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eethoven, Piano Concerto No.5 in E flat major, Op.73 'Emperor'
미켈란젤리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열어 가톨릭교회의 개혁을 주도한 교황 요한 23세의 동향 친구였으며, 젊은 시절에는 수도원에서 1년 동안 생활한 적도 있었다.
베토벤 피아노 협주곡 ‘황제’ 피날레 연주 중 신이 천둥을 쳐 내려보내다
1960년 4월 28일, 로마 바티칸의 베네딕트 홀. 피아니스트 아르투로 베네데티 미켈란젤리가 연주하는 베토벤 피아노 협주곡 5번 ‘황제’가 피날레에 접어들고 있었다. (위 연주)
‘황제’의 3악장은 피아노와 오케스트라의 화려한 대폭발로 끝을 맺는다. 이런 대폭발의 장대한 효과를 더욱 부각시키고자 베토벤은 피아노를 잠시 소강상태에 접어들도록 했다. 피아노가 점점 잦아들도록 한 것이다. 그렇게 점점 죽어 가는 듯하다가 갑자기 “꽈과광” 하고 폭발해야 훨씬 근사하기 때문이다.
미켈란젤리 역시 피날레의 화려한 폭발을 위해 점점 소리를 죽이고 있었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 갑자기 밖에서 “우르릉 꽝”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천둥소리였다. 미켈란젤리가 ‘황제’를 연주할 때 밖에는 폭우가 쏟아지고 있었다. 그러는 중에 천둥이 친 것이다. 그런데 그 타이밍이 참으로 절묘했다. 신이 보냈을 그 천둥소리가 곧바로 나올 피아노의 대폭발을 예고한 셈이 되었다.
때마침 들려온 신의 애드리브를 듣고 미켈란젤리는 곧바로 대폭발의 피날레로 들어갔다. 그리고 충만한 영감으로 곡을 마무리했다. 이날 미켈란젤리가 연주한 곡이 공교롭게도 베토벤의 ‘황제’였다는 사실이 자못 흥미롭다. 수많은 클래식 곡 중에서 천둥소리 같은 자연의 소리에 가장 잘 어울리는 곡이 바로 ‘황제’가 아니겠는가.
미켈란젤리는 다른 피아니스트와 마찬가지로 베토벤의 ‘황제’를 자주 연주했다. 음반 녹음만 무려 열두 번이나 한 것을 보면 ‘황제’를 가장 자신 있는 레퍼토리로 생각했음에 틀림없다. 오늘날 그가 남긴 ‘황제’ 음반들은 다채롭고 화려한 음색과 풍부한 표정을 자랑한다. 이런 음반들과 비교할 때 1960년 4월 28일 바티칸에서 연주한 ‘황제’ 실황 음반은 음질 면에서 최상의 것이라고 하기는 어렵다. 그럼에도 이 음반은 마니아들 사이에서 인기가 높다. 마지막 피날레에서 느닷없이 신이 선사한 자연의 소리가 끼어들었기 때문이다.
너무도 괴팍했던 무결점 완벽주의자
이탈리아 출신의 피아니스트 아르투로 베네데티 미켈란젤리(Arturo Benedetti Michelangeli, 1920-1995)는 공연과 리코딩 관계자에게 늘 ‘요주의 인물’이었다. 공연 직전이나 리코딩 중간에 연주를 취소시켜버린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취소 이유는 여러 가지였다. 건강상의 문제에서부터 악기 문제, 홀의 음향 문제, 청중의 문제에 이르기까지. 연주회 당일에는 하루 종일 극장 안을 왔다 갔다 하며 피아노 소리를 체크했으며, 음이 완전히 조율되었다고 느껴지기 전까지는 연주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청중들은 그가 만족할 때까지 무작정 기다려야 했다. 베를린 연주회에선 두 시간이나 시간을 끈 적도 있었다. 파리에선 손이 시렵다면서 연주를 거부했고, 브레렌츠에선 청중이 세 번이나 기침을 했다고 앙코르를 거부했다. 취리히에선 에어컨이 켜져 있다고 연주를 거절했다. 이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미켈란젤리를 비난했지만 "나는 다른 사람을 위해 연주하지 않는다. 오직 나와 작곡가를 위해서 할 뿐이다. 그 자리에 청중이 있건 없건 상관없다"는 게 그의 대답이었다.
