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트 살롱

존 슬론 - 도시의 매력을 담다

라라와복래 2014. 10. 21. 09:56

존 슬론

도시의 매력을 담다

레스까페(Rescape) 선동기

http://blog.naver.com/dkseon00/220143137785     2014.10.06

네이버 파워블로그 <레스까페>의 주인장인 선동기 님은 블로그에 올린 글과 그림을 모아 아트북스에서 <처음 만나는 그림>(2009)과 <나를 위한 하루 그림>(2012)을 펴내 베스트셀러에 올려놓았습니다.

 

꽤 오래전부터 소개하고 싶었던 화가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찌 된 영문이지 자꾸 미루게 되더군요. ​간혹 그림엽서를 쓸 때 한 장씩 올리곤 했는데 이러다가 영영 그를 지나치게 되는 것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마음이 답답할 때 저를 편하게 해주는 존 슬론(John French Sloan, 1871-1951)의 작품들 속에서 도시가 그렇게 삭막한 곳은 아니라는 그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습니다.

일요일, 머리 말리는 여인들 Sunday, Women Drying their Hair, oil on canvas, 1912

일요일, 머리를 감은 여인들이 옥상에 모여 따사로운 햇빛과 적당히 부는 바람에 젖은 머리를 맡겼습니다. ​도시를 지나온 바람은 여인들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기도 하고 줄에 걸린 빨래들을 흔들다 사라지고 있습니다. ​바람에 몸을 맡긴 사람도 빨래도 모두 즐거운 시간입니다. 사는 것이 풍요로워 보이는 여인들은 아니지만 건강해 보입니다. ​머리를 뒤로 한껏 넘기는 여인의 표정과 자세에서 젊은 꿈들이 일요일 햇빛 아래에서 익어 가는 것을 봅니다. ​여인들의 웃음소리와 채 마르지 않은 머리카락에서 흘러나오는 비누 향이 바람을 타고 저에게 건너오고 있습니다. ​볕 좋은 옥상의 빨랫줄에 나란히 걸려 축축해진 몸과 마음을 말리면 어떨까 싶은데, 생각이 있으신지요?

슬론은 미국 펜실베이니아 주 록 헤븐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비록 수입은 일정하지 않았지만 미술에 재능이 있는 사람이었는데 자신의 자녀들에게 어려서부터 그림을 그릴 수 있도록 분위기를 만들어 주었습니다. 열세 살 되던 해, 슬론은 필라델피아에 있는 고등학교에 입학했지만 열여섯이 되던 해 아버지가 신경쇠약에 걸려 일을 할 수 없게 되자 아버지와 두 여동생을 부양해야 하는 가장의 역할을 떠안게 됩니다. ​결국 그는 학교를 그만두고 서점이자 포스터를 파는 가게의 점원이 됩니다.

부활절 전야 Easter Eve, 81.3x60cm, oil on canvas, 1907

비가 내리는 부활절 전야입니다. 부활절을 축하하기 위해 꽃가게에 들렀습니다. ​조명 아래 꽃들은 화사하게 빛나고 있고 그 빛을 받은 여인의 얼굴도 꽃처럼 붉어졌습니다. ​그 모습을 바라보는 또 한 여인이 있습니다. 우산을 쓰지 않은 여인도 꽃을 살까 말까 고민하는 얼굴입니다. ​부활은 다시 태어나는 것을 말하는 것이지요. 그것은 그 이전의 것과의 완벽한 결별을 전제로 합니다. ​부활 전야, 꽃을 사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새로운 세상을 꿈꾸는 것 아닐까 싶습니다.

집안 상황이 좋은 것이 아니었지만 슬론은 점원으로 일하면서 많은 책을 읽을 수 있었고 펜으로 뒤러나 렘브란트의 작품을 모사하는 연습을 할 수 있었습니다. ​에칭에도 손을 댔는데 가게에서 꽤 많은 양의 작품을 팔 수 있었습니다. ​정식으로 미술 공부를 하지 않은 그였지만 타고난 재주가 대단했던 것이지요. ​몇 해 뒤 더 많은 급여를 받고 가게를 옮긴 슬론은 축하 카드와 달력을 디자인하는 한편 에칭 작업도 계속합니다. ​열아홉이 되던 해, 슬로은 스프링 가든 인스티튜트의 야간 드로잉 반에 입학하는데, 그의 첫 공식적인 미술 공부의 시작이었습니다.

