했다. 역시나 6주 만에 그리스어를 숙달했으며, 3개월 만에 호메로스의 난해한 시에 통달했다. 그는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플라톤을 공부하는 데 얼마나 몰두해 있었는지 만일 6주 후에 그(플라톤)가 내게서 편지를 받았다면 틀림없이 이해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는 이제 트로이 발굴을 위한 경제적 조건을 모두 갖추게 된다. “1863년 말에는 내가 기대했던 것을 훨씬 능가하는 재산을 가지게 될 정도로 나의 사업은 하늘의 축복을 받았다. (…) 나는 나를 그토록 매혹시켜 왔던 연구에 전념하기 위하여 사업에서 은퇴했다.” 이제 슐리만의 꿈의 여정이 시작된 것이다.
트로이를 발굴하다?
“나는 드디어 평생의 꿈을 실현할 수 있었다. 그토록 흥미진진했던 사건의 현장과 유년 시절 나를 매혹시키고 위로해주었던 모험담의 주인공이 살던 곳들을 맘대로 방문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래서 나는 작년 여름에 출발한 이후 고대의 시에서 노래한 추억들이 여전히 생생하게 남아 있는 장소들을 차례로 찾았다.” ―슐리만 <이타카, 펠레폰네소스, 트로이(1869)> 서문 중
러시아에서의 사업을 정리하고 긴 여행을 다녀온 슐리만은 여생을 고고학과 트로이 발굴에 바치고자 1866년 초 프랑스 파리에 둥지를 틀었다. 그는 소르본 대학에서 이집트학과 산스크리트어, 그리스와 아랍 철학자들, 고전 시, 근대 불문학과 비교문법을 배웠다. 사업상의 이유로 잠시 학교를 떠났지만, 1868년 1월 슐리만은 다시 소르본 대학에서 공부한다. 그리고 이듬해 4월 로스토크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는다.
그의 저서 <이타카, 펠레폰네소스, 트로이(1869)>는 자신의 여행 수첩과 문학 자료, 그리고 박사학위 논문의 가장 핵심적인 부분을 조합해서 출판한 책이었다. 이 책은 여러 결점들이 있었지만 그때까지 많은 학자들이 트로이의 위치를 부나르바시라는 마을로 추측하고 있었던 데 비해 슐리만은 호메로스의 트로이를 히사를리크 언덕에서 찾을 것을 주장했다. 사실 그도 처음에는 부나르바시를 고대 트로이의 위치라고 생각했지만, 그곳이 호메로스가 묘사한 트로이의 지형과는 맞지 않는다고 판단하고 부나르바시 보다 더 바닷가에 가까운 곳에 있는 히사를리크가 트로이라고 확신했다. 그리고 드디어 1870년 4월 슐리만은 그의 ‘트로이 발굴’에 일등 공신인 친구 프랭크 캘버트와 함께 히사를리크에서 조사 활동을 시작했고, 오랜 기다림 끝에 오스만튀르크 정부의 발굴 허가를 받아 1871년 10월 첫 발굴을 시작한다.
이곳에서 이후 20년에 걸쳐 슐리만은 7차례 발굴 작업을 행한다. 그리고 그 결과는 전 세계에 흥분과 충격을 안겨주었다. 슐리만의 발굴 작업 결과 히사를리크 언덕은 도시의 폐허가 여러 겹으로 중첩된 고고학의 보고라는 사실이 판명되었다. 이곳은 고대 그리스의 도시들이 수천 년간 번영과 멸망을 반복했던 장소였던 것이다. 슐리만은 이러한 층들이 발굴될 때마다 거기서 나온 유물들을 재빨리 발표하였다. 이 과정에서 슐리만은 도자기들과 고고학의 방법론인 층서학(stratigraphy)에 큰 관심을 가졌다. 층서학을 슐리만이 처음 고안해낸 것은 아니지만 이렇게 복합적이고 광범위한 스케일로 층서학을 적용하여 발굴하고 연구한 것은 슐리만이 처음이었다고 할 수 있다.
[왼쪽] 고고학적으로 구성한 트로이의 지도. [오른쪽] 트로이 전쟁이 벌어졌던 장소로 알려진 트로이의 벽 일부.
슐리만에게 호메로스의 <일리아스>는 그의 트로이 찾기의 교과서였다. 그는 호메로스의 묘사를 믿고 신전은 언덕의 중앙에, 그리고 그 주위에 원래 평평했던 곳에 신들이 세운 성벽이 있을 것이라고 추리했다. 그는 별로 중요해 보이지 않는 벽들을 헤치고 대담하게 언덕을 파들어 갔다.
