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 산책

직선과 원 - 김기택

라라와복래 2015. 2. 21. 09:05

 

직선과 원

김기택

옆집에 개가 생김.

말뚝에 매여 있음.

개와 말뚝 사이 언제나 팽팽함.

한껏 당겨진 활처럼 휘어진 등뼈와

굵고 뭉툭한 뿌리 하나로만 버티는 말뚝,

그 사이의 거리 완강하고 고요함.

개 울음에 등뼈와 말뚝이 밤새도록 울림.

밤마다 그 울음에 내 잠과 악몽이 관통당함.

날이 밝아도 개와 말뚝 사이 조금도 좁혀지지 않음.

직선 :

등뼈와 말뚝 사이를 잇는 최단거리.

온몸으로 말뚝을 잡아당기는 발버둥과

대지처럼 미동도 않는 말뚝 사이에서

조금도 늘어나거나 줄어들지 않는 고요한 거리.

원 :

말뚝과 등거리에 있는 무수한 등뼈들의 궤적.

말뚝을 정점으로 좌우 위아래로 요동치는 등뼈.

아무리 격렬하게 흔들려도 오차 없는 등거리.

격렬할수록 완벽한 원주(圓周)의 곡선.

개와 말뚝 사이의 거리와 시간이

이제는 철사처럼 굳어져 더 이상 움직이지 않음.

오늘 주인이 처음 개와 말뚝 사이를 끊어놓음.

말뚝 없는 등뼈 어쩔 줄 모름.

제자리에서 껑충껑충 뛰기도 하고 달리기도 함.

굽어진 등뼈 펴지지 않음.

개와 말뚝 사이 아무것도 없는데

등뼈, 굽어진 채 뛰고 꺾인 채 달림.

말뚝에서 제법 먼 곳까지 뛰쳐나갔으나 곧 되돌아옴.

말뚝 주위를 맴돌기만 함.

개와 말뚝 사이 여전히 팽팽함.

출전 : <소>(문학과지성사)

시를 배달하며

개와 말뚝 사이에 무슨 일이 있는 걸까요? 그 사이에 ‘직선과 원’이라는 도형이 생기지요. 우선 개와 말뚝 사이의 직선은 등뼈와 말뚝 사이의 최단거리를 보여주는데, 아무리 발버둥 쳐도 그 거리는 줄거나 늘지 않아요. 그 직선은 발벌이와 관련해 생긴 긴장과 팽팽함을 보여주지요. 원은 말뚝의 예속과 수모에서 벗어나 저 멀리 도망가려는 등뼈들의 궤적을 보여줍니다. 말뚝은 꿈쩍도 않고, 그 주위를 맴돌기만 하는 삶이란 노예의 삶이겠지요. 예속에서 벗어나는 길은 무엇일까요? 줄을 끊는 자유를 선택하는 것이지요. “전쟁을 일으키는 삶을 살라!”고 한 것은 철학자 니체입니다

문학집배원 장석주

시  김기택(1945~ )은 경기도 안양에서 태어났다. 1989년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당선해서 등단했다. 시집으로 <사무원>, <갈라진다 갈라진다> 등이 있다.

낭송  김동훈 배우. 극단 '두목' 소속.

음악  Backtraxx - Terror Tune / 애니메이션  제이 / 프로듀서  김태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