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트 살롱

에곤 실레 - 창백한 에로티시즘

라라와복래 2014. 10. 11. 00:31

에곤 실레

창백한 에로티시즘

레스까페(Rescape) 선동기

http://blog.naver.com/dkseon00/140054576054   2008.08.13

네이버 파워블로그 <레스까페>의 주인장인 선동기 님은 블로그에 올린 글과 그림을 모아 아트북스에서 <처음 만나는 그림>(2009)과 <나를 위한 하루 그림>(2012)을 펴내 베스트셀러에 올려놓았습니다.

 

그림을 보다 보면 화가들의 이야기가 궁금해집니다. 음악가들과는 달리 화가들의 삶이 어떤 모습으로든 그의 작품 속에 녹아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녹아 있는 양의 문제는 있습니다. 에곤 실레(Egon Schiele, 1890-1918)는 예전부터 꼭 한번 자세히 들여다보아야지 했던 화가였습니다. 그런데 자꾸 미룰 수밖에 없었던 것이 그가 남긴 작품을 선뜻 내놓고 따져보기 민망해서입니다. 곱디고운 말 ‘에로티시즘’이라고 포장할 수도 있지만, 체모가 그대로 드러나 있는 작품을 놓고 이렇게 저렇게 말하기가 쉽지 않은 것도 어찌 보면 ‘자기 검열’에 익숙해져 있는 제 자신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늘 저의 글에 대해 사후 검열권을 행사하는 아내가 실레의 작품을 일별하다니 한마디 했습니다. “이건 좀 심한데….” 작품보다는 그의 생애에 대한 이야기 때문에 글이 길어지겠지만 그래도 스물여덟 해 짧은 그의 생을 따라가보도록 하겠습니다.  

파이터 Fighter, 1913

한 사내가 관객을 향해 눈을 부릅뜨고 도전적인 자세를 취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를 쳐다보는 관객들은 전의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오히려 불편한 마음이 먼저 일어납니다. 구불구불한 신체의 선과 중간 중간 보이는 붉은색은 강인함보다는 스스로 자해한 느낌을 줍니다. 에곤 실레의 누드가 성적인 묘사보다는 오히려 외롭고 불안하고 고통스러운 영혼의 모습을 옮긴 것이라고 본 평론가들이 있는데 적어도 이 작품에 대해서는 저도 동의의 한 표를 던집니다.

철도 직원의 아들로 태어난 실레는 어려서부터 미술에 대한 재능이 있었습니다. 태어난 곳에는 학교가 없었기 때문에 집에서 좀 떨어진 곳에 있는 학교를 다녔는데 나중에는 식구들이 그가 있는 곳으로 이사를 옵니다. 이때 실레의 아버지는 병중이었는데 병명은 매독이었습니다. 매독이라는 병의 마지막 단계는 정신착란이라고 합니다. 그의 아버지도 마지막에는 거의 미치다시피 했습니다.

게르티 실레 Gerti Schiele, 1909

실레가 여동생 게르티를 그린 작품입니다. 그의 스승이었던 클림트의 작품 분위기와 느낌이 같습니다. 흐르는 듯한 선과 세부 장식에 중점을 둔 표현 방법은 소위 ‘분할주의’ 기법입니다. 지그시 눈을 감고 고개를 돌리고 있는 사랑스러운 모습입니다.

아버지가 54살에 세상을 떠나고 난 뒤 실레와 그의 어머니 사이에는 커다란 균열이 생깁니다. 실레는 아버지에 대해 특별한 감정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훗날 그가 처남에게 남긴 편지에는 아버지의 죽음에 대해서 어머니가 많이 슬퍼하지 않았기 때문에 어머니를 싫어하게 되었다는 부분이 나옵니다. 글쎄요, 아무리 부모를 잃은 자식의 슬픔이 크다고 해도 배우자를 잃은 슬픔에 비할까요…. 그의 어머니는 훗날 그의 결혼식에도 참석하지 않았습니다. 청년기에 접어든 실레와 여동생 게르티와의 관계에 대해서는 근친상간의 혐의가 있습니다. 그가 16살, 여동생 게르티가 12살이던 어느 날, 둘은 하루 종일 열차를 타고 돌아다니다가 밤이 되자 더블 침대가 있는 호텔에 방 하나를 얻고 하룻밤을 보냈습니다. 또 한 번은 둘이 방문을 걸어 잠그고 있는 방에서 ‘무엇을 하는 중’인지를 보기 위해 아버지가 문을 부수고 들어간 적도 있었습니다. 정말 둘이 그랬을까요? 실레의 전기를 읽는 도중 자주 그의 자화상을 보게 되었습니다.

