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코피예프 교향곡 7번(Prokofiev, Symphony No.7 in C sharp minor, Op.131)
라라와복래2014. 7. 11. 11:21
Prokofiev, Symphony No.7 in C sharp minor, Op.131
프로코피예프 교향곡 7번
Sergei Prokofiev
1891-1953
Valery Gergiev, conductor
Mariinsky Theatre Orchestra
Great Hall of the Moscow Conservatory
2012.04.25
Gergiev/Mariinsky Theatre Orchestra - Prokofiev, Symphony No.7 in C sharp minor, Op.131
프로코피예프는 결코 뒤늦게 혁신을 도모했던 작곡가가 아니다. 그는 23세 무렵에 이미 자신만의 특이한 음악 언어를 만들어냈다고 스스로 천명한 바 있는데, 실제로 이 시기에 작곡한 두 개의 피아노 협주곡과 초기에 출판된 솔로 피아노를 위한 작품들을 보면 이러한 자신감에 수긍하지 않을 수 없다. 그는 다섯 가지의 주요한 요소들에 의해 이러한 개성적인 음악 언어를 창조할 수 있었다고 언급한 바 있는데, 그것은 바로 고전성, 독창성, 운동성, 서정성, 마지막으로 그로테스크함이다. 이 가운데 특히 그로테스크함은 작곡가만의 유머이자 독특한 취향으로 이해되곤 한다.
프로코피예프는 이들 요소에 근육질적인 운동성을 위한 특별한 특성을 부여했음은 물론이려니와 자신의 음악을 향유하는 사람들에게는 오서독스하면서도 두터운 음악적 텍스추어를 정확하게 구분해야 하는 특별한 청감까지를 요구했다. 영상물이나 음반을 통해 그의 피아노 연주를 들어보면 이러한 개성적인 음악적 특징이 연주에서도 고스란히 드러남을 확인할 수 있다.
예술적 깊이와 통찰력이 담긴 원숙한 작품
프로코피예프는 기악 소품들은 물론이려니와 협주곡, 발레, 오페라 등 다양한 음악 장르에서 절대적으로 필요한 직접적인 효과에 대한, 예를 들면 얼마나 드라마틱하게 음악을 이끌 수 있는지, 얼마나 철학적인 반영을 담아낼 수 있는지와 같은 놀라운 재능을 이미 갖추고 있었다. 그러나 교향곡에 있어서는 전혀 다른 이야기를 필요로 한다. 실제로 그가 본격적으로 교향곡에 혼신의 힘을 쏟기 시작하며 중요한 작품을 만들어낸 것은 교향곡 5번을 작곡한 1944년부터라고 할 수 있다.
이전에 그는 미숙한 면이 보이는 출판되지 않은 두 개의 작품(1902년의 G장조와 1908년의 e단조 교향곡)을 작곡했고, 연습적인 측면이 강한 교향곡 1번 ‘고전적’을 1916년부터 1917년 사이에 작곡했으며, 1924년부터 1925년 사이에는 사치스러울 정도로 호화롭게 작곡한 교향곡 2번이 나왔다. 그리고 이어진 두 개의 교향곡은 이전에 작곡한 작품으로부터 주제와 재료를 차용했는데, 1928년 작 3번 교향곡은 오페라 <화염의 천사>로부터, 1930년에 완성한 4번 교향곡은 발레음악 <방탕한 아들>로부터 기인한 것이다. 특히 4번 교향곡은 작곡가가 교향곡에 대해 자신감을 얻은 5번 교향곡 이후인 1947년에 대규모 스케일로 개정하기도 했다.
프로코피예프의 음악적 개성이라고 할 수 있는 다양한 요소들의 이질적인 혼합이라는 측면이 프로코피예프라는 작곡가를 전통에서 벗어난 자유로운 심포니스트로 규정지을 수 있는 절대적인 기준은 아니다. 그의 인생에서는 외부적인 변화나 사건들이 많은 영향을 끼쳤는데, 혁명 전의 러시아에서 그는 글라주노프, 라흐마니노프, 미야콥스키 등으로 대변되는 러시아의 교향곡 전통에서 벗어나고자 했고 스크랴빈의 그 엑스터시 넘치는 종말론적인 세계관과는 거리를 두었다.
