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용과 음악을 결합한 ‘안무 콘서트(choreographic concert)'로 진행된 베를린 고음악 아카데미의 비발디 <사계> 공연.
무용과 음악을 결합한 '안무 콘서트' - 고전의 새로운 해석
지난 2009년 독일 베를린의 공연장 라디알시스템 V. 옛 하수 펌프장을 개조한 이 공연장에서 고음악 연주 단체인 ‘베를린 고음악 아카데미’가 비발디의 <사계>를 연주했습니다. 하지만 출발부터 조금은 독특했지요. 단원들은 푸른 잎사귀를 입에 물고 있었고, 바이올린 독주를 맡은 미도리 자일러도 바이올린의 활 끝에 잎사귀를 끼워 놓고 있었습니다.
<사계>는 계절마다 “봄이 왔다. 새들은 즐겁게 아침을 노래하고 시냇물은 부드럽게 속삭이며 흐른다,”라는 식의 짧은 시를 곁들이고 있지요. 이 공연은 첫 곡 ‘봄’의 1악장부터 무용수가 자신의 어깨 위에 독주자를 태우면서 조금씩 동작의 강도를 높여 갔습니다. 가만히 서서 연주하기도 쉽지 않지만, 자일러는 무용수의 어깨 위에서도 자연스럽게 독주를 소화했지요.
이윽고 무용수는 자일러를 번쩍 들어서 안는가 하면, 서로 짧은 입맞춤을 통해서 붉은 실을 천천히 늘어뜨리기도 합니다. 단원들도 서로 붉은 실을 입에서 입으로 늘어뜨리면서 무대는 천천히 ‘실의 바다’로 변했습니다. 단원들은 연주하면서 뛰어다니는 것은 물론이고 아예 마룻바닥 위에 누워서 합주를 하기도 했지요.
이날 공연에는 무용과 음악을 결합한 ‘안무 콘서트(choreographic concert)'라는 이름이 붙었습니다. 대부분의 클래식 음악회는 작품 소개도 하지 않을 정도로, 음악 이외의 모든 소리와 행동을 불순물로 간주하는 경향이 있지요. 이런 풍토를 감안하면 무척이나 파격적인 <사계>라고 할 수 있었습니다.
비발디의 <사계>처럼 자연이나 상황을 묘사하는 성격이 짙은 곡을 ‘표제음악’이라고 부릅니다. 이들은 무용과 연기를 통해서 곡이 지니고 있던 표제음악의 성격을 무대에서 되살린 것입니다. 이를테면 연주만이 아니라 온몸으로 비발디를 표현한 셈입니다.
‘가을’이 되면 단원들은 머리 위에 사과를 하나씩 올려놓고 있는데, 그 사과가 떨어지면 무용수는 수확이라도 하듯이 정성스레 바구니에 담아냅니다. 사과를 한 입 베어 문 무용수가 쓰러지면 여성 단원들은 그에게 키스 세례를 퍼붓지요. 이들의 ‘행위 예술’에 객석에서도 폭소가 터져 나옵니다. ‘겨울’이 되면 모닥불을 피우듯, 램프 곁에 악보와 악기를 불쏘시개처럼 쌓아 둡니다. 악기를 기관총처럼 쥐고 돌리는 행위까지, 연주를 하면서 이 모든 행동이 동시에 진행된다는 점이 놀랍습니다.
베를린 고음악 아카데미는 1982년 동베를린에서 창단된 고음악 연주 단체입니다. 쇼스타코비치의 교향곡을 절도 있게 연주하는 걸 사회주의적 모범으로 간주하던 시대에 이들은 음악적 탈주를 꿈꿨지요. 바로크 악기를 만들 제작자나 참고서적도 구하기 힘들었지만, 이들은 오스트리아 인스부르크 음악제의 마스터클래스에 참가해서 바로크 연주 방식을 배웠지요. 1989년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뒤에는 지휘자 르네 야콥스 등과 잇달아 녹음하면서 세계적 명성을 얻었습니다.
▲미도리 자일러(1969~ )는 어머니가 일본인이고 아버지가 독일인입니다. 부모 모두 피아니스트죠. 오사카에서 태어났으나 잘츠부르크에서 성장했습니다. 바흐와 모차르트에 정통하며, 2010년부터 바이마르에 있는 리스트 음악학교에서 바로크 바이올린과 비올라를 가르치고 있습니다._라라와복래
이 공연 이전까지 자일러는 <사계>를 연주한 적이 없었습니다. 모든 연주자들이 택하는 작품이기에 틀에 박힌 진부한 연주가 아닌가 하는 우려가 들었다고 고백했지요. 하지만 되도록 이 곡을 새로운 방식으로 소개하고 싶었다는 바람도 함께 털어놓았습니다. ‘고전’은 변함없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우리가 처한 상황도 달라지기에 매번 새로운 ‘해석’의 가능성도 생겨나는 것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