사우스 비치의 해수욕객들 South Beach Bathers, 66x80.1cm, oil on canvas, / 1907/08

검은색 의상을 입은 여인이 등장하는 바람에 해변에 작은 소란이 일어났습니다. ​바람에 날아갈 것 같아 흰 모자를 손으로 잡고 있는 모습에는 매력이 넘쳐나고 있습니다. ​이 모습을 보는 사람들, 특히 남자들은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하고 있습니다. 같은 여인들이 봐도 대단한데 남자들은 오죽하겠나 싶습니다. 해변에서 공놀이를 하는 모습은 지금과 닮았지만 대부분의 색상이 검은색인 수영복 스타일은 확실히 ‘고전적’입니다. ​역시 여름 해변은 아이들과 젊은이들의 세상입니다. ​생각해보니 가을과 겨울 해변은 마음이 터질 것 같은 사람들의 것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림을 그리기 위해 보다 자유로운 시간을 확보할 생각으로 슬론은 프리랜서로 나섭니다. 그러나 수입은 보잘것없었습니다. ​다시 필라델피아 인콰이어 지의 미술부에서 삽화가로 일을 하게 된 그는 펜실베이니아 미술학교 야간반에 입학하는데 그를 지도한 선생님은 토머스 폴락 안슈츠 (Thomas Pollock Anshutz, 1851-1912)였습니다. ​1892년 크리스마스 파티에서 슬론은 화가 로버트 헨리를 만납니다. ​헨리는 슬론이 다시 유화로 돌아올 것이라고 확신했고 두 사람은 미술에 대한 생각을 공유하면서 헨리는 슬론의 멘토이자 평생 친구가 됩니다.

선거날 밤 Election night, 67x82cm, oil on canvas, 1907

선거가 끝나고 난 저녁의 상황처럼 보입니다. 종이를 말아 승리의 환호를 외치는 사람들의 모습이 여기저기 보입니다. ​승리를 축하하는 사람들은 꽃가루를 날리고 있고 모두들 그 열기에 휩싸여 정신없는 모습입니다. ​그 와중에 여인의 팔과 고개를 잡은 남자의 모습이 보입니다. ​치한처럼 보이지만 분위기를 본다면 달아오른 흥분에 물불 안 가리는 사람 아닐까 싶습니다. 저런 사람, 꼭 있습니다. ​경쟁에서 이기는 것은 즐거운 일입니다. 그러나 선거는 다릅니다. 우리는 선거 전과 후가 어떻게 다른지 너무 잘 알고 있습니다. ​선거에서 이겼다고 즐거워하는 날은 오늘 하루면 됩니다. ​그 다음 날부터 유권자들이 그림 속 사람들처럼 즐거워야 하는데…, 이긴 사람만 다음 선거까지 즐거웠던 것 같습니다.

친구 헨리는 슬론에게 마네, 할스, 고야, 벨라스케스 같은 유럽 화가들의 모사품을 보내주면서 격려하곤 했습니다. ​정말 좋은 친구였습니다. ​스물일곱이 되던 해, 사람 관계에 있어서 숙맥이었던 슬로은 안나라는 여인을 만나게 되는데 두 사람은 곧바로 사랑에 빠지고 맙니다. ​안나는 낮에는 백화점에서 일을 하고 저녁에는 사창가에서 일을 하는 여인이었습니다. ​알코올 중독까지 가지고 있는 그 여인을 슬론은 진정으로 사랑했고 3년 뒤 둘은 결혼하게 됩니다. ​서로에게 따뜻했지만 안나의 정신적인 불안정과 몸을 팔았다는 과거의 직업 때문에 둘 사이에는 자주 위기도 있었습니다.

분장하는 광대 Clown Making Up, 81.6x66cm, oil on canvas, 1910

작은 초 두 개를 켜 놓고 무대 출연을 앞둔 배우가 광대 분장을 하고 있습니다. ​일렁이는 촛불에 따라 배우를 둘러싸고 있는 어둠도 함께 흔들립니다. ​나의 얼굴을 감추고 다른 얼굴로 다른 세상을 사는 것, 어떤 기분일까요? ​광대 역할을 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원래 모습을 철저히 숨겨야 하는데 마음까지 감출 수 있을 때 진정한 배우가 되는 것이겠지요. ​할 수만 있다면 간혹 배우가 되어보고 싶습니다. 온몸을 무너뜨릴 것 같은 짐을 던져버리고 아주 다른 얼굴로 무대에 서고 싶습니다. ​결국 분장을 지우면 원래 있던 자리로 돌아 올 수밖에 없지만 그 순간만은 행복할 것 같거든요.