은둔자들 Hermits, 1912

검은 옷을 입은 두 명의 은둔자가 있습니다. 앞의 젊은 은둔자의 눈은 뭔가 새로움에 대한 욕구로 반짝이고 있지만 목이 긴 뒤의 은둔자는 상대적으로 지친 모습입니다. 앞의 은둔자는 실레이고 뒤에 있는 은둔자는 그의 스승인 클림트입니다. 클림트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실레의 표현이었습니다.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후 외삼촌이 그의 후견인이 됩니다. 외삼촌은 그를 전통적인 교육을 실시하는 학교에 보내고자 했지만 실레는 집안의 반대를 무릅쓰고 예술학교 입학시험에 합격해서 진학합니다. 2차 세계대전을 일으킨 아돌프 히틀러도 그 다음 해 실레가 다니는 학교에 응시했지만 낙방합니다. 히틀러가 만약 이 학교에 합격했더라면 역사는 또 다른 방향으로 흘렀겠지요.

거울 앞에서 누드를 그리는 실레 Schiele Drawing Nude before Mirror, 1910

예술학교에서 회화를 배웠지만 학교가 가지고 있는 보수적인 분위기에 실레는 실망합니다. 17살이 되던 해에 실레는 자신의 그림 몇 점을 들고 구스타프 클림트(Gustav Klimt, 1862-1918)를 찾아갑니다. 당시 클림트는 젊은 화가들의 ‘정신적 지주’ 역할을 하고 있었는데 실레의 작품을 보고 클림트는 “너무나 많은 재주를 가지고 있다.”라고 이야기하고는 실레의 작품과 그의 작품 몇 점을 교환합니다. 그 뒤로 실레에게 모델과 후원자가 될 수 있는 사람들을 소개해주기도 하고 남성복과 여성 신발, 우편엽서의 디자인 같은 일거리도 지원합니다. 이 정도면 클림트의 예정된 후계자는 실레라고 당시의 사람들이 믿었던 것은 당연합니다. 문제는 실레가 그 약속을 지키기 전에 세상을 떠났다는 것이죠.

검은 옷의 소녀 Girl in Black, 1911

동양화처럼 그려진 작품입니다. 붉은색과 검은색의 농담으로만 묘사된 가냘픈 여인의 몸과 깊은 눈은, 전체는 아니지만 부분적으로 실레의 가정환경과 성장 과정이 그의 작품에 영향을 주었다는 평가의 한 증거인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쓸쓸해 보이니까요.

전시회 출품을 권유한 클림트의 말에 따라 19살이 되던 해 작품 4점을 출품합니다. 그 전시회에서 실레는 뭉크, 고흐와도 알게 됩니다. 그러나 이때부터 실레는 사춘기 아이들 특히 소녀들에게 강한 호기심을 보입니다. 그의 작품 주제로 사춘기 소녀들의 누드가 자주 등장하는데 어떤 작품들은 아주 에로틱합니다. 기록에는 돈이 없던 그가 흥청망청 돈을 쓰기 시작했는데, 포르노 그림을 수집하는 사람들에게 그런 그림을 팔았기 때문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정말 그랬을까요? 정말 그랬습니까… 실레 선생님?

붉은 블라우스를 입고 다리를 세운 발리 Wally in Red Blouse with Raised Knee, 1913

다리를 세우고 물끄러미 관객을 쳐다보고 있는 여인의 모습은 사람을 당혹스럽게 합니다. 그의 누드에서 제가 가장 관심 있게 본 것은 그림 속 여인들의 진지한 눈입니다. 당당하게 정면을 응시하는 눈은, 보는 사람에게 묘한 긴장감을 주기 때문입니다.

