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 산책

세계의 명시/ 하인리히 하이네 - 슐레지엔의 직조공

라라와복래 2015. 3. 2. 21:03

세계의 명시/ 하인리히 하이네

슐레지엔의 직조공

침침한 눈에는 눈물도 마르고

베틀에 앉아 이빨을 간다

독일이여 우리는 짠다 너의 수의를

세 겹의 저주를 거기에 짜 넣는다

우리는 짠다, 우리는 짠다!

첫 번째 저주는 신에게

추위와 굶주림 속에서 우리는 기도했건만

희망도 기대도 허사가 되었다

신은 우리를 조롱하고 우롱하고 바보 취급을 했다

우리는 짠다, 우리는 짠다!

두 번째 저주는 왕에게 부자들의 왕에게

우리들의 비참을 덜어 주기는커녕

마지막 한 푼마저 빼앗아 먹고 그는

우리들을 개처럼 쏘아 죽이라 했다

우리는 짠다, 우리는 짠다!

세 번째 저주는 그릇된 조국에게

오욕과 치욕만이 번창하고

꽃이란 꽃은 피기가 무섭게 꺾이고

부패와 타락 속에서 구더기가 살판을 만나는 곳

우리는 짠다, 우리는 짠다!

북이 날고 베틀이 덜거덩거리고

우리는 밤낮으로 부지런히 짠다

낡은 독일이여 우리는 짠다 너의 수의를

세 겹의 저주를 거기에 짜 넣는다

우리는 짠다, 우리는 짠다!

출전 : <아침저녁으로 읽기 위하여>, 김남주 옮김, 푸른숲, 1995

시를 말하다

정끝별 l 시인

한번쯤 하이네의 시에 마음이 사로잡힌 적이 있을 것이다. 봄과 자연과 사랑을 노래한 초기 서정시의 백미인 “눈부시게 아름다운 오월에/ 모든 꽃봉오리들이 피어날 때/ 이 가슴에도 사랑이 싹텄네”나, 멘델스존의 작곡으로 유명해진 “노래의 날개에 실어, 사랑하는 이여/ 나 그대를 멀리 데려가리/ 갠지스 강 들판으로 데려가리/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그곳으로”와 같은 ‘서정적 간주곡’의 사랑 시편들은 하이네를 연애 시인으로 각인시켜 놓았다.

또 있다. 세계적으로 애창되었던 질허 작곡의 민요 “알 수 없는 일이다/ 어찌하여 옛날의 동화 하나가/ 잊히지 않고/ 나를 슬프게 하는지”로 시작하는 ‘로렐라이’라 불리는 시. 하이네가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나치들이 이 시를 금지하려 했으나 이미 너무 알려져 작자 미상의 민요로 허용할 수밖에 없었다. 하이네는 사랑의 환희와 고통을 가장 쉬운 독일어로 가장 아름답고 깊게 노래했다. 니체가 그를 '독일어의 제일가는 곡예사'라 부른 까닭이다. ▲하이네, 1837

한데 하이네만큼 문학적으로 다양한 평가를 불러일으킨 시인도 드물다. 아웃사이더, 예외자, 포착할 수 없는 시인, 독일문학 사상 최초의 혁명적 민주시민, 현대적 디아스포라 지식인의 표상, 조국 독일을 가혹하게 비판한 이른바 ‘둥지를 더럽힌 자’…. 하이네의 삶과 내면을 설명하려는 수식들이다. 스스로 '인류 해방의 용감한 병사, 혁명의 아들'이라 자처했던 그는 1797년 프랑스와 경계해 있는 독일의 라인 지방 뒤셀도르프에서 유대인 포목상의 아들로 태어났다. 출생 시기, 장소, 태생 자체가 혼돈과 경계를 상징한다. 때는 근대화가 발아하던 시기였고, 뒤셀도르프는 프랑스혁명군이 주둔했던 곳이기도 하다. 봉건 독일에서 유대인으로 태어나 프랑스의 혁명과 자유를 갈망했던 하이네, 그는 폭풍처럼 살았다. 그의 친구 라우베는 이렇게 증언했다. “하인리히 하이네는 사랑에 빠진 처녀가 애인 품에 몸을 던지듯이 자신의 시대에 앞뒤 가리지 않고 몸을 던졌다.”

1831년 5월, 하이네의 프랑스 망명은 자유와 혁명으로 상징되는 '자유로운 사유에 바쳐진 희생'이었다. 1843년 말 젊은 마르크스와 교류했던 그에겐 ‘공산주의의 승리에 대한 본능적 예감’이 있었다. 그러나 ‘모든 형태의 대중 지배에 대한 시인으로서의 혐오감’ 때문에 공산주의에 경도되지는 못했다. 프랑스혁명이 일어났던 1848년에 질병이 발발하여 숨을 거둔 1856년까지 그는 스스로 “침상은 나의 무덤, 방은 나의 관(棺)”이라 표현했던 그 ‘침대 무덤’에 갇혀 있었다.