한 의사가 슬론에게 안나의 알코올 중독을 고칠 수 있는 방법을 제시했습니다. 그것은 일기를 쓰는 것이었습니다. ​그녀에 대한 가장 따뜻한 마음을 담아 일기를 쓰고 그것을 안나가 몰래 보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일기를 통해서 남편의 마음을 확인한 안나가 심리적인 안정을 찾을 수 있을 것이라는 것이 의사의 생각이었습니다. ​안나는 슬론이 자신을 떠날까봐 많은 걱정을 하고 있었죠. 실제로 1906년부터 1913년까지 슬론은 일기를 썼는데 처음의 의도와는 달리 자신이 흥미를 느끼는 것들과 활동 내용으로 채워지고 말았습니다. 안나가 일기를 보았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슬로은 참 괜찮은 남편이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맥솔리스 바 McSorley’s Bar, 66x81.3cm, oil on canvas, 1912

뉴욕에서 가장 오래된 아이리시 팝, 맥솔리스 바의 풍경입니다. 1854년 문을 연 이후 거의 120년간 오직 남자만 출입할 수 있었던 곳이라고 합니다. 참 이상한 고집이었군요. ​맥주잔을 놓고 이야기를 하는 두 남자의 모습은 단순하면서도 사람의 시선을 당기는 힘이 있습니다. 호주머니에 손을 넣은 모습이나 상대의 가슴에 손을 뻗은 모습 모두 생동감이 가득하게 때문이죠. 퇴근길에 잠시 저렇게 한잔하는 자리가 예전에는 많았습니다. ​그 시간을 통해서 상사와 후배 그리고 동료들과 많은 것을 나누고 했었지요. ​지금은 어쩌다 한 번 만들어지는 회식 자리도 서로가 부담스러워하는 시절이 되었습니다. ​신화는 사라지고 계약만 남은 시대입니다.

1903년, 슬론은 총 60점의 작품을 완성합니다. 그리고 다음 해 뉴욕으로 자리를 옮기는데 그의 걸작들이 만들어집니다. ​뉴욕에서 머물렀던 기간이 그에게는 가장 왕성한 작품 활동 시기였습니다. ​도시의 풍속과 창문을 통해서 바라본 이웃들 모습의 핵심을 묘사하는 데 탁월했던 그는, 사람들에게 알려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작품은 거의 팔리지 않았고 부족한 생활비 마련을 위해 프리랜서 삽화가 일을 계속해야 했습니다.

겨울, 저녁 6시 Six o’clock, Winter, 1912

저녁 6시, 해가 지고 난 뒤 푸른 하늘이 점차 검은색으로 덮이고 있습니다. ​바쁘게 돌아갈 곳을 향해 걷는 사람들 위로 사람을 가득 실은 기차가 긴 꼬리를 가진 짐승의 모습으로 멈춰 서 있습니다. ​겨울의 저녁 6시, 바람은 차갑지만 귀찮은 것들로부터 더 이상 시달리지 않아도 되는 시간입니다. ​끝내 놓아주지 않는 일들이 간혹 금요일 저녁 늦게까지 혹은 토요일까지 집요하게 따라 붙을 때도 있지만, 금요일 저녁 6시는 머리와 몸이 한없이 물러지기 시작하는 시간입니다. 간혹 매일이 금요일 저녁만 같았으면 하는 상상을 해봅니다. ​생각해보면 치열했기 때문에 금요일 저녁이 좋은 것이겠지요.

1913년 슬론은 아모리 쇼의 전시기획위원회 멤버로 활동하면서 작품을 전시합니다. ​그해 유명한 컬렉터 D앨버트 반즈가 그의 작품 한 점을 구입하는데 네 번째로 팔린 작품이었으니까 어지간히 작품 판매에는 재주가 없었던 것 같습니다. ​이때부터 슬론은 10년 가까이 그려 왔던 주제에서 조금씩 벗어나 새롭고 더 화려한 색상이 사용되는 풍경화를 제작하기 시작합니다. ​반 고흐의 영향을 받은 때문이었지요. 