21살이 되던 해 17살이던 발리(Valerie라고도 표시된 자료가 있습니다)를 만납니다. 그녀는 스승 클림트의 모델이었는데 클림트의 ‘여자’ 중 한 명이었을 것이라고 합니다. 실레의 모델을 서주다가 둘은 동거에 들어갑니다. 그러나 주위의 시선이 곱지 못했고 또 가진 돈도 별로 없어서 둘은 남부 보헤미아 지방으로 이사를 갔는데 그곳은 실레 어머니의 고향이었습니다. 친척들이 사는 곳이었지만 여기에서도 두 사람의 생활 태도에 주위 사람들이 못마땅해했는데, 십대 소녀들을 모델로 채용한 것을 그곳 주민들은 싫어했습니다. 실제로 의심스러운 구석이 있었던 모양입니다.

연인들 Lovers, 1914

고개를 쳐들고 바라보는 남자의 얼굴에는 수많은 선들이 있습니다. 이 선은 그림 전체에 가득합니다. 무슨 의미일까? 저의 머리를 짚어보았지만 알 수가 없습니다. 색채보다는 선을 중요하게 여긴 그의 다른 몇몇 작품들과 같은 것이라고 보면 단순해지지만 적어도 이 작품에서만큼은 얼굴에 그려진 선 하나씩을 실레의 고민과 갈등이라고 보기로 했습니다. 작품을 그리던 시기의 그가 그랬기 때문입니다.

어머니의 고향에서 다시 빈 근처로 이사를 했는데 화실을 빌리는 비용도 비싸지 않았고 주변 환경도 좋았던 모양입니다. 그러나 그의 집은 그 마을 불량 청소년들의 집합소가 되었고 이런 그들의 생활 태도가 또다시 그곳 주민들의 분노를 삽니다. 결국 나이 어린 여자아이를 유혹했다는 죄명으로 경찰에 체포됩니다. 체포된 실레와 함께 경찰이 그의 화실을 수색했는데 경찰이 보기에 포르노라고 판단되는 100여 점의 그림을 찾아냅니다. 어디까지가 맞는 이야기인가요, 실레 선생님?

성 세바스찬 모습의 자화상 Self-portrait as St. Sebastian, 1914

성 세바스찬은 로마 황제의 근위대장이었는데 기독교인이었습니다. 나중에 기독교인이라는 사실이 발각되어 온몸에 화살을 맞고 죽음을 맞습니다. 그림 속에 자주 등장하는 주제인데 여기에서는 실레가 그 역할을 대신하고 있습니다. 천성적으로 부끄럼을 잘 타고 감성적이었지만 자신의 재능에 대한 강한 자부심으로 자기중심적인 사고를 갖고 있던 실레다운 작품입니다.

재판을 기다리던 중 실레의 무죄 주장이 받아들여집니다. 어린 여자아이를 유혹, 납치했다는 죄에 대해서는 무죄가 선언되었지만 ‘야한 작품’을 아이들이 쉽게 볼 수 있는 곳에 전시했다는 죄로 24일의 감금형을 선고 받습니다. 판결이 날 때까지 21일을 감옥에 있었기 때문에 3일을 더 있다가 출소했는데, 치안판사는 판결을 내리면서 수많은 사람이 보는 앞에서 그의 작품 하나를 들어 촛불로 태웁니다. 화풀이였을까요? 아니면 경고였을까요? 그러나 실레는 감옥에 있는 동안 12편의 작품을 만드는데 작품에 쓰여 있는 실레의 글을 읽어보면 이 사건에 대해 자신이 죄가 없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 나는 죄가 없다. 깨끗하다. 예술가를 가두는 것은 죄악이다. 자라나는 싹을 죽이는 일이다. …’ 이 사건이 그의 경력이나 성격에 영향을 주지는 못했습니다. 오히려 보수적인 사회에 의한 희생양이었다는 명백한 증거로 사용되었습니다. 사실 실레에 대한 재판 결과는 당시 기준으로 대단한 행운에 속하는 가벼운 벌이었다고 합니다.

죽음과 소녀 Death and Girl, 1915

암울한 배경을 두고 죽음의 신이 소녀를 안고 있습니다. 죽음의 신은 울 것 같은 표정입니다. 아쉬움과 허탈함이 두 눈을 가득 채우고 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죽음의 신은 실레이고 안고 있는 소녀는 그의 여인 발리이기 때문입니다.

