맹자와 닮은꼴은 돈키호테?
춘추전국시대의 맹자와 닮은 인물을 서양문학에서 찾는다면 누구일까? 나는 세르반테스의 소설 <돈키호테>의 주인공 ‘돈키호테’가 ‘맹자’와 꽤나 비슷하다고 생각한다.

<돈키호테>는 17세기경 스페인의 라만차 마을에 살던 한 시골 신사의 모험을 다룬 소설이다. 주인공인 돈키호테는 당시 유행하던 중세의 기사 이야기에 매혹되어 실제로 기사 수업을 하기 위해 모험을 결심한다. 애마 로시난테를 타고 시종인 산초와 함께 다니던 어느 날, 풍차를 보고 거인이라 여기고 산초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돌격을 외친다. 풍차의 날개에 받쳐 공격에 실패하지만 그럼에도 풍차의 정체를 제대로 바라보지 못한다. 이후 기사로 변신한 친구와 결투에서 패배한 뒤에서야 돈키호테는 비로소 무기를 내려놓고 이성을 되찾게 된다. ▶애마 로시난테를 타고 시종 산초와 함께 유랑 중인 돈키호테의 모습. 구스타브 도레(Gustave Doré)의 <돈키호테> 삽화, 1863년.
맹자는 전쟁으로 인해 살상이 만연하던 춘추전국시대에 성선(性善)의 기치를 내걸었다. 그는 제자와 함께 주위의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면서 자신의 철학과 정책을 알리고 성선의 세계를 일구고자 했다. 제후들의 거듭된 무관심과 냉대에도 불구하고 맹자는 자신의 소신을 꺾지 않았다. 그는 현실에서 소외당할 때도 하늘과 성인(聖人)의 힘에 의지하면서 자신의 타당성을 굳게 믿었고, 다른 한편으로 아래로부터 혁명을 긍정하면서 현실 변혁의 가능성을 보았다.
돈키호테와 맹자의 공통점은 시대가 걸어가고 있는 방향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한다는 데에 있다. 참의 세계가 저 어딘가에 있다고 분명히 믿고 있는 것이다. 또 두 사람은 여러 위기에 부딪치지만 자신의 오류와 실패를 시인하지 않는다. 현실이 주술과 마술에 걸려 있다고 보거나 현상의 사람이 소체(小體)의 욕망에 빠져 있다고 보았다.
너는 너, 나는 나 – 갈등을 이기는 방법
세르반테스는 <돈키호테>에서 돈키호테와 산초라는 두 인물을 통해 인간의 이상적인 측면과 현실적인 측면을 잘 포착하고 있다. 이 덕분에 <돈키호테>는 진정으로 인간을 그린 작품으로 평가받는다. 맹자도 이에 뒤지지 않는다. 그는 <맹자>에서 대체(大體, 큰 몸)와 소체(小體, 작은 몸)를 통해서 사람이 도덕적 이상으로 향하는 측면과 감각적 쾌락으로 빠지는 측면을 잘 대비시키고 있다. 사실 맹자의 공로는 성선의 발견도 있지만, 대체와 소체 사이에서 왔다 갔다 하는 인간의 이중성의 설정에 있다고 할 수 있다.
돈키호테는 이 세계 어딘가에 기사가 실재하고 또 그 기사가 세상을 구원할 수 있다고 믿었기에 모험을 떠났다. 맹자는 어떻게 성선을 향한 모험을 떠날 수 있었을까? <맹자>에 보면 맹자에 결코 뒤지지 않을 꿈과 모험을 가진 인물(묵자, 유하혜 등)을 만날 수 있다. 맹자도 그 인물의 모험에 질투를 느꼈지만 그의 가치를 깎아내리기에 여념이 없었다.