한때 화려한 도시가 있었다는 증거인 무기, 항아리, 장신구들이 발견되었다. 뉴 일리움(고대인들이 트로이가 있었던 위치를 부르던 도시 이름)의 폐허 아래에는 마치 양파껍질처럼 파낼 때마다 새로운 폐허들이 발견되었다. 그의 발굴 결과는 놀라웠다. 원래 슐리만의 목적은 트로이 발굴이었지만 그는 그곳에서 7개의 도시들을 발굴했고 그전까지는 존재조차 알려지지 않았던 원시시대의 두 도시까지 모두 9개의 고대 도시를 발굴했던 것이다. 그의 명성은 전 세계로 퍼져 나갔다.
이제 문제가 되는 것은 그 9개의 도시 중 어떤 것이 트로이인가 하는 것이었다. 그의 조사 결과 가장 밑바닥에서부터 두 번째 층(Troy II)에서 불 탄 흔적과 견고한 성벽, 그리고 거대한 성문 유적을 발견했다. 슐리만은 그 성벽이 프리아모스 성의 성벽이고, 성문은 그 유명한 스카에아 문이라고 확신했다. 이 열광적인 <일리아스> 세계의 숭배자는 신화와 문학이라고만 여겨졌던 트로이 전쟁이 시인의 상상이 아닌 역사적 사실이라는 것을 증명해내고자 했다.
그리고 가장 극적인 발굴이 이어졌다. 2년간 정신없이 발굴에 매진했던 그는 휴식이 필요하다고 생각하고 1873년 6월 15일, 발굴을 종료시켰다. 전 세계를 놀라게 한 (아마도 카터 경이 투탕카멘 무덤을 발견하기 전까지 전 세계를 가장 흥분시켰던) 발견은 바로 이날 이루어졌다. 아내와 함께 발굴 작업을 하고 있던 슐리만은 이제 더 이상 무언가가 발견될 것이라고 생각하진 않았지만, 마지막까지 발굴을 주의 깊게 지켜보았다. 인부들은 슐리만이 프리아모스의 궁이라고 믿었던 석조 건물의 아래층인 지하 8.5m 아래에서 작업을 하고 있었다. 유심히 발굴을 지켜보던 그는 무언가를 발견하고 갑자기 아내를 시켜 인부들을 돌려보내게 했다. 그리고 낙석의 위험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구덩이로 뛰어들어 칼로 무언가를 꺼냈다. 금으로 된 보물들이었다. 그것은 슐리만에 의해 빛을 볼 때까지 3000년간을 그곳에 묻혀 있었던 것들이었다. 그는 그중 귀걸이 한 쌍과 장식 목걸이를 그의 어린 그리스인 아내에게 걸어주며 속삭였다. “헬레네!”
[왼쪽] 슐리만이 발굴한 장신구를 착용한 슐리만의 아내 소피아. [오른쪽] 발굴 당시 촬영한 프리아모스의 보물들.
슐리만은 그가 프리아모스 왕의 보물을 발견했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하지만 사실 그것은 프리아모스 왕의 보물이 아니었다. 그것이 트로이의 유물이 아니었다는 것은 그가 죽기 얼마 전에야 밝혀졌다. 트로이는 그가 믿었던 것처럼 두 번째 층에 있지 않았다. 그 층에서 발견된 이 보물들은 프리아모스 왕의 시대보다 천 년이나 앞선 시대의 것들이었다.
어쨌든 당시에는 트로이의 보물이라고 믿었던 이 황금의 보물들을 슐리만은 아내의 친척들의 도움을 받아 천신만고 끝에 그리스 밖으로 빼돌렸다. 오스만튀르크의 대사가 뒤늦게 그의 집을 수색했지만 유물은 흔적도 찾을 수 없었다. 사실 이러한 슐리만의 유물 빼돌리기는 지금도 그가 도둑이라는 비난을 받는 이유이기도 하다. 특히나 역사적 유물의 약탈과 반환 문제가 민감한 국제 문제가 된 20세기 이후에는 말이다. 하지만 당시의 슐리만에게 모호했던 유물법이나 도덕적 가치는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는 드디어 트로이를 발굴했다고 생각했고 그 보물이 그 증거라고 확신했다. 아마 그때 그는 일생의 정점에 선 흥분을 느꼈을 것이다.
그의 두 번째 성공 역시 호메로스의 세계에서 이루어졌다. 그는 미케네 광장에서 아가멤논이 전쟁 후 귀환하여 그의 아내와 신하에게 배신당해 죽는 전설 속의 미케네 왕궁을 발굴한 것이다. 호메로스는 트로이도 부유했지만 미케네는 더 부유한 도시로 묘사했다. 슐리만은 많은 사람들의 예상을 깨고 그 ‘황금의 도시’를 발견했다.