감옥에서 나온 그는 빈으로 다시 이사를 갑니다. 그가 새로 얻은 화실의 길 건너편에 열쇠 만드는 기술자이자 청교도였던 요한이라는 사람의 가족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에게는 딸이 둘 있었는데 큰딸은 에디트, 둘째 딸은 아들레였습니다. 처음에는 두 자매 모두에게 관심이 있었는데, 에디트와 결혼을 할 생각을 합니다. 실레 선생님! 그럼 그동안 같이 살던 발리는요? 실레는 매일 같이 당구를 치던 카페로 발리를 불러내서 에디트와의 결혼 이야기를 하고는 편지를 한 통 건네줍니다. 그 편지에는 자기는 에디트와 결혼을 해도 매년 여름휴가는 발리, 당신과 함께 보내겠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습니다. 이런 경우를 뭐라고 해야 하는지….

발리는 바로 짐을 싸 들고 나가는데 그 뒤 다시 두 사람은 만나지 못합니다. 발리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이 별로 없습니다. 실레와 헤어지고 난 후 적십자사의 간호사로 일을 하다가 2년 후 크리스마스 직전, 군인병원에서 성홍열로 세상을 떠난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녀의 그때 나이는 겨우 23살이었습니다. 위의 ‘죽음과 소녀’는 발리와 헤어지고 실레가 그린 작품입니다. 발리의 모습은 이미 그려 놓은 것이었고 자신의 모습만 추가한 것이라고 합니다. 그 정도였다면 무엇 하러 헤어졌는지 실레와 맞장 한번 뜨고 싶습니다.

초록 스타킹을 신고 누워 있는 여인 Reclining Woman with Green Stocking, 1917

이 작품도 다른 누드처럼 흐르는 선과 간단한 색으로 처리했습니다. 역시 모델은 정면으로 관객을 보고 있습니다. 모딜리아니의 누드가 정체를 알 수 없는 눈으로 인해서 묘한 느낌을 준다면 실레의 누드는 모델의 눈으로 인해서 오히려 에로티시즘으로부터 벗어나는 느낌을 받습니다. 몸짓이 ‘야하다고’ 모두 에로티시즘은 아닌 것 같습니다. 아닌가요? 이 모델의 이름은 아들레이고 실레의 처제입니다. 물론 언니와 결혼 전에는 그가 관심을 가지고 있던 여인 중의 한 명이지만 처제를 저렇게 그릴 수 있는 실레도 대단합니다.

에디트 실레 Edith Shiele, Seated, 1915

물끄러미 관객을 쳐다보고 있는 사람은 실레의 아내 에디트입니다. 슬픈 듯한 큰 눈을 보고 있으면 많은 이야기를 할 듯싶은데, 꼭 다문 잎은 쉽게 속내를 보이지 않을 것 같습니다.

여자 집안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에디트와 결혼식을 올렸지만 결혼한 지 4일 만에 실레는 1차 세계대전 참전을 위해 군대에 징집됩니다. 군대에 가게 된 것을 알고 결혼했는지는 확실하지 않습니다. 다행히 군대 생활은 잘 풀렸는데 그의 예술가 재능을 알아본 장교의 도움이 컸습니다. 러시아 포로들을 감시하는 감시병으로 복무하다가 나중에는 포로가 된 러시아 장교들을 위한 캠프의 점원으로 자리를 옮깁니다. 시간이 나자 스케치와 회화 작업에 몰두합니다. 군 복무가 끝나갈 무렵에는 군인들에게 담배, 음식, 그리고 음료를 공급하는 일을 맡게 되는데 제 기준으로 보면 군대 간 것이 아니고 놀러 간 것 같습니다.

화가의 아내 Artist’s Wife, 1917

실레의 아내 에디트입니다. 앞의 그림과는 2년의 시차가 있는데 저는 이 그림을 보고 웃고 말았습니다. 결혼 2년 만에 눈매가 좀 사나워진 것처럼 보였기 때문입니다. 2년 전보다 포즈는 농염해졌고 분위기는 좀 ‘아줌마다워’졌습니다. ‘아줌마답다’라는 말이 가지고 있는 그 심오한 뜻을 실레는 이해할 수 있을까요?

