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72년 <아이다>를 발표한 후 베르디는 더 이상 오페라를 쓰지 않았다. 농장을 경영하면서 이미 작곡한 오페라를 다시 손보는 일로 시간을 보냈다. 그가 이렇게 오랫동안 오페라를 쓰지 않은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그중에서 바그너의 인기가 가장 큰 이유가 아니었을까 싶다. 당시 바그너는 오페라를 넘어 종합예술의 한 형태인 ‘음악극’의 개념을 널리 설파해 큰 공감을 얻고 있었다. 이런 바그너의 존재가 베르디에게 큰 부담이 되었던 것 같다.
그러다가 15년 만인 1887년에 셰익스피어의 비극을 바탕으로 한 <오텔로>를 내놓았다. 베르디는 셰익스피어의 열렬한 팬이었다고 한다. 베개 밑에 늘 그의 희곡을 두고 틈나는 대로 읽으면서 “어떻게 이토록 훌륭한 극본을 쓸 수 있을까? 인생은 어차피 한 편의 연극이라고 하지만 어떻게 우리 인간들의 심정을 이렇게 정확하게 표현했는지 정말 대단하다.”라고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고 한다. ▶베르디
그러니 당연히 이 피 끓는 드라마를 오페라로 만들고 싶은 욕심이 생겼을 것이다. 작곡 활동의 초기에 해당되던 1847년, 베르디는 셰익스피어의 4대 비극 중 하나인 <맥베스>를 오페라로 만들었다. 그리고 그로부터 무려 40년이 지난 1887년에 역시 4대 비극 중의 하나인 <오텔로>를 세상에 내놓았다. 똑같이 셰익스피어의 비극을 바탕으로 하고 있지만 <맥베스>와 <오텔로>의 음악에는 두 작품 사이에 놓인 시간의 간극만큼이나 엄청난 차이가 존재한다. <아이다>를 발표한 후 15년이 흐르는 동안 오페라 무대를 둘러싼 환경이나 베르디 개인의 음악관에 엄청난 변화가 있었으리라 추측된다. 그 변화를 베르디는 말년작인 <오텔로>에서 분명하게 보여주었다. 이 작품에서 그가 추구한 것은 그동안 이탈리아 오페라의 전형으로 여겨져 오던 이른바 ‘번호 오페라’로부터 탈피한 것이다.
낭만주의 이탈리아 오페라들은 레치타티보(말하듯이 노래하는 것, 말과 노래와 중간적인 성격을 갖고 있다) 사이에 아리아, 중창, 합창이 들어가는 식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각각의 음악에는 나오는 순서에 따라 번호가 매겨져 있는데, 그래서 이것을 ‘번호 오페라’라고 부른다. ‘번호 오페라’라는 말은 오페라가 극적으로 탄탄한 구성력을 갖기보다 그저 ‘노래들의 나열’에 불과하다는 것을 암시한다. 관객들은 이미 알고 있는 그렇고 그런 줄거리에 얹힌 ‘노래’를 듣기 위해 오페라 극장에 갔다.
베르디는 연극에 대한 끊임없는 관심과 집념을 가진 작곡가였다. 그는 오페라에서 노래 못지않게 극적인 요소가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오케스트라의 역할을 대폭 강화했다. 그의 오페라에서 오케스트라는 극적인 분위기를 효과적으로 조성하는 역할을 한다. 오페라가 아름다운 노래의 나열이기만 할 때는 오케스트라가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다. 아르페지오나 화음으로 노래를 받쳐주는 말 그대로 ‘반주’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다가 베르디의 오페라에 이르러 오케스트라가 자신의 드라마를 연출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르디의 오페라는 엄밀하게 얘기하자면 ‘번호 오페라’였다. 그런데 <오텔로>에서 이것을 탈피했는데, 여기에는 바그너의 영향이 결정적이지 않았나 추측된다. 바그너는 자신의 오페라를 ‘음악극’이라고 불렀다. 그의 음악극은 기존의 오페라처럼 ‘음악을 위한 극’이 아니다. 음악과 연극이 완전히 하나로 합쳐진 종합예술이다. 노래는 언어와 유기적으로 결합되어 있고, 오케스트라는 영화의 배경음악같이 끊임없이 흘러간다.