“여기서 나는 파우사니아스가 전설대로 우리에게 전해준 것, 즉 아트레우스와 용맹스런 왕인 아가멤논과 그의 전차를 몰던 에우리메돈과 예언자 카산드라와 그녀의 일행의 것이라고 했던 무덤들을 발견했다는 것을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보고한다.”
[왼쪽] 1876년 슐리만이 미케네에서 발굴한 ‘아가멤논의 마스크’. 사실 아가멤논 시대의 마스크가 아니라는 것이 밝혀졌다. [오른쪽] 1885년 미케네 성문 앞에서 동료 학자들과 찍은 사진.
미케네를 발굴했던 1876년에도 슐리만은 자신의 발견과 확신에 대해 추호의 의심도 갖지 않았지만 안타깝게도 이 발견 또한 아가멤논 시대의 것이 아니라 그보다 400년 앞선 시대의 것이었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슐리만에 의해 또다시 묻혔던 새로운 역사가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는 것이다. 비록 그가 찾던 호메로스의 세계는 아니었지만, 고고학자들이나 역사학자들에게 슐리만은 ‘잃어버린 세계’를 가져다준 것이다. 또한 슐리만은 10년 후에 티린스 유적을 발굴함으로써 한때 지중해 연안을 지배했던 선사시대의 미노아 문명 연구에 기초를 제공했다.
그렇다면 트로이는 어디에 있을까? 슐리만은 과연 트로이를 발견한 것일까?
신화에서 현실로: 슐리만의 진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슐리만은 트로이를 발견하지 않았다. 앞서 언급했듯이 그가 트로이라고 믿었던 층은 프리아모스 왕의 시대보다 앞선 시대의 것이었다. 그리고 슐리만이 처음으로 히사를리크 언덕을 고대 트로이라고 추측한 것도 아니었다.
1801년 처음으로 히사를리크에서 출토된 동전과 비문으로 그 지점이 고대 일리움이라는 것을 발견한 사람은 에드워드 대니얼 클라크였고, 1820년 그곳이 호메로스가 말하는 트로이라고 처음으로 주장한 사람은 스코틀랜드의 찰스 맥클라렌이었다. 그리고 그곳에서의 발굴도 존 브런튼이 크림 전쟁 기간 동안 했던 작업이 최초의 발굴 작업이었다. 슐리만의 친구인 다르다넬스 지역의 미국 부영사였던 프랭크 캘버트는 슐리만보다 먼저 이 언덕이 수세기에 걸쳐 여러 겹의 폐허로 이루어진 인공적 언덕이라는 것을 파악했고, 게다가 그 언덕의 일부를 소유했던 사람으로 사실 슐리만의 첫 트로이 발굴은 이 캘버트의 도움이 매우 컸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트로이는 어디에 있을까? 왜 슐리만은 트로이 발굴자로 알려진 것일까? 그의 생전에 이미 두 번째 지층이 트로이가 아니라는 것이 밝혀졌다. 하지만 이후 슐리만이 초기의 비학문적이고 마구잡이식의 발굴에서 벗어나 과학적이고 체계적인 발굴 작업을 위해 영입했던 건축가인 되르펠트가 슐리만이 발굴했던 9개의 지층 중 6번째(Troy VI) 층이 트로이라고 결론 내렸다. 그리고 1932년에는 미국의 블레겐이 다시 조직적으로 발굴 조사를 진행하여 한 층 위인 7번째 층 A(Troy VIIa)를 트로이라고 정정하였다. 지금도 이 언덕에 대한 고고학적 조사가 이루어지고 있고 논쟁이 계속되고 있지만, 현재로서는 이 제7층이 슐리만이 찾던 그 트로이라고 알려져 있다.
슐리만이 발굴한 히사를리크 언덕의 트로이 발굴 평면도. 총 9개의 지층으로 구분되는데 노란색으로 표시된 부분이 슐리만이 처음 트로이라고 생각했던 제2 지층이다. 슐리만의 사후 계속된 발굴 작업과 연구로 현재 트로이로 확정된 지층은 분홍색으로 표시된 제 7a 지층으로, 이 지역은 1998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이렇게 본다면 사실 트로이를 누가 발견했냐는 질문의 답은 약간 복잡해진다. 히사를리크 언덕을 대대적으로 파내고 총 9개의 지층을 발견한 것은 슐리만이지만, 그는 전혀 다른 지층을 트로이라고 믿었으며 결국 그가 죽는 순간까지도 트로이는 어디인지 밝혀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슐리만의 목적은 오직 호메로스 시대의 트로이였기 때문에 그것을 발굴하기 위해 그가 찾는 지층을 찾을 때까지 그 사이에 있는 학문적 가치가 있는 층들을 마구 파괴하며 언덕을 파내려 갔다. 따라서 진짜 트로이라고 분석되는 층을 포함하는 제2지층 이후의 층들은 사실 슐리만에 의해 상당 부분 사라지고 손상되었다. 이러한 부분이 바로 슐리만이 진정한 학자가 아닌 트로이의 보물에 눈이 먼 도굴꾼이며 아마추어 고고학자라고 비난받는 이유이다.