전쟁이 끝나고 빈으로 돌아온 후, 실레의 작품은 성숙한 맛과 재능이 꽉 차 있었습니다. 젊은 오스트리아 작가를 대표하는 사람으로 인정을 받았고 급기야는 스톡홀름과 코펜하겐에서 그의 전시화가 오스트리아 정부 주도로 열리게 되었습니다. 1차 세계대전 후 오스트리아는 스웨덴과 덴마크 같은 중립국들과의 관계를 보다 좋게 유지해야 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실레는 일종의 문화 사절이었던 셈이죠. 어쨌거나 전시회를 통해서 큰돈을 모으게 되는데 1918년 빈 전시회에 50점을 출품했을 때 실레의 작품 가격은 평소의 3배까지 인상되었습니다. 드디어 실레는 큰 저택과 화실로 이사를 가게 됩니다. 그동안의 가난에서 완전히 벗어난 것이죠. 

포옹 Embrace, 1917

이전까지의 작품에 비하면 약간의 변화가 있습니다. 색상은 좀 더 화려해지고 이미지도 친밀하게 다가옵니다. 몽환적인 배경이지만 두 사람의 체온이 느껴지는 것 같습니다. 개인적으로는 클림트의 ‘키스’보다 이 작품이 더 좋습니다. 따듯한 생명력이 화폭 가득 뿜어져 나오기 때문입니다.

실레의 작품을 보면 누드의 경우 혼자인 경우가 많은데 두 사람의 누드인 경우, 대부분 남자는 실레 자신인데, 나란히 있기보다는 위쪽이나 아래쪽에 자신을 위치시키는 구도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또 관객들의 혼란을 유도하기 위해서 팔과 다리의 위치나 모습을 무시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작품 중에는 팔이나 발의 숫자가 안 맞는 경우나 불가능한 자세가 보이는 경우가 있습니다. 실레는 혹시 자신이 그리고 싶은 것만 그렸던 것은 아닐까요?

엎드려 있는 여인의 누드 Female Nude Lying on Her Stomach, 1917

우리에게 가장 친숙한 실레의 작품이 아닐까 싶습니다. 제 눈에는 그의 작품 중에서 가장 에로티시즘이 강하게 나타난 작품입니다. 육감적인 선의 흐름, 살짝 치켜 뜬 눈매, 그리고 아무런 장식이 없는 배경은 모든 시선을 여인에게 쏠리게 하고 있습니다. 궁금한 것이 있습니다. 몸에 색깔이 묻은 것은 실제 모델의 몸에 묻은 색깔일까요, 아니면 실레가 작업 중에 그려 넣은 것일까요? 저는 그림을 그리기 전에 실제로 모델의 몸에 색을 칠했다는 상상을 해보았습니다. 그쪽이 더 실레답지 않을까요?

부부 Seated, Egon and Edith, 1915

실레 부부의 모습입니다, 뒤엉킨 팔과 다리의 위치는 부자연스럽습니다. 남편을 필사적으로 안고 있는 아내의 모습에 비해 남편의 얼굴은 누군가를 향해 눈을 부릅뜨고 있습니다. 아내를 지키고자 하는 것인지, 세상을 향한 불만인지…. 눈빛은 너무 많은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실레가 간신히 자리를 잡았을 즈음 불행이 찾아왔습니다. 1918년 가을, 당시 유럽 인구 중 2,000만 명 이상이 걸렸던 스페인 독감이 빈에 도착했습니다. 임신 6개월이던 아내 에디트가 그만 그 독감에 걸려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실레에게는 기가 막힐 노릇이었겠지요. 그리고 실레도 3일 후 28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납니다. 역시 독감이었습니다.

가족 The Family, 1918

여기 가족사진이 한 장 있습니다. 그러나 제가 아는 한, 아이를 낳기 전에 부부가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아이는 실레가 그려 넣었을 것입니다. 그래도 괜찮습니다. 실레가 꿈꾸던 가족의 모습이 이런 것 아닐까 싶기 때문입니다. 실레는 생전에 3,000점이 넘는 작품을 남겼는데, 그중 유화가 300점에 이릅니다. 활동한 기간을 계산해보면 대단한 양입니다. 그래도 실레는 위의 모습으로 지금도 열심히 가족을 그리고 있을 것입니다. 더 이상 ‘괴상하고 기분 나쁜’ 사람이라는 말도 듣지 않으면서 말이죠.

실레가 그린 누드들을 다시 보았습니다. 창백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창백한 에로티시즘 ― 제가 실레를 정의하는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