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 산책

브루크너 교향곡 5번(Bruckner, Symphony No.5 in B flat major, WAB 105)

라라와복래 2014. 11. 28. 13:54

Bruckner, Symphony No.5 in B flat major

브루크너 교향곡 5번

Anton Bruckner

1824-1896

Giuseppe Sinopoli, conductor

Staatskapelle Dresden

Semperoper, Dresden

1999.03

 

Giuseppe Sinopoli/Staatskapelle Dresden - Bruckner, Symphony No.5 in B flat major

[00:00] 1. Introduction. Adagio - Allegro [20:50] 2. Adagio. Sehr langsam [39:38] 3. Scherzo. Molto vivace (Schnell) - Trio. Im gleichen Tempo [53:08] 4. Finale. Adagio - Allegro moderato

 

브루크너는 교향곡 4번을 완성한 후 교향곡 5번의 작곡에 착수하기 전까지 베토벤의 교향곡들을 본격적으로 연구하는 시간을 가졌다. 아마도 그는 이 과정을 통해 교향곡 내부에서 형식이라는 그릇이 지니고 있는 의미에 대해 새롭고 확고한 신념을 체득했을 것이다. 브루크너는 이미 습작인 교향곡 0번 d단조를 포함해 4번까지 6곡의 교향곡을 발표했지만, 이들 작품에서 형식과 틀은 그리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지 않았다.

종교적인 내용이 되었건, 아니면 바그너에 대한 동경을 표현했건 간에 브루크너는 자신의 생각을 표현하기 위해서라면 나머지 부수적인 것들은 미련 없이 포기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이 때문에 하이든 이후로 이어져 내려오는 교향곡의 고전적인 통일성, 즉 각 악장을 이어주는 일관성이나 유기적인 고리의 결합 등은 내용의 확실한 표출을 위한 희생양이 되었던 것이다.

중세와 가톨릭, 그리고 코랄의 환상

브루크너의 작품들 가운데에서 교향곡 5번이 (미완성의 9번 교향곡을 제외한) 마지막 세 작품들만큼이나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이유는, 내용이 형식을 지배하지 않고 형식과 내용이 동등한 조화를 이루는 브루크너만의 방법을 명확히 제시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마지막 악장에서 화려하게 분출되는 코랄 선율과 함께 표피적인 모습만을 본 주변 사람들은 이 작품에 ‘중세’, ‘가톨릭’, 또는 ‘코랄’ 같은 종교적인 별명들을 지어주었다. 그러나 작곡가 자신은 이와 달리 5번을 가리켜 ‘환상곡 풍의 교향곡’이라고 표현했다. 이 표현에서는 5번을 통해 획득한 교향곡의 형식적 통일성에 대한 작곡가의 자신감이 드러난다. ▶오스트리아의 황제 프란츠 요제프 1세 훈장을 가슴에 단 브루크너

그럼 이 작품이 얼마나 교묘한 구조를 지니고 있는지 살펴보자. 브루크너는 첫 악장과 마지막 악장에 이례적으로 서주 부분을 붙여 놓았다. 현의 피치카토로 차츰 긴장감을 고조시키는 1악장 서주 멜로디는 이 복잡한 건축물의 대문을 여는 열쇠와도 같다. 이 간단한 선율은 순환 동기와 같은 역할을 하면서 네 개의 악장에 일관성을 부여하고, 1악장과 가장 중요한 위치에 있는 4악장을 연결하는 접착제가 된다. 또 오보에의 선율에 이어지는 아름다운 현악의 아다지오(2악장)와 렌틀러 리듬의 스케르초(3악장)가 통일된 성격의 두 악장 사이에서 대비를 이룸으로써 통일과 대칭이 골고루 조화를 이루는 위대한 구조물의 모양이 완성된다.

브루크너가 이 교향곡을 ‘환상곡’이라고 표현한 것은 1악장에서부터 마지막 악장의 코랄까지 유기적인 연관성 아래에서, 긴장감이 점점 고조되어 가는 작품 구조가 주제를 제시하고, 그 주제를 발전시켜 나가는 환상곡 스타일과 너무나 흡사하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였다. 가장 가까운 이들조차도 작곡가의 이러한 의도를 이해하지 못했던 것은 가슴 아픈 일이 아닐 수 없다.