그렇다면 슐리만에게 전문가와 아마추어 잣대를 들이대어 평가하는 것이 과연 타당한 것일까? 슐리만은 1882년 발굴부터 경험과 과학적 발굴을 배우기 위해 건축가이자 고고학자였던 되르펠트를 고용했고, 비전문가라는 수식어를 떼기 위해 각 분야의 전문가들을 고용해서 발굴 작업을 진행하고 그 결과를 기록했다. 하지만 그에게 아마추어라는 딱지는 지금도 떨어지지 않고 있다. 게다가 슐리만은 그의 연구 결과를 학술지가 아닌 신문의 논단을 이용하는 것을 선호했으니 이는 당시 전문가라 자처하는 사람들이 슐리만을 조롱하는 좋은 먹잇감이었다.
고고학이 학문으로서 정착되는 전문화의 과정은 19세기 말이 되어서야 본격적으로 나타난다. 이것이 대학과 같은 공식 교육기관의 전공으로 정착된 것은 20세기 중반이 되어서였다. 따라서 19세기에 ‘고고학자’라고 하는 것은 지금 우리가 이야기하는 학계의 테두리 내에서 생업으로 학문을 하는 고고학자와는 매우 다른 의미를 가지고 있다. 19세기 말이 되면 직업으로서 고고학을 하는 전문가들이 생겨나기 시작하지만 슐리만의 시대까지만 해도 아마추어와 전문 고고학자들이 혼재해 있는 상황이었다. 따라서 당시의 ‘고고학자’는 한 분야만의 전문가가 아니었고 다방면에 관심을 갖는 ‘지식인’에 가까운 인물들이 많았다.
이 시대의 지식인들이 전문가가 아니었던 이유는 한 분야에 그들의 시간을 집중 투자하고 그것을 통해 생계를 위한 수입을 얻은 것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한마디로 부유하고 한가한, 즉 생계에서 자유롭기 때문에 취미 생활로 학문을 할 수 있는 귀족이나 부르주아들이었기 때문이다. 슐리만도 비록 태생은 가난한 목사의 아들이었지만 장사로 막대한 부를 쌓은 부자였기 때문에 더 이상의 돈을 벌지 않고도 자력으로 발굴을 할 수 있는 기반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이다. 슐리만의 발굴과 연구에 가장 열광적인 반응을 보였던 영국에서 고고학 단체에 속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사회의 존경을 받는 지식인으로, 직업적 고고학자가 아닌 군인, 성직자, 다른 분야의 교수 등 개인적인 부를 가진 사람들이었다. 따라서 슐리만에 가해지는 전문가-아마추어 논쟁은 당시의 상황에서 다시 고려해야 할 여지가 있다.
슐리만이 사기꾼이라고 비난 받는 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다. 미케네에서 발굴한 황금 유물들을 오스만 제국 몰래 빼돌려 소송에 걸린 것이나, 그의 일기나 발굴 결과 사이의 불일치와 모순 등이 그것이다. 게다가 그가 트로이나 아가멤논의 궁전을 발굴했다고 발표하고 세상에 내놓은 유물들이 불법적으로 발굴한 유물들을 매입하여 거짓말을 한 것이라는 분석도 상당하다. ▶터키 차낙칼레에 위치한 재현된 트로이의 목마.
이 가운데 슐리만이 만들었다고 추측되는 흥미로운 신화 중 하나는 바로 어린 시절부터 품어 온 트로이 발굴의 꿈이다. 예거의 세계사 책 이야기는 1875년 슐리만의 편지에서 처음 언급되는데, 그 편지를 쓸 당시 슐리만의 나이는 53세였다. 실제 그의 서재에서 1828년 판 <어린이 세계사>가 발견되었지만, 그 책을 언제 구입했는지는 알 수 없었고 그 책에 있는 서명이 감정에 의해 아이의 필적이 아니라는 것이 밝혀졌다. 따라서 이 어린 시절의 꿈도 그가 지어낸 것이 거의 확실하다는 의견이 대부분이다.