프로코피예프가 1918년 5월 이후 서유럽으로 진출한 이후에 접한 다양한 교향곡 전통들과 이에 대한 탈 전통적 반역들 및 아방가르드적인 실험 모두가 그에게 깊은 인상을 주었고, 이후 1935년 12월에 온전히 소비에트로 돌아온 뒤에야 비로소 자신이 나아가야 할 교향곡의 방향을 모색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를 기다린 것은 스탈린의 피를 튀기는 대대적인 숙청과 무시무시한 강압이었다. 특히 5번 교향곡(1944년)과 6번 교향곡(1945~47)은 당시 탈출할 수 없을 정도로 감시가 심한 고문과도 같은 사회에서의 비틀린 감성과 왜곡된 삶을 풍자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 누구도 이러한 경험을 겪고 싶지는 않겠지만, 어찌 되었든 이 시기의 프로코피예프의 음악에서 비로소 예술적인 깊이와 통찰력이 배어 나오기 시작했다. 전쟁 중에 작곡한 피아노 소나타들과 바이올린 소나타 1, 2번이 특히 그러하다. 작곡가의 최후의 대작으로 1951년부터 1952년 사이, 작곡가가 세상을 뜨기 바로 전해에 작곡된 교향곡 7번도 그러한 경우에 속하는데, 닐센이나 박스, 본윌리엄스, 쇼스타코비치의 마지막 교향곡들처럼 작품의 논조는 표면적으로 정확하게 드러나진 않지만, 작품의 탄생 배경을 이해하고 들어본다면 예상할 수 있는 것 이상의 음악적 깊이와 점진적으로 발전해 온 원숙함을 경험할 수 있을 것이다.
포효하듯 험난했던 20세기 초반, 스트라빈스키의 <봄의 제전>이 스캔들을 일으킨 이후 러시아 풍의 유행은 새로움을 잃어 가기 시작하면서 파리의 청중들과 평론가들에게 충격을 주기 힘들어졌다. 다다이즘과 초현실주의의 문화가 자라남에 따라 19세기의 전통과 부르주아 문화를 경멸하게 되었고 고매한 것보다는 모방적인 것과 천박한 것들로 대중의 취향은 기울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러한 이즘(ism)의 난립은 교향곡을 작곡하는 것에도 영향을 끼쳤다.
프로코피예프는 “바흐로 돌아가자”는 당시의 운동과 파리의 최신 음악 경향을 대놓고 비웃었다. 단 당시의 경향 가운데 오네게르(Arthur Honegger)가 대성공을 거둔 <퍼시픽 231>에 의해 정형화된 기계적인 스타일(style mécanique)에 커다란 친연성을 느꼈다. “강철과 무쇠로 만든” 교향곡을 구상한 작곡가는 교향곡 2번 초연이 실패로 돌아감에 따라 새로운 단순성을 찾기 시작했고, 이러한 노력은 그가 다시 소비에트로 돌아가면서부터 구체적으로 결실을 맺게 되었다.
프로코피예프(오른쪽)와 로스트로포비치(왼쪽), 1952
사망 전해에 완성한 마지막 교향곡
1952년 10월 11일 모스크바에서 초연된 그의 마지막 교향곡 7번은 소비에트에서 대단한 성공을 거두었지만 이와는 대조적으로 서방세계에서는 매우 냉담한 반응을 얻었다. 이러한 상반된 반응은 음악 그 자체 때문이라기보다는 이를 이성적으로 받아들이는 과정에 있어서 양측의 서로 다른 환경과 입장에서 비롯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1948년의 즈다노프 비판과 1953년 스탈린 서거 사이의 시기는 1920년대 파리보다 교향곡을 작곡하는 데에 훨씬 불리한 조건에 놓여 있었고, 실제로 쇼스타코비치는 이 시기에 교향곡 작곡을 중단하기도 했을 정도였다. 반면 서방세계의 평론가들은 음악의 현격한 단순화를 스타일적인 퇴보로 치부하며 용서할 수 없는 죄라고 인식했다.
사실상 프로코피예프는 소비에트의 많은 교향곡 작곡가들이 착취당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자신 또한 그 굴레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었던 만큼, 당시 그는 어린이 라디오 프로그램을 위한 ‘어린이 교향곡’을 작곡하고자 계획하고 있었다. 비록 작품에 대한 생각이 보다 넓어지고 훨씬 깊어지긴 했지만 어린이를 연상시키는 순진무구함만큼은 간헐적이나마 표면적으로 드러나게 되었다. 공식적인 수용이라는 관점에 있어서 이 작품은 스탈린의 리얼리즘이라는 대원칙에 부합하는 필요조건들을 갖추고 있지만, 동시에 생각에 잠겨 있는 듯한 단순성과 우수 어린 노스탤지어는 진실된 표현을 갈망하는 청중의 심금을 울릴 수 있었고 자신의 명예와 휴머니티를 회복시키고자 한 작곡가의 진심을 전달하기에 모자람이 없었다.