맹자뿐 아니라 동아시아의 학자라면 사회 참여를 두고 고민을 할 수밖에 없다. 세상의 문제를 풀 식견을 가진 선인(善人)이 있고 그 선인을 알아주는 명군(明君)이 있으면 아무런 걱정거리가 없을 것이다. 하지만 현실은 선인이 명군을 만나지 못하고 악인(惡人) 또는 암군(暗君)을 만난다는 데에 있다. 악인과 암군이 전부 사라지면 세상을 바꿀 기회가 생길 수도 있겠지만, 문제는 선인이 살아 있는 동안에도 그들이 건재해 있다는 것이다. 이상의 현실화가 그만큼 쉽지 않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마냥 기다릴 수도 없다. 수많은 사람이 고통으로 신음하는데 모른 척하고 지내기에는 양심에 걸리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무턱대고 악인과 암군의 조정에 참여해서 사사건건 말썽을 일으키며 위험을 스스로 만들 필요도 없지 않은가?
맹자는 이런 갈등의 상황을 헤쳐 나간 대표적인 인물로 고죽국의 왕자 백이(伯夷)와 노(魯)나라의 현인 유하혜(柳下惠)를 꼽았다. 백이는 악인과의 어떠한 거래도 일절 하지 않았으며 벼슬하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말하는 것조차 달가워하지 않았다. 한편 유하혜는 더러운 군주가 하찮은 관직을 제의하더라도 거절하는 법이 없었다. 백이가 갈등 상황에서 자신의 원칙만을 내세우면 된다고 쳐도, 유하혜는 자신에게 주어진 갈등을 어떤 방식으로 이겨낼 수 있었을까? 그의 말이 걸작이다.
“너는 너고 나는 나다. 네가 아무리 내 옆에서 옷을 훌러덩 벗고 알몸 쇼를 벌이더라도 네가 나를 어떻게 더럽힐 수 있겠는가?”(爾爲爾, 我爲我. 雖袒裼裸裎於我側, 爾焉能浼我哉?)
여기서 ‘나’는 나를 마주한 상대로부터 어떠한 영향을 받지 않는 절대 자아를 선언하고 있다. 인용문 중 앞부분을 다른 지역 말로 옮기면 다음과 같다.
“니는 니고 내는 내다.”, “니랑 내랑 무슨 상관이고?”, “니캉 내캉 무슨 일인데?”
전근대인치고 참으로 오만하고 방자하기가 이를 데가 없는 자세이다. 현실의 흐름을 따라가지 않으며 큰소리치는 것이라면 맹자도 둘째가라면 서러울 텐데 유하혜도 결코 맹자에게 뒤지지 않는 셈이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맹자도 유하혜의 기개를 감당하지 못하고 사람이 공손하지 못하다고 꾸짖었다.
모험의 길을 떠나자!
맹자는 유하혜가 걸어가려는 길을 부정하지는 않았다. 다만 그 길을 일반화시키기 어려웠기 때문에 유하혜의 길과 결별을 선언했던 것이리라. 맹자는 사람이 소체와 대체의 두 길에서 어디로 갈 것인지 묻고 있다. 맹자의 길은 분명하게 이미 결정되어 있다. 그는 성선의 기치를 내걸며 소체의 욕망을 누르고 대체의 길을 따라가려고 했다.
맹자가 여러 나라를 찾아다니던 어느 날 세자 시절의 등(滕)나라 문공을 만난 적이 있었다. 등나라는 주위에 강대국으로 둘러싸여 있어서 늘 비상 탈출구를 찾던 터였다. 세자는 맹자에게 도움을 청했고 맹자는 성선의 나라를 세우면 모든 문제를 풀 수 있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세자는 맹자의 제안이 실현 가능하다고 보지 않았다.
이처럼 당시 모든 사람들이 전부 소체의 길을 걸어가고 있는 상황에서, “대체, 앞으로!”를 외치는 맹자의 모습을 상상해보라. 돈키호테가 풍차를 거인으로 보고 “돌격, 앞으로!”를 외치는 모습과 참으로 겹쳐지지 않는가?
산초는 “돌격, 앞으로!”를 외치는 돈키호테를 만류했다. 산초의 눈에는 풍차는 풍차일 뿐 거인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맹자가 “대체, 앞으로!”를 외쳤을 때 등나라의 세자 역시 거부했다. 맹자가 말하는 그 길이 성공을 거둔다는 보장도 없고 맹자의 뜻에 따라 산다고 해서 성인이 된다는 보장도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돈키호테가 풍차를 향해 뛰어들었던 것처럼 맹자도 대체를 향해서 뛰어들었다. 그리고 맹자는 그 길로 뛰어들 때 이전 선배들이 했던 말들을 인용하여 자신의 주장을 입증했다.