두통, 마비 증상, 시력장애, 척추 고통에 신음하며 불완전한 눈과 손으로 그는 죽음 직전까지 보수 반동의 사회 정치 상황을 신랄하게 비판하는 글을 썼다. 가슴 한 켠에는 어머니와 조국에 대한 그리움을 품은 채. 그렇게 반평생을 이국땅에서 떠돌았다. “밤중에 독일이 생각나면/ 나는 잠이 오지 않는다./ 다시 눈을 감아도 감기지 않고/ 뜨거운 눈물만 흘러내린다.// 해는 오고 또 지나간다!/ 어머니를 만난 지도/ 어언 열두 해가 흘렀건만/ 그리움은 점점 더 깊어만 갈 뿐// (...) / 신이여, 늙은 어머니를 보호해주소서!"(‘밤이면’). ◀하이네는 죽음 직전까지도 사회 정치 상황을 신랄하게 비판하는 글을 썼다. 1851년 병상에서의 모습

‘슐레지엔의 직조공’은 1844년에 슐레지엔에서 발발했던 노동자 투쟁을 소재로 한 정치 시, 노동자 시, 선전선동 시의 원조다. 1840년대 유럽은 산업혁명 시기였다. 기계화ㆍ산업화로 값싸게 대량생산된 직조 생산물들은 손으로 직물을 짜던 직조공들의 삶을 무너뜨렸다. 더 큰 이윤을 챙기려는 공장주들은 직조공들의 임금을 대폭 삭감했다. 절대빈곤에 시달리던 3000여 명의 직조공들은 농기구를 무기처럼 들고 악덕 공장주의 집을 향했다. 공장주를 보호하기 위해 군대가 투입되자 열한 명의 직조공이 목숨을 잃고 수십 명의 부상자가 발생했다. 슐레지엔 직조공들의 ‘폭동’은 콜비츠에 의해 6부작(빈곤, 죽음, 회의, 행진, 폭동, 결말)의 판화로 새겨지기도 했다.

이 시는 앙시앵 레짐(ancien régime, ‘옛 제도’, ‘구체제’를 이르는 말)의 중심축을 공격하고 있다. 신(가톨릭교회), 왕과 귀족(봉건귀족), 그리고 조국(권력)에 대한 저주가 바로 그것이다. 기도해봤자 응답이 없는 신, 귀족들의 권익만을 옹호하는 왕, ‘그들만의 나라’ 조국에 대한 ‘세 겹의 저주’는, “신의 가호 아래 국왕과 조국을 위하여”로 대변되는 독일의 낡은 봉건체제에 대한 공격이다. 이 앙시앵 레짐은 돈과 권력과 종교가 결탁한 현대에도 여전하다. 이 시가 기시감이 느껴지는 까닭이다. 70년대 내내 우리의 엄마, 언니들이 밤늦게까지 차르르차르르 돌렸던 편물기 소리가 떠오르고, 청계천 평화시장의 봉제공장 재단사였던 전태일이 떠오르고, “미싱은 잘도 도네 돌아가네”라는 후렴이 너무 경쾌해서 서글펐던 노찾사의 ‘사계’도 떠오른다.

1, 2행이 객관적 서술이라면, 3행부터 끝까지는 억압과 착취를 무력하게 감내하던 직조공들의 증오와 저주의 합창이다. ‘저주’, ‘수의’, ‘짠다’라는 시어가 반복되면서 일정한 리듬을 구축하고 있는데, 특히 “우리는 짠다, 우리는 짠다!”라는 후렴구가 분노의 감정을 고조시키고 있다. “우리는 짠다, 우리는 짠다!”를 반복할수록 ‘덜거덩거리는’ 직조기 소리가 연상되고 저주의 주술성이 증폭되는 듯하다. 또한 하이네가 경도되었던 생시몽주의(국가가 모든 부를 소유하고 노동자는 노동의 질과 양에 따라 분배받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회주의 이데올로기)의 일면도 엿보인다. 민중의 정치적ㆍ사회적 해방과 ‘새로운 독일의 탄생’에 대한 하이네의 믿음을 밑거름 삼아 발화된 시다. 하이네의 ‘저주’가 여전히 반복되고 있는 이 시대에, ‘누벨(nouvelle)’한 레짐(régim)을 꿈꿔보게 하는 시이기도 하다.

하인리히 하이네 (Heinrich Heine, 1797.12.13-1856.2.17) 독일 뒤셀도르프에서 태어났다. 가난한 유대인 상가에서 태어났으나 부호인 숙부의 도움을 받아 본 대학교, 괴팅겐 대학교, 베를린 대학교 등에서 법학을 전공하였다. 그러나 본에서는 A. W. 슐레겔 교수의 문학 강의를, 베를린에서는 헤겔 철학 및 그 밖의 문학 강의를 많이 들었으며 라엘 부인의 살롱에 드나들며 샤미소, 호프만, 푸케, 그라베 등과 사귀었다. 1827년 시집 <노래의 책>을 내며 명성을 얻었고 7월 혁명에 감동받아 파리로 갔다. 그 후 독일과 프랑스에서 신문과 잡지에 많은 논문과 평론을 발표해 언론인으로서 인정받았으나 정부의 미움을 산 후 국외로 추방되어 파리에 머물면서 민주주의를 위한 논문과 서정시를 썼다. 낭만파로 출발하였으나 유대인에 대한 차별 의식과 7월 혁명이 그를 지배한 까닭에 달콤한 낭만적 색채 속에는 냉혹한 현실에 대한 냉소가 숨어 있고 열렬한 애국심 이면에는 편협한 독일 사람에 대한 반항심이 불타고 있었다. 대표작으로 <로만파>, <독일 겨울 이야기>, <파우스트 박사>, <아타 트롤>, <로만체로> 등이 있으며 그중에서도 <노래의 책>과 <로만체로>는 하이네의 세계관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것으로 평가받는다.

정끝별 1988년 <문학사상>에 시가, 1994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평론이 당선된 후 시 쓰기와 평론 활동을 병행하고 있다. 시집으로 <자작나무 내 인생>, <흰 책>, <삼천갑자 복사빛>, <와락>, 시론ㆍ평론집 <패러디 시학>, <천 개의 혀를 가진 시의 언어>, <오룩의 노래>, <파이의 시학>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