누구보다 믿었던 제자가 망친, 가슴 아픈 초연

브루크너는 이렇듯 자신이 이룩해 놓은 음악의 논리와 구조적인 완결성에 대해 대단히 흡족하고 있었다. 이런 만족감은 교향곡 5번의 초연을 뒤로 미룬 채 바로 앞서 작곡했던 2번, 3번, 4번의 대대적인 수정 작업에 돌입했던 것에서도 읽을 수 있다. 그는 5번에서 이룩한 고결한 형식미를 이전 작품들에도 주입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나 브루크너의 이런 자부심은 초연 무대에서 여지없이 무너지고 만다. 이 작품은 완성된 1878년으로부터 16년이 흐른 뒤인 1894년에야 처음으로 연주할 기회를 잡게 되었는데, 브루크너의 제자 프란츠 샬크가 지휘를 맡았다. 누구보다도 브루크너라는 작곡가를 잘 이해하고 있었던 샬크가 지휘봉을 잡았으니 보기 좋은 성공을 기대할 수도 있었겠지만, 일은 그리 순조롭게 풀리지 않았다. 문제는 바로 초연에 사용된 악보였다. 샬크는 이 연주회에서 브루크너가 손수 만든 악보를 팽개쳐 둔 채, 바그너 풍의 울림으로 덕지덕지 덧칠을 하고, 이 작품이 지니고 있는 대칭과 조화의 마지막 보루인 마지막 악장의 피날레를 난도질한 자신의 악보를 사용했던 것이다.

50을 넘긴 나이에 이제야 자신만의 형식미를 찾았다는 만족스러움에 잠겨 있던 브루크너는 이 소식에 큰 충격을 받았다. 비록 공개적으로 반대 의사를 표명하지는 않았지만, 브루크너는 병을 핑계로 초연에 참석하지 않았다. 병적이었던 그의 성격을 고려한다면, 연주회장에 나타나지 않았던 것은 그가 표현할 수 있는 최대의 불쾌감의 표현이었을 것이다.

작곡자 자신이 생전에 한 번도 듣지 않은 작품

1. 1876년판: 최초로 완성된 필사본(1875.2-1876.5 작곡). 출판되지는 않았음. 하스(Hass)의 손에 의해 일부만이 악보화되어 있음.

2-1. 1878년 하스 에디션(1935년 출판). 1876년의 초고에 브루크너 자신의 손으로 1878년 11월까지 1, 2악장만 약간의 손질. 음반: 첼리비다케(DG), 푸르트벵글러(DG, EMI), 요훔(DG)

2-2. 1878년 노바크(Nowak) 에디션(1952년 출판). 하스와 같은 필사본을 기초로 한 것으로 거의 차이가 없다. 요즈음의 연주와 녹음들은 대부분 이 악보를 기초로 하고 있다.

3. 1896년판(1896년 출판). 초연을 담당했던 프란츠 샬크가 바그너 풍으로 뜯어고쳐 무대에 올렸던 것. 브루크너의 승인도 얻지 않았던 것으로 개정판의 오류를 낱낱이 드러내고 있다. 음반: 크나퍼츠부슈(Decca)

전작 4번에 비하면 교향곡 5번의 판본은 이렇듯 너무나 간단하다. 소심하고 마음 약했던 브루크너였지만, 이 작품에 대해서는 타인들의 입방아에 흔들리지 않을 만큼 확신이 서 있었음이 분명하다. 초기의 간단한 수정이 있기는 했지만, 발표 이후에는 한 번도 손을 대지 않았으니 말이다.

문제는 당치도 않은 샬크의 개정판인데, 크나퍼츠부슈의 음반을 들어보면 브루크너의 제자인 동시에 열렬한 추종자였던 샬크가 어설픈 바그너 스타일을 가미한 것이 이 곡에 얼마나 큰 악영향을 미쳤는가를 확실히 알 수 있다. 오죽하면 작곡자가 자신의 작품이 초연되는 음악회에 참석하지 않았을까. 몸이 불편하다는 구실을 내세우기는 했지만, 정작 아팠던 것은 몸이 아니라 마음이었을 것이다. 미완성으로 끝난 9번을 제외하면 브루크너는 5번 연주를 생전에 한 번도 듣지 않았다.  

브루크너가 오랜 동안 오르가니스트로 봉직했던 그의 마음의 고향성 플로리안 수도원의 ‘브루크너 오르간’

악장별 주요 포인트

1악장

첼로와 콘트라베이스의 피치카토로 시작되어 비올라, 바이올린이 순차적으로 합류하고 있는 서주(1~13마디)는 대단히 중요한 의미가 있다. 지휘자들이 이 부분의 분위기를 어떻게 전개시키는가, 뒤따라오는 금관의 상승 음형들(15~30마디)과 어떤 관계를 구축하면서 이행하는가에 따라 작품의 전반적인 판도가 변한다. 일반적인 소나타 형식으로 이루어져 있기는 하지만, 반복되면서 점점 긴장감이 상승하는 찬송가 구절과도 같은 첫 주제는 1악장 내부에서뿐만 아니라 작품 전체에서 점층적인 확대 양식의 기초를 이루고 있는 주제이다.