호로비츠가 그랬듯이 미켈란젤리가 자신의 피아노를 전 세계로 가지고 다닌 일화는 유명하다. 피아노는 진동이나 기온 변화를 겪으면 세심하게 조율해야 하고 메커니즘이 손상되기 쉬운데다 운송료도 만만치 않기 때문에 피아노를 가지고 다니는 연주가란 상상하기 힘들다. 그러나 미켈란젤리의 스타인웨이는 그가 가는 곳마다 트럭이나 비행기에 실려 전속 조율사와 함께 그를 따라다녔다. 어쩌다 피아노를 가져가지 못할 경우에는 악기 선택에 매우 까다로운 주문을 하였다.
한 번은 그가 일본에서 예정된 첫날 공연을 취소한 적이 있었다. 그의 피아노가 일본까지의 긴 여정으로 상태가 좋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러자 주최 측은 그의 여권을 압류하고 그에게 상당한 위약금을 부과하는 등 감정적으로 대응했다. 미켈란젤리는 그 후 일본에서의 연주회는 물론 방문도 절대 하지 않았다. ◀미켈란젤리의 이 사진을 보면 냉혈, 오만, 카리스마 등의 단어가 떠오른다. 그룹 퀸의 전설적인 보컬 프레디 머큐리를 닮았는데 두 사람은 .오만한 성격 등 판박이 같다.
미켈란젤리의 이러한 행동에 대해 많은 평론가들은 그의 성격을 거론하고 있다. 그가 보기 드문 이상주의자이며 완벽주의자라는 것이다. 그래서 조금이라도 성에 차지 않거나 불순물이 섞인다면 결코 인정하려 들지 않았다는 것이다. 미켈란젤리는 사람들과 잘 사귀지 못했다. 오랫동안 그와 친분을 나누었던 지휘자 카를로 마리아 줄리니는 미켈란젤리를 마리아 칼라스와 함께 예술과 삶 사이에 괴리가 있었던 예술가로 손꼽은 바 있다.
미켈란젤리는 얼음처럼 투명하고 빛처럼 화사한 음표들을 마구 쏟아내는 시원한 터치가 일품이다. 미켈란젤리는 연주회용 풀 사이즈 그랜드 피아노를 분해했다가 다시 조립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 있었다. 덕분에 피아노의 물리적 속성을 속속들이 잘 알았다. 생전에 그가 보여준 놀라울 만큼 정확하고 치밀한 연주는 이렇게 피아노의 물리적 속성을 잘 알고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미켈란젤리는 뛰어난 교육자였다. 말이 필요 없는 두 사람의 비르투오소. 마우리치오 폴리니와 마르타 아르헤리치가 그의 제자이다. 아르헤리치에게 한 기자가 스승으로부터 어떤 것을 배웠냐고 물었다. "음악에 관해선 아무것도 가르쳐주지 않았다. 맛있는 스파게티를 만들기 위한 국수 삶는 법, 산책하는 방법, 문학과 역사에 관한 것 등이 음악 레슨의 전부였다". 그러나 이와는 달리 폴리니는 스승을 극도로 존경했다. 사실 미켈란젤리는 아르헤리치를 신통치 않게 보아 별 가르침을 주지 않았는데, 훗날 아르헤리치가 ‘피아노의 여제’라는 말을 들을 만큼 세계적으로 유명해지자 그녀가 자신의 제자라고 자랑했다. 그러자 아르헤리치는 발끈해서 인터뷰에서 그런 대답을 한 것이다. 카를로 마리아 줄리니는 이렇게 증언했다. "그와 함께 식사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의 화제는 항상 예술에만 머물러 있었다. 그의 삶은 고요했지만 그의 예술은 마술과도 같았다."
아르투로 베네데티 미켈란젤리(1920-1995)
미켈란젤리 일화 - 천재로 인정받았으나 요주의 인물로 꼽혀
미켈란젤리만큼 다종다양한 직업을 가졌던 음악가는 없다. 그는 의사였고 전투비행기 조종사에다 카 레이서였다. 또한 스키의 명수였다.
― 그는 의사였다. 14세라는 믿기 힘든 나이에 베르디 음악원을 졸업한 뒤 6년간 의학을 공부하였다.