그렇지만 사실 이러한 의혹들은 다르게 생각될 수 도 있다. 그 책은 정말 아버지가 어렸을 때 사준 것일 수 있고 책의 서명은 나중에 한 것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호메로스의 세계에 대한 슐리만의 탐구열과 그것을 어린 시절까지 끌어내리려 했던 그의 트로이에 대한 꿈과 열정의 진정성이 아닐까.
슐리만이 남긴 진짜 고고학적 유산: 그리스 선사시대의 발견
슐리만이 트로이를 발견하지 못했다면, 그가 위대한 인물로, 고고학 분야의 선구자로 일컬어지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그는 비록 트로이를 발굴하지는 못했지만 그 과정에서 매우 중요한 역사적 유적들을 발굴했다. 즉 역사 속에서 사라진 세계들을 다시 건져 올린 것이다.
그는 미케네 문명이라는 그리스학의 새로운 영역을 개척했다. 슐리만 이전에 미케네는 그저 전설이나 이야기에 나오는 단순한 명칭에 불과했다. 그때까지 미케네에 대해 알려진 것은 페르시아 전쟁에 미미하게 참가했던 것과 BC 468년에 아르고스에 의해 멸망했다는 것 정도였다. 또한 호메로스나 이후의 비극 작품들 속의 이야기로만 남아 있었다. 하지만 슐리만의 발견을 통해 BC 1600년부터 BC 1125년 청동기 시대에 전성기를 누렸던 미케네 문명이 비로소 역사의 빈칸을 메우게 된 것이다. ‘잃어버린 세계’는 트로이뿐만이 아니었던 것이다.
슐리만의 열정, 절반의 성공
“슐리만은 트로이를 발굴한 영웅인가, 꿈에 젖은 몽상가에 불과한 사기꾼인가?” 사실 이러한 논란은 그의 시대에서부터 지금까지 끊이지 않고 있다. 그가 자신의 일기나 편지에 써 놓은 여러 거짓말들, 사업상의 불투명함, 그리고 오로지 한 가지 목표를 위한 저돌적인 성격에 혹자는 슐리만이 병리학적 거짓말쟁이라고 정신분석학적인 평가를 내리기도 한다. 그리고 그의 초기 발굴 행태들에 대해 그가 이 학문에 대해 어떠한 과학적 접근법도 갖지 못한 초심자라고 비판하기도 한다. 그렇다. 슐리만이 너무 많은 의혹과 고고학자로서 갖지 못한 자질들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가 말년에 보인 모습은 그 어떤 학자도 쉽게 하지 못할 진정한 탐구자로서의 면모를 보여준다. 그는 죽음을 앞두고 자신이 주장한 학설을 부정했다. 그가 가진 학문적 개방성은 고대 지중해 세계의 시간적 외연을 넓히고 고고학의 새 지평을 열었다. 슐리만 이전에는 청동기 시대의 그리스 세계란 역사에서 존재하지 않는 것이었다. 선사시대 에게 해 세계 연구는 그가 미케네 문명을 발굴함으로써 시작되었다.
슐리만의 고고학적 작업은 파괴를 수반했기 때문에 많은 비난을 받고 있지만, 그는 모든 유물에 대한 발굴 기록을 꼼꼼히 적었고 자신이 연구한 것을 부지런히 발표하는 등 학자로서의 면모를 분명히 가지고 있었다. 그가 출판한 <트로이 유물 도해집>은 사진 화보를 실은 최초의 고고학 저서 가운데 하나였다.
트로이를 찾는 작업은 아직까지 계속되고 있다. 이것 또한 슐리만이 트로이 전쟁이라는 문학 속 이야기의 역사성을 증명했기 때문이다. 이처럼 그가 남긴 족적은 너무나 명확하지만 그로 인해 사라지고 가려진 것들 또한 많다. 그렇기 때문에 슐리만에 대한 평가는 여전히 엇갈리고 있다. 고고학자이자 저술가인 C. W. 세람은 “문외한의 성공에 대한 전문가의 불신은 천재에 대한 범인의 불신”이라며 슐리만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를 일축한다. 반면 슐리만을 비판하는 대표적인 학자인 데이비드 트레일은 그를 발굴 기록과 유물을 조작한 사기꾼이라고 결론 내린다.
슐리만은 과연 영웅인가 사기꾼인가? 우리는 슐리만의 어떠한 면을 취하고 버려야 하는가? 그것은 각 시대와 사회가 가진 가치관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어떤 위인전의 인물도 모든 면이 훌륭하지는 않다. 판단은 각자의 몫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