2악장

브루크너의 아다지오 가운데 가장 아름다운 작품으로 손꼽힌다. 1악장과 마찬가지로 현의 피치카토가 분위기를 잡더니(1~4마디), 얼마 지나지 않아 오보에의 구슬픈 소리가 겹쳐진다(5~18마디). 잠시 현과 클라리넷의 대화가 이어지고(19~30마디) 드디어 현악으로만 이루어진 아다지오가 그 위용을 드러내는데, 이 선율과 화음이 지니고 있는 심금을 울리는 호소력은 말로 표현하기 어렵다. 영화 음악으로 사용되어 엄청나게 유명세를 탄 바버의 <현을 위한 아다지오>도 브루크너의 이 마음을 움직이는 선율에 비교한다면 그야말로 새 발의 피에 지나지 않는다.

3악장

렌틀러 리듬을 기초로 하는 전형적인 브루크너 스케르초이다. 이제까지의 작품들에서는 스케르초 악장이 전체적인 구성과 따로 노는 경우가 허다했지만, 이번에는 다르다. 1악장의 서주 및 주제와 어느 정도의 관계를 맺고 있는 것이다. 단순한 음형이지만 템포의 설정이나 현악과 관악이 섞인 비율에 따라 사뭇 다른 느낌을 주기도 한다. 트리오 부분에서는 목관의 활약상에 따라 스케르초-트리오 사이의 대비 효과가 달라진다.

4악장

브루크너는 항상 마지막 악장을 거대한 악상으로 메워 왔지만, 이 작품의 피날레는 이전보다 훨씬 중요한 역할을 하는 핵심부이다. 1악장에서와 같은 서주에 이어 앞선 악장과 2악장을 회상하는 부분들이 등장한다. 이 부분을 대위법 스타일의 메인 테마들과 얼마나 교묘하게 연결시킬 수 있는가, 또 거대한 스케일의 코랄 주제와 이중 푸가를 어떤 방법으로 풀어 나가는지가 지휘자들에게 가장 큰 숙제이다. 1악장에서부터 계속 고조되어 왔던 모든 갈등과 문제들을 마무리 지어야 하는 만큼 그 구조는 실로 난해한데, 이들의 처리가 원만하게 되었을 경우 청자들이 느끼는 희열과 감동은 그만큼 커진다.

Günter Wand/BBC Symphony Orchestra - Bruckner, Symphony No.5 in B flat major

Günter Wand, conductor

BBC Symphony Orchestra

BBC Proms 1990

Royal Albert Hall, London

1990.09.09

추천음반

1. 오이겐 요훔/콘세르트헤보우 오케스트라, 1986, Tahra

2. 다니엘 바렌보임/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1991, Teldec

3. 주세페 시노폴리/드레스덴 슈타츠카펠레, 1999, DG

4. 귄터 반트/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1996, RCA

5. 엘리아후 인발/프랑크푸르트 방송교향악단, 1987, Teldec

6.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베를린 필하모닉 오Ptmxm라, 1976, DG

*위 추천음반 목록은 저자가 ‘음반 비교 감상’이란 제목으로 8페이지에 걸쳐 상당히 자세하게 설명해 놓고 있습니다. 편의상 내용을 생략하고 간단한 디스코그래피만 옮겼습니다.

글쓴이 박진용은 1967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연세대학교(건축공학과)에 재학 중 고전음악 감상 동아리인 ‘연세음악동우회’에서 본격적으로 음악에 관한 글을 쓰기 시작했다. 졸업 후 대기업에 근무하면서 레코드 포럼, 코다 등 여러 음악 매체에 음반 리뷰와 음악 관련 기사를 기고했다. 독일 음악, 특히 바흐, 베토벤, 브루크너의 음악에 깊은 애정을 가졌으며, 지휘자 푸르트벵글러의 열렬한 팬이었다. 1999년 압구정동에 음반 가게 ‘서푼짜리 레코드’를 개업해 클래식 음악 애호가들의 사랑방으로 자리를 잡았으나 경영난으로 접었다. 그 후 다시 직장 생활을 하던 중 2004년 6월 24일 38세를 일기로 아깝게 타계했다.

출처 : 박진용 지음, 연세음악동우회 기획, <브루크너 - 완벽을 향한 머나먼 여정>, 도서출판 리수, 2014.6.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