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트 살롱

외젠 갈리엥 랄루 - 구아슈로 남은 파리의 가을과 겨울 거리

라라와복래 2014. 11. 5. 09:27

외젠 갈리엥 랄루

구아슈로 남은 파리의 가을과 겨울 거리

레스까페(Rescape) 선동기

http://blog.naver.com/dkseon00/140114330594     2010.09.08

네이버 블로그 <레스까페>의 주인장인 선동기 님은 블로그에 올린 글과 그림을 모아 <처음 만나는 그림>(아트북스, 2009)과 <아트 북스, 나를 위한 하루 그림>(2012), <그림 속 소녀의 웃음이 내 마음에>(을유문화사, 2017)을 펴내 베스트셀러에 올려놓았습니다. 전업 미술가가 아니면서도 ‘그림을 읽어주는 남자’ 선동기 님은, 그림 속에 담긴 이야기에 자신만의 상상을 더하게 함으로써 그림을 보다 흥미진진하게 감상하도록 이끌어줍니다.

 

계절이 바뀌는 언저리는 모든 것이 불안정합니다. 거기에 마음까지 다가올 계절에 대한 기대로 가득 차면 그 정도는 더 심해지죠. 마음을 조금 달랠 겸 가을과 겨울의 풍경을 담아보겠습니다. 그럼 마음도 조금 차분해지지 않겠습니까? 평생 동안 파리 시내의 사계를 담은 프랑스의 외젠 갈리엥 랄루(Eugene Galien Laloue, 1854–1941)의 작품을 만나봅니다.

파리의 공화국 광장 Place de la Repubilique, Paris

가을 저녁, 가로수는 여름을 무성하게 지내 왔다는 흔적으로 잎사귀 몇 개를 달고 서 있습니다. 조금 있으면 어두워질 시간, 모두들 바쁜 걸음입니다. 땅에 떨어져 있는 노란 단풍잎 몇 개를 보다가 고개를 들어 보니 다른 낙엽들은 상점 창가에 붙어 노랗고 붉은 전등이 되었습니다.

랄루는 몽마르트에서 아홉 남매의 맏이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는 무대 디자이너였는데 삼촌도 이와 관계된 일을 한 것으로 생각됩니다. 왜냐하면 나중에 파리 살롱전에 처음 출품할 때 아버지와 삼촌으로부터 그림을 배웠다고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아홉 남매, 참 대단한 부모님이셨군요.

파리의 거리 장면 A Paris Street Scene

방금 전에 비가 내렸던 모양입니다. 사람들마다 우산을 들었습니다. 정장을 한 사람들이 많은 것을 보니 혹시 극장 앞이 아닌가 싶습니다. 신문을 들고 아는 사람과 만나 이야기를 나누는 신사들과 여인들 사이로 꽃을 파는 어린아이들의 몸짓이 부산합니다. 가을에 비가 내리면 거리가 을씨년스러운데… 그림 속 파리 거리는 황금색으로 빛나고 있습니다.

랄루가 열여섯이 되던 해 아버지가 세상을 떠납니다. 학교를 다니던 그는 공부를 멈추고 가족의 생계를 위해 동네에 있는 공증사무소에 취직을 했습니다. 그러나 그 다음 해 보불전쟁이 일어나자 랄루는 이름까지 바꿔 군에 입대, 전쟁 끝 무렵에 전장에 나가게 됩니다. 그러나 전장의 참혹함은 랄루의 일생을 바꿔 놓았습니다.

샤틀레 광장 Place de Chatlet, 19x31.5cm, watercolor

이곳도 비가 내렸군요. 비가 멈추자 꽃 파는 아이들이 거리로 나왔지만 경찰에게 걸리고 말았습니다. 지금이나 그때나 거리에서 물건을 파는 것은 여전히 ‘한 소리’ 들어야 하는 모양입니다. 그렇다고 막무가내로 야단을 치는 모습은 아닙니다. 사람 사는 곳은 저런 모습이어야 하는데, 문득 지금의 우리를 돌아보게 됩니다.