― 그는 조종사였다. 애국심에 불탄 청년이었고 나치를 혐오했던 그는 공군에 자원입대 2차 세계대전에 참전하여 전투기 조종사로 활약했다. 포로수용소에 8개월간 수감되었고 목숨을 건 탈출에 성공했다.
― 그는 카레이서였다. 자동차 경주 대회에 나가서 우승한 적도 있다. 그에겐 인체, 피아노, 전투기, 자동차 등 전혀 성격이 다른 물체들이 같은 성격의 것으로 보이는 재주를 가지고 있었다. 복잡한 것 같지만 질서 있게 움직이는 유기체라는 점에서 매한가지였던 것이다. 그 질서와 원리만 알면 아무리 복잡한 기계도 그에겐 간단했다.
― 그는 요리를 잘했다. 가장 큰 소원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그는 “그리스의 작은 식당에서 손님들을 대접하는 것”이라고 너스레를 떨었다. 그러나 그는 사람들과의 만남을 극히 꺼렸다. 한번은 콘서트를 마친 뒤 그의 사인을 받으려는 많은 팬들을 피해 창문을 통해 줄행랑을 치기도 했다.
― 한 대의 피아노를 완벽하게 분해하여 다시 완벽하게 조립할 줄 아는 연주자였다. 어느 누구도 미켈란젤리만큼 피아노의 메커니즘을 정확히 꿰뚫고 있는 사람은 없었다.
― 음악 전문가들 몇몇이 모여 유명 피아니스트들의 연주를 듣고 미스 터치가 몇 개가 나오는지 내기를 했다. 미켈란젤리의 연주에 돈을 건 사람은 돈을 따지 못했다. 그의 연주엔 단 하나의 미스 터치도 없었다. 미켈란젤리는 완벽주의자였다.
― 그는 걸핏하면 연주회를 취소해서 요주의 인물 1순위로 악명이 높았다. 손이 시려서 못해, 청중이 기침하니까 기분이 나빠서 못해, 애지중지하는 피아노의 상태가 안 좋아 못해 등등.
― 그는 칼 같은 성격이었다. 그토록 사랑했던 조국 이탈리아가 자신의 명예를 건드리는 짓을 하자 미련 없이 스위스로 망명했다. 일의 전말은 이렇다. 1968년, 미켈란젤리의 음반 작업 파트너였고 그가 투자했던 BDM사가 파산했다. 이탈리아 정부 당국은 그의 피아노 두 대를 압류했다. 격노한 미켈란젤리는 조국을 떠나기로 마음먹었다. 조국을 위하여 예술가의 지위를 버리고 목숨을 걸고 참전까지 한 미켈란젤리에게 자신의 분신인 피아노를 빼앗긴다는 것은 상상조차 하기 힘든 일이었다. 스위스 망명 후 그는 이탈리아 땅을 바라보고 오줌도 누지 않았다.^^ 그뿐인 줄 아는가? 자신의 연주회에 이탈리아인들이 입장하는 것은 절대 불허했다. 1975년에 열린 바티칸 연주회에선 8천 명에 달하는 이탈리아인을 몽땅 강제 퇴장시켜버렸다. 1993년에 열린 런던에서의 공연에서 주최 측이 몰래 80장의 표를 이탈리아인들에게 판매한 것을 알자 노발대발 공연을 취소시켜버렸다.
― 그는 어떤 경우에도 청중들 앞에서 웃지 않았다. 항상 근엄하고 오만한, 그래서 무섭게까지 느껴지는 인상을 지을 뿐이었다. 그래서 그의 사진 중에 빵긋 웃고 있는 사진은 단 한 장도 없다.
― 제5회 쇼팽 콩쿠르에서 미켈란젤리는 심사위원 중 한 명이었다. 심사 결과 자신이 생각한 1위와 2위가 뒤바뀌었다. 그는 심사위원 자리를 박차고 나가버렸다. 그가 민, 2위를 한 피아니스트는 블라디미르 아시케나지였다.
Arturo Benedetti Michelangeli Concert in Lugano, 1981 (complete)
1. [00:40] Beethoven, Piano Sonata No.12 in A flat major, Op.26 'Marcia funebre' (장송 행진곡)
2. [20:41] Beethoven, Piano Sonata No.11 in B flat major, Op.22
3. [47:27] Schubert, Piano Sonata in A minor D.53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