봄비 Spring Rain ,51.4x66cm, oil on canvas, 1912

빗방울이 튈까봐 치마를 살짝 치켜든 여인 앞으로 중년의 사내가 우산도 없이 지나치고 있습니다. ​꽤 오래 걸은 듯 남자의 코트는 반 가까이 비에 젖었습니다. ​하늘도 건물도 여인이 옷차림과 우산도 모두 검고 무거운 색인데 잔디와 나뭇잎만큼은 초록입니다. ​물을 잔뜩 품은 초록은 생명들이 일제히 지르는 함성 같은 것이죠. ​가을비가 깊은 한숨을 담고 내렸다면 봄비는 재잘거리는 흥얼거림을 담았던 것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슬론은 1914년부터 아트 스튜턴트 리그에서 학생들을 지도하기 시작합니다. ​학생들은 슬론의 진정성과 실제 필요한 지식을 전달하는 그를 존경했습니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매서운 질책을 무서워했습니다. ​유명한 화가이지만 거의 작품을 판매하지 못한 슬론은 학생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너희들이 생활비를 버는 데 도움이 될 만한 것을 가르쳐줄 것이 없다.” ​어떻게 보면 자조 섞인 말이기도 하지만 화가가 되겠다는 제자들에게 생활비 버는 법을 가르치는 것도 이상한 일입니다.

지붕 위의 햇빛과 바람 Sun and Wind on the Roof, oil on canvas, 1915

흰 빨래가 바람에 날리고 있습니다. ​넓고 환한 곳이었으면 더욱 좋았겠지만 건물들로 가득 둘러싸인 옥상에 이런 공간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고마운 일입니다. ​붉은 건물들을 타고 오는 바람은 빨래를 출렁거리게 했고 빨래에서 떨어진 그림자들은 녹색으로 번져나고 있습니다. ​밑도 끝도 없이 맑은 바람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맨발의 여인이 지금 널고 있는 붉은 빨래, 자신의 마음을 담은 깃발 같습니다. 베란다 건조대에 걸려 마르는 빨래보다는 먼지가 조금 쌓여도 바람에 마른 빨래가 훨씬 좋습니다. ​아직도 널어야 할 마음의 빨래가 산더미 같은데, 언제까지 맑은 날이 이어질지 걱정입니다.

아메리카 인디언 미술과 그들이 치르는 의식에도 강한 흥미를 가지고 있던 슬론은 인디언 미술의 강력한 옹호자가 되었고, 프리다 칼로의 남편이자 멕시코 민중 화가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디에고 리베라를 초청, 1920년 미국에서 첫 전시회를 열기도 했습니다. ​슬론은 리베라를 두고 “이 대륙에서 옛 대가의 수준에 이른 유일한 화가”라는 말로 그를 평가했습니다. ​뉴욕의 도시를 그리던 슬론과 리베라의 만남은 그 자체로도 소설처럼 느껴집니다.

저녁식사 시간 Suppertime, oil on canvas, 1917

해가 지고 서쪽 하늘은 붉은 구름 몇 조각으로 장식되었습니다. ​집의 검은 그림자가 조금씩 길어지면서 하루가 저무는 순간입니다. 집집마다 불이 켜지기 시작했습니다. ​열린 문으로 저녁 준비를 하는 모습이 보입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위에 있는 사람을 생각하며 음식을 준비하는 모습에 가슴이 따뜻해집니다. ​진수성찬은 아니어도 등불 아래 식사를 같이 하는 것만으로도 행복했던 때가 있었습니다. ​그때보다 모든 것이 풍요로워지고 편해졌다고들 하는데 저녁을 혼자 먹는 사람들은 갈수록 늘고 있습니다. ​삶의 방식이 바뀌었다고 해도 기억하고 버리지 않아야 할 것들은 있습니다. ​그런 것 중에는 ‘저녁식사 시간’도 있습니다.

1943년, 40년을 넘게 같이 살아온 아내 안나가 관상동맥으로 세상을 떠납니다. 사랑으로 지켜 온 시간이었겠지요. ​그런데 다음 해 슬론은 헬렌이라는 여인과 재혼합니다. 그의 나이 일흔셋이었습니다. ​헬렌은 그의 작품 대부분을 보관하는 일을 맡고 있었는데, 아마 훗날을 대비해서 재혼을 한 것 아닌가 싶습니다. ​슬론은 1951년, 여든의 나이에 암으로 세상을 떠납니다. ​작품 하나를 완성하는 데 많은 시간이 걸렸던 슬론을 두고 친구 헨리는 ‘슬로우(slow)의 과거분사’라고 했습니다. ​언뜻 봐서는 대충 정리한 듯한 슬론의 작품은 사실 아주 많은 노력을 담은 것들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