<탄호이저>나 <로엔그린> 같은 초기작을 제외하고, 바그너의 음악극에는 레치타티보와 아리아의 구분이 없다. 아니, 아리아라고 부를 만한 것이 없다. 번호 오페라에서는 중간에 노래 몇 곡이 빠져도 별문제가 없지만, 바그너 음악극은 처음부터 끝까지 중단 없이 계속 흘러가기 때문에 부분 생략 자체가 불가능하다. 이런 방식으로 레치타티보와 아리아가 번갈아 나오는 ‘번호 오페라’에서 탈피해 극 전체가 유기적인 통일성을 갖도록 했다.
<오텔로>의 음악 역시 바그너의 음악극처럼 끊임없이 흘러간다. 중간에 관객들이 박수를 칠 여지를 주지 않는다. 여기서 오케스트라는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노래의 선율을 따라가지 않는다. 극적 상황에 따라 독자적으로 움직이며 극적 분위기를 보다 효과적으로 드러내는 역할을 한다. 이런 오케스트라의 독자적인 역할은 거대한 폭풍이 몰아치는 1막의 도입부에서부터 빛을 발한다.
정명훈 지휘 Chorégies d'Orange 2014에서 처음으로 오텔로 역을 맡은 현재 인기 정상의 테너 로베르토 알라냐. 베네치아 공화국의 장군이며 키프로스 총독인 오텔로는 북아프리카의 무어인이라 검게 분장을 했다.
1막
1막의 첫 장면은 전쟁터로 나간 오텔로가 배를 타고 돌아오는 장면이다. 육지에서 오텔로의 배를 바라보는 사람들은 바다에 거대한 폭풍이 몰아쳐 그의 배가 위험에 처한 것을 보고 경악을 금치 못한다. 저음역의 현악기와 목관악기들이 종횡무진 상승과 하강을 반복하며 폭풍우가 몰아치는 광경을 그린다. 번개가 번쩍이고, 천둥이 친다. 이 대목에서는 타악기와 금관악기가 눈부신 역할을 한다. 지도자인 오텔로가 죽었으면 어떻게 하나 사람들의 마음속에 불안이 밀려온다. 저음역의 오르간이 지속적으로 불협화음을 울려 불길함을 증폭시킨다. 하지만 곧 이것이 기우에 불과했음이 밝혀진다. 폭풍우가 물러가고 바다가 다시 잔잔해진 것이다. 목관악기들이 잦아들고, 사람들의 마음을 불안하게 하던 오르간의 불협화음도 사라진다. 그러자 비로소 사람들이 안도의 한숨을 쉰다.
곧 오텔로가 금관악기의 울림과 함께 등장해 전쟁에서의 승리를 자축하고, 백성들은 기쁨에 가득 찬 합창을 부른다. 음산하던 오케스트라도 어느덧 화려한 승리의 팡파르로 바뀐다. 하지만 이 와중에 속으로 딴생각을 품고 있는 사람이 있다. 바로 천하의 악인 이아고이다. 이아고는 오텔로를 파멸로 빠뜨리기 위해 음모를 꾸미고 있다. 부관 카시오가 오텔로의 아내 데스데모나와 불륜의 관계를 맺고 있는 것처럼 꾸미는 것이다. 이아고는 카시오를 술에 잔뜩 취하게 만드는데 이때 부르는 ‘축배의 노래’는 이런 이아고의 음모를 그대로 드러내고 있다. 노래는 바순의 술에 취한 듯 뒤뚱거리는 반주로 시작한다. 흥겨움을 가장한 이아고의 음모는 수상하게 미끄러져 내리는 반복되는 하강 선율에 효과적으로 드러나 있다. 멜로디가 미끄러져 내릴 때 오케스트라도 같이 미끄러져 내린다.