피로 얼룩진 전쟁을 잊기 위해서 랄루는 화가가 되기로 결심을 합니다. 그것이 전쟁을 잊을 수 있는 길이라고 생각한 것이죠. 1874년, 스무 살의 랄루는 프랑스 철도회사에 삽화가로 취직을 합니다. 회사에서 랄루가 하는 일은 파리에서 지방으로 뻗어 가는 철로를 묘사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다보니 기차를 타고 지방을 다니는 경우가 많았겠지요. 한편으로 그는 풍경화를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랑 불바르 Le Grand Boulevard, 18.5x31cm, watercolor

그림 속 거리가 소극장이 많다는 그랑 불바르인가요? 랄루는 주로 가을과 겨울의 파리 모습을 담았습니다. 봄과 여름에는 거리의 풍경을 기록했는데, 이 기록 자체도 의미가 있다고 합니다. 마치 사진으로 찍어 놓은 듯한 풍경 속에는 당시의 거리 모습이 고스란히 남아 있습니다.

랄루가 공식적으로 미술 교육을 받았다는 기록은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일을 통해서 자연스럽게 실력이 늘어난 경우라고 할 수 있는데 재능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지요. 어쨌거나 랄루는 1876년 처음 전시회를 열고 다음 해 파리 살롱전에 작품을 출품합니다.

그랑 불바르 Le Grand Boulevard, 18.5x31cm, watercolor

자리를 옮겨 그랑 불바르의 저녁 모습을 보게 됩니다. 흐린 하늘 밑, 상점에서 흘러나오는 불빛이 비에 젖은 길 위에 낙엽처럼 떨어져 있습니다. 형태만 보이는 사물들을 감싸고 있는 것은 노란 불빛들입니다. 창백한 흰색 불빛보다는 저렇게 노란 불빛이 어울리는 계절이 가을이었군요.

랄루는 수채 물감이나 불투명 수채 물감인 구아슈(gouache)로 작업을 했습니다. 유화보다는 시간이 덜 걸렸고 가격도 적당했기 때문입니다. 처음 살롱전에 출품한 작품도 구아슈로 파리 시내를 묘사한 작품이었는데 구아슈는 그의 작품 제작에 가장 많이 사용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수채화는 물론 유화도 경지에 올라, 세 가지 재료에 모두 달통한 몇 안 되는 화가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개선문 L'Arc de Triomphe, 34x47cm, watercolor and gouache

세상에는 많은 개선문들이 있습니다. 간혹 외국 여행길에 개선문을 만나게 됩니다. 당대의 역사를 쥐락펴락하던 영웅들은 자신의 기록을 위해 문을 세웠습니다. 승자의 입장에서는 한없는 영광이고 기쁨이지만 한편으로 그것은 수많은 목숨과 바꾼 기록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개선문을 바라보는 제 눈길은 차갑습니다. 비가 훑고 지나간 거리 위, 개선문이 우두커니 흐린 가을 하늘을 이고 있습니다.

랄루의 작품은 사람들에게 인기가 있었습니다. 그가 그린 작품은 거의 모두 팔려 나갔고 금전적으로도 아주 여유 있는 생활을 할 수 있게 되었죠. 이 정도 되면 파리의 사교계에서 이름을 날릴 만도 한데, 괴짜는 아니었지만 랄루는 좀 특이한 사람이었습니다.

파리의 꽃시장 Paris, le Marché aux Fleurs, 21x33.7cm, gouache on board

센 강 옆으로 꽃시장이 열렸습니다. 계절은 깊은 가을이지만 좌판 위에는 오색의 꽃 잔치가 펼쳐졌습니다. 좌판 뒤에는 꽃을 담았던 화분들이 어지럽습니다, 길을 가던 여인들이 걸음을 멈췄습니다. 꽃을 사는 것은 분위기를 사는 것이지요. 어떤 분위기를 골라볼까, 여인의 시선은 꽃에서 떨어질 줄 모릅니다.