1악장: 모데라토
네 개의 악장으로 구성된 교향곡 7번은 전통적인 교향곡의 선상에 놓여 있는 작품으로 고전적인 관점으로 비교적 이해하기 쉬운 편에 속한다. 그러나 표면적으로 드러나 있는 구조적 단순성으로 포장되어 있는 작곡가의 은밀한 의도에 대한 실마리는 아마도 치유될 수 없는 상처를 간직한 고통을 반영하고 있는 1악장 의 제시부 마지막 부분에 등장하는 오보에와 글로켄슈필, 실로폰의 앙상블 음향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 텍스추어와 화성은 림스키코르사코프의 풍자적인 오페라이자 마지막 작품인 <금계>에 등장하는 점성술사의 음악과 닮아 있는, 동화적인 분위기를 표현하기 위한 재료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동화적인 요소들은 떠들썩한 마지막 악장에서 과거를 회상하는 듯한 느낌을 자아내는 데에 일조하기도 한다.
2악장: 알레그레토 - 알레그로
2악장은 작곡가의 발레음악 <신데렐라>나 오페라 <전쟁과 평화>에서 등장하는 비통하면서도 달콤한 왈츠처럼 보이는데, 이전에 작곡한 두 개의 소비에트 교향곡들에서 사용했던 것과 같이 주제를 불명료하게 보이게끔 하는 기법의 완성형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중간 부분에 등장하는 호른과 팀파니, 작은북 등이 클라리넷과 플루트, 피아노, 바이올린이 만들어내는 명료한 왈츠 리듬과 대조를 이루며 어두운 분위기를 주입, 이질적인 요소들이 그로테스크하게 춤을 추는 듯한 무곡 풍으로 끝을 맺는다.
3악장: 안단테 에스프레시보
3악장은 프로코피예프의 감성적 표현력이 잘 드러나는 대목으로 일종의 음악적 화자의 삶에 대한 회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오보에를 비롯한 다양한 목관악기들이 노스탤지어를 자아내며 과거에 대한 동화적이면서 낭만적인 추억을 상기시키고, 호른과 바이올린의 길고 풍윤한 프레이징과 짧은 하프의 여운은 일종의 몽상적인 여행과 같은 페이소스를 자아낸다.
4악장: 비바체 - 모데라토 마르카토
마지막 4악장은 소비에트적인 흥겨운 갤럽이다. 작곡가의 만년에 중요한 영향을 끼친 첼리스트 므스티슬라프 로스트로포비치는 이 악장에 대해 흥미로운 증언을 남긴 바 있다. 당시 몹시 가난했던 프로코피예프는 무려 10만 루블이 걸린 스탈린상을 타기 위해 즐겁고 발랄한 22마디 이상의 갤럽을 원래 의도한 악상 대신 집어넣었다는 말이 그것이다.
그러나 종소리와 함께 여운을 남기며 조용하게 사라지듯 끝을 맺는 코다 부분은 작곡가가 의도한 극중 화자의 과거로의 소멸로서 후배 작곡가인 쇼스타코비치는 교향곡 13번 ‘바비야르’의 마지막 악장의 종결부에서 이를 모델로 삼았다. 더불어 쇼스타코비치는 자신의 마지막 교향곡 15번에서 프로코피예프의 이 마지막 교향곡에서 드러나는 의도적인 단순성과 신랄한 풍자의 그로테스크한 조화를 고스란히 차용하기도 했다.
7번 교향곡을 통해 교향적 어법과 오케스트라 기법에서 대가로서의 원숙함과 독보적인 예술성을 획득한 프로코피예프는 4번 교향곡을 개작했던 것처럼 자신의 결정적인 실패작으로 낙인찍힌 2번 교향곡을 개작(그는 미리 작품번호 136을 부여해 놓기까지 했다)하기로 계획했으나 예상치 못한 급작스러운 죽음으로 인해 실행되지 못했고 피아노 소나타 5번(Op.38)을 개작한 버전(Op.135)이 이 위대한 작곡가의 ‘백조의 노래’가 되었다.
Prokofiev, Symphony No.7 in C sharp minor, Op.131
Seiji Ozawa, conductor
Berliner Philharmoniker
Philharmonie, Berlin
1989.04
추천음반
1. 런던 심포니 오케스트라/ 발레리 게르기예프, DECCA
2. LA 필하모니 오케스트라/ 앙드레 프레빈, Philips
3. 모스크바 국립 라디오 오케스트라/ 겐나디 로제스트벤스키, Melodiya
4. 프랑스 국립 오케스트라/ 므스티슬라프 로스트로포비치, Erato
5. 로열 스코티시 내셔널 오케스트라/ 네메 예르비, Chandos
글 박제성(음악 칼럼니스트) 클래식음악 전문지 <음악동아>, <객석>, <그라모폰 코리아>, <피아노 음악>과 여러 오디오 잡지에 리뷰와 평론을 쓰고 있으며, 공연, 방송, 저널 활동, 음반 리뷰, 음악 강좌 등 클래식음악과 관련한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하고 있다. <베토벤 이후의 교향곡 작곡가들>을 번역했다. 현 서울문화재단 평가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