한바탕 소란이 지나가고 밤의 정적이 찾아온다. 데스데모나가 오텔로와 함께 ‘사랑의 이중창’을 부른다. 낮은 음역의 첼로가 연주하는 서정적인 반주에 맞추어 오텔로가 데스데모나에 대한 사랑을 노래하자 데스데모나가 바이올린과 비올라 반주에 맞추어 이에 응답한다. 오페라 전체 중에서 가장 서정적이고 로맨틱한 이 장면에서는 오케스트라 역시 로맨틱한 분위기를 조성한다. 처음에 조용하게 전개되던 두 사람의 이중창은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격정적으로 바뀐다. 그러다가 “입맞춤”이라는 단어에 이르러 클라이맥스에 이른다.
‘사랑의 이중창’을 부르는 오텔로(로베르토 알라냐)와 데스데모나(인바 물라)
2막
2막은 이아고의 음모를 상징하는 바순과 첼로의 음산한 음형으로 시작한다. 곧이어 클라리넷과 비올라가 이 음산한 음형을 이어받는다. 카시오가 등장하자 이아고는 그에게 데스데모나를 찾아가 도움을 청하라고 한다. 그리고 그가 퇴장하자 자기의 본심을 털어놓는다. 그 유명한 ‘나는 나를 잔인하게 만든 신을 믿는다’이다. 여기서 이아고와 오케스트라는 서로 대화를 하는 것처럼 움직인다. 이아고가 자신의 사악한 본성을 고백할 때마다 오케스트라가 반응한다. 이아고가 부른 멜로디를 반복하거나 아니면 격렬하게 저항하거나 동조하는 방식으로. 이아고가 “헛된 장난으로 죽음을 부르겠지”에서 “죽음(morte)”이라는 단어를 말하는 순간, 단칼에 내려치는 듯한 오케스트라의 일성(一聲)이 울린다. “그리고 그 뒤엔?”이라고 자문한 후에는 저음역의 음산한 화음으로, “죽음은 무의미한 것”이라고 말한 후에는 고음역의 금관악기의 불협화음으로 화답한다.
오텔로가 들어오자 이아고가 드디어 자신의 계획을 펼치기 시작한다. 이아고는 슬쩍 오텔로에게 데스데모나의 부정을 암시하는 듯한 말을 한다. 오텔로가 이를 구체적으로 알고 싶어 하지만 이아고는 짐짓 데스데모나를 감싸려는 듯 말을 얼버무린다. 이 때문에 오텔로가 화를 내자 오케스트라 역시 격렬하게 폭발한다. 오텔로가 아내에 대한 의심으로 심란해하고 있을 때 밖에서 백성들의 즐거운 합창소리가 들린다. 비극의 전조를 보여주는 무대 위와는 완전히 대조적인 상황이다. 베르디는 이 콘트라스트를 극명하게 그리기 위해 백성들의 노래에는 만돌린과 기타와 같은 서민적인 악기를 집어넣었다.▶오텔로와 이아고. 바리톤 고성현이 이아고 역을 맡았다.
이때 이런 상황을 전혀 모르는 데스데모나가 들어와 오텔로에게 카시오를 용서해줄 것을 간청한다. 오텔로의 의심이 깊어지는 가운데 이아고와 그의 아내이자 데스데모나의 시녀인 에밀리아가 말다툼을 벌인다. 데스데모나가 오텔로에게 물러가겠다고 말하는 장면에서 바이올린과 오보에가 조용한 선율을 연주한다. 하지만 그녀가 퇴장하고 난 후 오케스트라의 음색이 급격히 어두워진다. 오텔로가 데스데모나의 부정을 암시하는 이아고의 말을 되새길 때, 바순과 바이올린이 끊임없이 울리며 그의 의심을 증폭시킨다. 이렇게 조심스럽게 시작된 의심은 이아고에 대한 분노의 폭발로 이어지고, 오케스트라 악기 전체가 함께 폭발한다.