화실에 혼자 있기를 좋아했던 랄루였습니다. 보수적이었고 왕정주의자였으며 게임이나 술, 육체의 즐거움과도 거리를 두고 수도자처럼 살았습니다. 그런데 특이한 것은 가장 어린 동생부터 가장 언니 순서대로 세 자매와 차례로 결혼을 했다는 점입니다. 세 자매는 그의 옆집에서 함께 살았습니다. 이해가 되시는지요? 랄루에게는 뭔가 특별한 것이 있었을까요? 정말 모를 일입니다.

극장가 Place de Théâtre, watercolor and gouache

눈이 내렸군요. 건물에 쌓일 만큼의 양은 아니지만 길을 하얗게 덮을 정도는 되었습니다. 아직 떨어지지 못한 잎들이 보이는데 그 너머 분수는 마치 얼어버린 모습입니다. 문득 도시에 내리는 눈은 장식이 될 수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람마저 장식으로 만드는 도시인데 눈쯤이야….

랄루는 숨기를 좋아하는 성격이라고 하는데 대표적인 예가 그의 이름입니다. 그는 평생 5개의 이름을 가지고 살았습니다. 리벵(J. Lievin)이라는 이름은 보불전쟁 당시 만난 군인의 이름에서 가져온 것이고, 갈리아니 (E. Galiany)는 자신의 이름 갈렝을 비튼 것입니다. 뒤피 레옹(Duppy Leon)은 같은 동네 남자 이름이었는데 원래 그의 출생신고서에 있는 이름은 Gallien이었지만 일상에서는 Galien으로 썼으니까, 이것 역시 모를 일입니다. 뭐, 이름이 꼭 그렇게 중요한 것이겠습니까? 

눈을 맞으며 Under Snow, 19.1x31.8cm, gouache on paper

눈이 제법 내렸습니다. 아직도 바람에 실린 눈들은 잰걸음으로 거리를 지나가는 사람들 옷에 내려앉았습니다. 흐린 날씨 탓에 상점들은 벌써 불을 밝혔습니다. 얇은 쇠로 된 담장 위에 앉은 눈은 수평의 흰 선으로 남아 거리를 달려가는 바람의 흔적처럼 보입니다. 이제 한겨울입니다.

랄루가 유일하게 하는 운동이라고는 스케치를 위해 자전거를 타고 파리 시내를 나가는 것이었습니다. 다른 화가들은 여행을 좋아했지만, ‘야외에서 그림을 그리기 위해 진흙 밭을 걷고, 사람을 귀찮게 하는 풀섶 길 가는 것을 싫어했던’ 랄루였기 때문에 다른 도시와 국가의 풍경을 사진과 우편엽서를 보고 그렸습니다. 물론 사진을 보고 그리는 방법을 다른 화가들도 시작할 때였지요.

퐁뇌프 다리 Le Pont Neuf, 24.1x31.8cm, pencil, watercolor and gouache

‘퐁 뇌프’의 뜻이 ‘새로운 다리’라고 알고 있었는데 어떤 자료를 보니 수많은 다리 중 ‘9번째 다리’라는, 아주 싱거운 뜻의 이름이라고 되어 있었습니다. 불어사전을 보니 neuf가 아홉인 것은 맞더군요. 불어를 모르는 저에게는 헛갈리기 딱 좋은 이름입니다. 원래 뜻은 무언가요? 그나저나 다리 위로 마차도 달려오고 있고 짐을 실은 수레도 넘어오고 있는데 어쩌자고 부인들 걸음은 저리 늦을까요? (neuf에는 ‘새로운’이란 뜻도 있습니다. ‘퐁뇌프’는 센 강의 ‘9번째 다리’란 뜻입니다._라라와복래)

1889년까지 살롱전에 열정적으로 참여하던 랄루는 5년간 작품을 출품하지 않는 안식년을 갖습니다. 이 기간 동안 딸을 얻었다고 하는데, 1905년부터 다시 살롱전에 출품하기 시작한 것을 보면 보통의 성격은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혹시 확실한 아빠 노릇을 하기 위함이었을까요?