성간(成覵: 제나라의 용사): “성인도 사나이이고 나도 사나이인데, 내가 무엇 때문에 저들을 두려워하겠습니까?”(彼丈夫也, 我丈夫也. 吾何畏彼哉?)
안연(顔淵: 요절한 공자의 애제자): “성인 순임금은 어떤 사람이고 나는 어떤 사람인가? 노력하기만 한다면 저와 같아질 것이다.”(舜何人也? 予何人也? 有爲者亦若是.)
우리는 ‘전근대인’ 하면 성인(聖人)과 전통의 절대적 가치에 눌려서 모든 일에 “예예” 하면서 고개를 수그리며 순종하는 인간상을 떠올리기가 쉽다. 또 제 주견이 없고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하는 노예를 떠올릴 수도 있다. 하지만 성간과 안연을 보면 거룩한 존재인 성인에 대한 두려움이 없다. 성인이 무슨 말을 했다고 하더라도 깜빡 죽지도 않는다. 그들은 성인을 저 멀리 떨어져 있는 초월적 존재로 보지도 않는다. 그러니 나와 성인 사이에는 뛰어넘어야 할 간격이 없는 것이다.
요즘 사춘기의 중학교 2학년을 건드릴 수 없는 존재라고 한다. 부모님이나 선생님이 하는 말을 그대로 받아들이던 시절이 있었겠지만, 10대 중반이 되고 사춘기가 오면 자기만의 주관이 생겨 어른들이 하라는 것과 반대되는 것만 하고 싶은 욕구가 생기는 것이다.
하지만 성간과 안연의 주장은 사춘기 소년의 반항 같은 괜한 트집이 아니다. 그들은 그 어떤 권위에도 굴하지 않으면서도 자신의 뚜렷한 주견을 가지고 있었다. 또한 그들은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성인의 가치는 받아들였다. 맹자는 다소 불손하기만 한 유하혜보다는 불손하지만 주견을 가진 성간과 안연과 뜻을 같이 한다고 볼 수 있다.
돈키호테와 맹자를 겹쳐서 바라보니 맹자가 얼마나 인간의 본연에 다가가려고 했는지 알 수 있다. 그는 성선(性善)을 인간의 향기로 보았고, 그것을 맡기 위해서 모험에 찬 여행을 결코 포기하지 않았다. 맹자는 골목에 숨어서 성선을 외쳤던 것이 아니라 반대편으로 둘러싸인 시장에서 성선을 외쳤던 것이다.
이는 돈키호테가 보이는 것만을 믿는 톨레도의 장사꾼에게 “중요한 것은 보지 않고 믿어야 한다는 거요.”(<돈키호테> 1권 4장)라고 하는 것과 같다. 두 사람에게 이상(理想)은 보이지 않지만 가슴으로 느낄 수 있으므로, 느끼는 만큼 그 길을 가야 하는 것이었다.
글 신정근 성균관대 동양철학과 교수. 서울대학교 철학과를 졸업한 후 서울대학교 대학원에서 석ㆍ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성균관대 동양철학과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주요 저서로는 <마흔, 논어를 읽어야 할 시간>(2011), <인문학 명강, 동양고전>(공저, 2013), <불혹, 세상에 혹하지 아니하리라>(2013), <신정근 교수의 동양고전이 뭐길래?>(2012), <논어>(2012), <어느 철학자의 행복한 고생학>(2010)> 등이 있고, 역서로는 <소요유, 장자의 미학>(공역, 2013), <중국 현대 미학사>(공역, 2013), <의경, 동아시아 미학의 거울>(공역, 2013) 등 30여 권의 책이 있다. 앞으로 동양 예술미학, 동양 현대철학의 새로운 연구 분야를 개척하고, 인문학과 예술의 결합을 이룬 신인문학 운동을 진행하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