3막
3막은 2막에서 이아고가 오텔로의 질투심을 부추기는 장면에서 연주되었던 선율을 중심으로 하는 짧은 전주곡으로 시작한다. 이렇게 음산한 분위기는 데스데모나가 등장하자 사라진다. 오페라에서 데스데모나의 존재는 순결을 상징한다. 그래서 그녀가 등장할 때면 오케스트라 소리가 순하고 부드러워진다. 하지만 이런 분위기는 오텔로가 그녀에 대한 의심을 표현하는 순간 돌변한다. 오케스트라가 다시 폭발하기 시작한 것이다. 특히 막의 후반부에서 금관악기를 동반한 오케스트라의 울림이 격렬하다. 오텔로의 마음속에 소용돌이치는 질투와 배신감이 끊임없이 울리는 오케스트라 울림 속에 고스란히 녹아 있다. 오텔로는 마침내 복수를 하기로 결심한다.
4막
4막의 배경은 데스데모나의 침실이다. 이 막은 잉글리시 호른과 오보에가 주도하는 목관악기들의 전주곡으로 시작한다. 곧 비극을 맞을 데스데모나의 운명을 예시하듯 멜로디가 슬프고 애절하다. 낮은 음역의 클라리넷이 비극적인 분위기를 조장한다. 데스데모나는 자기를 버린 남자를 사랑한 한 여자의 슬픈 운명을 그린 ‘버들의 노래’를 부른다. 이 아리아에서는 잉글리시 호른 독주가 중요한 역할을 한다. 특유의 구슬픈 음색으로 데스데모나의 노래를 더욱 아름답고 애절하게 만든다. 특히 “노래하라. 버드나무여.”에서 데스데모나가 부르는 “노래하라(salce)”의 멜로디를 메아리처럼 따라서 연주하는 대목이 인상적이다. 그 후 데스데모나는 ‘아베 마리아’를 부르고 잠자리에 든다
데스데모나가 침대에 누웠을 때, 저음역의 현악기들이 불길한 주제를 연주하기 시작한다. 2막과 3막에서 이미 나왔던 그 주제이다. 오텔로가 데스데모나의 방으로 들어온다. 그가 데스데모나 곁으로 다가갈 때, 잉글리시 호른이 앞에 나왔던 ‘버들의 노래’의 편린을 연주한다. 오텔로는 데스데모나를 깨워 고백할 것이 있으면 지금 얘기하라고 한다. 이때 오케스트라가 앞에 나왔던 불길한 음형을 반복해서 연주한다. 오텔로의 추궁에 데스데모나는 자기는 결백하다고 한다. 데스데모나는 오텔로로부터 카시오가 죽었다는 말을 듣고 놀라고, 그 모습을 본 오텔로는 흥분해서 데스데모나를 목 졸라 죽인다. 처음에 낮고 음산하게 시작했던 오케스트라가 오텔로가 데스데모나를 죽이는 대목에서는 격렬하게 포효한다.
알렉상드르 마리 콜랭, <오텔로와 데스데모나>
곧 에밀리아가 들어와 오텔로가 데스데모나를 죽인 것을 보고 사람들을 부른다. 에밀리아는 오텔로에게 자기 남편의 모략에 데스데모나가 희생당했다는 사실을 밝힌다. 그러자 오텔로는 순결한 아내를 죽인 죄책감에 괴로워하며 간절하게 그녀의 이름을 부른다. 그때 잉글리시 호른이 데스데모나의 애절한 심정을 상기시키듯 ‘버들의 노래’의 편린을 연주한다. 결국 오텔로는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그가 죽기 직전, 1막에서 두 사람이 함께 불렀던 사랑의 이중창에 나온 ‘입맞춤’의 주제가 덧없이 등장했다 사라진다.
글 진회숙 (음악 칼럼니스트) 이화여대 음대 및 서울대 음대 대학원 졸업. 현재 서울시립교향악단 월간지 SPO 편집위원이며, 서울시향 ‘콘서트 미리 공부하기’를 비롯한 여러 클래식 강좌의 강사로 활동하고 있다. 평화방송 FM 음악공감 ‘진회숙의 일요 스페셜’의 진행자이다. 저서로 <모나리자. 모차르트를 만나다> 외 여러 권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