생동감 있는 파리 풍경 Vue de Paris Animée, 17.5x30cm, watercolor and gouache

이 거리도 비에 젖었군요. 거리는 사람들과 마차 그리고 전차로 아주 소란스럽습니다. 그러나 화면 앞에 서 있는 여인 주변으로는 한적한 공간이 있습니다. 그 공간은 사람들 속에 섞이지 못하고 제3자로 서서 보고 있는 느낌을 주는데, 랄루의 작품 대부분에서 그와 같은 구도를 봅니다. 사람들과 섞이지 못했던 그의 눈길이 화면에도 살아 있어서일까요?

1900년대 초 랄루의 작품 속에는 그가 살고 있던 당대의 모습이 정확하게 묘사되어 있습니다. 행복한 사람들의 모습과 확장 일로에 있는 파리의 시가지, 말이 끄는 마차와 처음 등장한 승합버스, 그리고 전차 등 벨 에포크(Belle Époque, ‘좋은 시대’라는 뜻.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에 걸쳐 파리는 과거에 볼 수 없었던 풍요와 평화를 누렸습니다. 예술ㆍ문화가 번창하고 거리에는 우아한 복장을 한 신사 숙녀가 넘쳐흘렀죠. 1900년대 초의 이런 파리를 아는 사람들은 한없는 애착심을 가지고 이 시대를 ‘벨 에포크’라고 불렀습니다._라라와복래) 시대의 파리 풍경이 작품 속에 살아 있습니다.

콩시에르주리의 꽃가게 The Flower Market at Le Conciergerie, 20x30cm, watercolor and gouache

탑이 보이는 건물이 콩시에르주리(프랑스 혁명 때 사형수를 수용한 감옥._라라와복래)이겠지요. 마리 앙투아네트가 처형당하기 전에 머물던 곳이라고 하는데, 그것은 이미 강물을 따라 흘러간 역사 속 이야기입니다. 단두대로 끌려가던 길 위에는 자동차가 등장했고, 사람들은 일상을 쫓기에 바쁩니다. 누군가는 그 건물에서 마리 앙투아네트를 떠올리겠지만 또 누군가는 그 앞에 펼쳐진 꽃에 마음이 더 기울겠지요.

20세기 초부터 20년간 랄루의 작품은 여러 도시에서 전시가 됩니다. 국제적으로 이름이 알려진 그의 작품은 영국과 미국의 화상들에게 인기가 좋았습니다. 또 그의 작품은 그의 뒤를 따르는 화가들에게도 많은 영감을 주었는데 에두아르드 코르테스가 대표적인 예가 되겠지요.

강가의 농부 Paysananne au bord de la rivière, 50.8x64.8cm

수채 물감과 구아슈뿐만 아니라 유화에서도 탁월한 실력을 보여준 랄루의 작품입니다. 밭에 일을 나가기 위해 강을 건너는 남편을 향해 아내는 손을 흔들고 있습니다. 그냥 손을 흔드는 것과 강을 사에 두고 흔드는 것은 간절함에서 차이가 있습니다. 차가 멀어질 때까지 손을 흔들던 기억과도 같은 것이겠지요. 예전에는 문 앞까지 나와서 다녀오라고 하던 아내는, 소파에 누워 ‘운전 조심하고 불 좀 끄고 가’ 하는 것으로 변했습니다. 강이 있는 곳으로 이사를 가야 할까 봅니다.

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랄루는 종군화가로 임명됩니다. 보불전쟁에 참가했던 그는 군복무가 면제되었고 사실 60의 나이는 너무 많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캔버스를 들고 전장을 누비면서 생생한 장면들을 그림으로 담아냈습니다. 애국심이 강했던 랄루, 맞습니다.

헌책방 Les Bouquinistes, c.1908, watercolor

1940년까지도 랄루의 작품 활동은 계속되었는데 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피난을 갔던 딸의 집에서 87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납니다. 살아서는 파리의 모습을 담는 데 평생을 바쳤으니 행복했겠지요. 어쩌면 2차 세계대전이 가져온 그 끔찍한 지옥 같은 모습을 보지 않고 세상을 떠난 것이 더 행복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