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 산책

알베르 카뮈 ‘티파사에서의 결혼’

라라와복래 2015. 3. 8. 14:23

알베르 카뮈 ‘티파사에서의 결혼’

카뮈, 1947 (사진 앙리 카르티에-브레송)

“지드의 <지상의 양식>, 장 그르니에의 <섬>과 더불어 이 아름다운 책 <결혼 - 여름>은 단연 20세기 프랑스의 시적 산문집의 3대 걸작 중 하나라고 서슴지 않고 말해도 좋겠다.” ― 김화영

봄철에 티파사에는 신(神)들이 내려와 산다. 태양 속에서, 압생트의 향기 속에서, 은빛으로 철갑을 두른 바다며, 야생의 푸른 하늘, 꽃으로 뒤덮인 폐허, 돌더미 속에 굵은 거품을 일으키며 끓는 빛 속에서 신들은 말한다. 어떤 시간에는 들판이 햇빛 때문에 캄캄해진다. 두 눈으로 그 무엇인가를 보려고 애를 쓰지만 눈에 잡히는 것이란 속눈썹가에 매달려 떨리는 빛과 색채의 작은 덩어리들뿐이다. 엄청난 열기 속에서 향초(香草)들의 육감적인 냄새가 목을 긁고 숨을 컥컥 막는다. 풍경 깊숙이, 마을 주변의 언덕들에 뿌리를 내린 슈누아의 시커먼 덩치가 보일락 말락 하더니 이윽고 확고하고 육중한 속도로 털고 일어나서 바닷속으로 가서 웅크려 엎드린다.

벌써 바닷가로 가슴을 열고 잇는 마을을 지나 우리는 도착한다. 노랗고 푸른 세계로 들어가면 알제리의 여름의 대지가 향기 자욱하고 매콤한 숨결로 우리를 맞이한다. 도처에 장밋빛 부겐빌레아 꽃이 빌라들의 담 너머로 피어오른다. 뜰 안에는 아직 희미한 붉은빛의 부용화가 꽃잎을 열고 크림처럼 두툼한 차향(茶香) 장미와 길고 푸른 붓꽃의 섬세한 꽃잎이 흐드러진다. 돌은 모두 뜨겁게 단다. 미나리아재비꽃빛 버스에서 우리가 내릴 즈음 푸줏간 고기장수들은 빨간 자동차를 타고 와서 아침 행상을 돕고 요란한 나팔을 불며 마을 사람들을 부른다.

항구의 왼쪽으로는 마른 돌계단이 유향나무와 금작화들 사이의 폐허로 인도한다. 길은 조그만 등대 앞을 지나서 들의 한복판으로 빠져 들어간다. 벌써부터 그 등대에서는 보라, 노랑, 빨강 꽃들 자욱한 살진 식물들이, 요란한 입맞춤 소리를 내면서 바다가 핥아대는 첫번째 바위들 쪽으로 내려 뻗으면서 자란다. 부드러운 바람 속, 얼굴의 한쪽 뺨만을 데워주는 햇살빛을 받으며 서서 우리는 빛이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을, 주름살 없는 바다를, 그 바다의 빛나는 치열(齒列)이 짓는 미소를 물끄러미 바라본다. 폐허의 왕국 속으로 아주 들어가기 전에 우리가 관객이 되는 것도 이것이 마지막이다.

몇 걸음을 옮기면 압생트가 목구멍을 할퀸다. 그것들의 회색빛 솜털이 끝 간 데 없이 폐허를 뒤덮고 있다. 압생트의 정수(精髓)가 열기 속에서 발효하고 땅에서부터 태양까지 하늘도 취하여 휘청거리게 할 알코올이 이 세상 온 누리에 걸쳐 피어오른다. 우리는 사랑과 욕정을 만나기 위하여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간다. 우리는 교훈을 찾는 것도 아니요, 위대해지는 데 필요하다는 그 어떤 쓰디쓴 철학을 구하는 것도 아니다. 태양과 입맞춤과 야성의 향기 외에는 모든 것이 헛된 것으로 여겨진다. 나는 굳이 이곳에 혼자 있으려고 애쓰지 않는다. 나는 흔히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과 이곳에 찾아오곤 했다. 그들의 모습 속에서 사랑의 얼굴이 지어 보이는 맑은 미소를 읽어보곤 했다.

여기에 오면 나는 질서나 절도 따위는 다른 사람들에게 양보해버린다. 나를 온통 휩싸는 것은 자연과 바다의 저 위대한 무분별한 사랑이다. 폐허와 봄의 결혼 속에서 폐허는 다시금 돌이 되어, 인간의 손길로 닦여진 저 반드러운 손때를 이제는 다 버리고 자연 속으로 되돌아와 있다. 탕녀(蕩女)인 딸들의 귀향을 위하여 대자연은 꽃들을 아낌없이 피워 놓았다. 고대(古代) 광장의 포석들 사이로 향일성(向日性) 식물은 붉고 흰 머리통을 쳐들어 올리고, 붉은 제라늄들은 옛적엔 가옥이요 사원이요 공공 광장이던 자리에 그들의 붉은 피를 쏟아 붓는다. 많은 지식을 쌓아 어떤 이들은 신에 이르게 되듯이 기나긴 세월의 풍상으로 이 폐허는 어머니의 집으로 다시 돌아왔다. 오늘에야 마침내 과거가 폐허를 떠나버렸으나, 무너지게 마련인 사물의 중심으로 폐허를 다시 인도해주는 저 심원한 힘에 복종하는 것 이외에 다른 마음 쓸 것이란 아무것도 없다.

티파사의 고대 로마 시대 유적의 돌과 그 옆에 피어 있는 이름 모를 들꽃들

압생트들을 뭉개어 비비며, 폐허를 껴안고 애무하며, 나의 숨결을 세계의 저 소용돌이치는 입김과 맞추어보려고 애쓰며 보낸 시간이 얼마인가! 야생의 향기와 졸음을 몰고 오는 풀벌레들의 연주 속에 파묻혀서 나는 열기로 숨 막힐 듯한 저 하늘의 지탱하기 어려운 장엄함에 두 눈과 가슴을 활짝 연다. 본연의 자기가 되는 것, 자신의 심오한 척도를 되찾는 것은 그다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슈누아 언덕의 저 단단한 등줄기를 가만히 바라보고 있노라면 나의 가슴은 어떤 이상한 확신으로 차분히 가라앉는 것이었다. 나는 숨 쉬는 방법을 배우고 정신을 가다듬어 자신을 완성해가는 것이었다. 저 사원에 오르면 원주들이 태양의 운행을 가늠해주고, 그곳에서는 마을이 온통 그 희고 발그레한 벽들과 초록빛 베란다들과 함께 굽어보이므로, 내가 언덕을 하나씩 하나씩 기어오를 때마다 새로운 보상이 나를 위하여 마련되는 것이었다.

동쪽 언덕 위에 있는 대성당 또한 그러하였다. 성당에는 오직 벽들만 남아 있을 뿐 그 성당 주위에는 커다란 원을 그리면서 땅속에서 파내놓은 석관(石棺)들이 가지런히 놓여 있다. 그것들의 대부분은 간신히 보일락 말락 밖으로 파내져 있는 것이어서 여전히 한 모서리는 땅속에 묻혀 있다. 옛날엔 그 석관들에 죽은 자들의 시체가 담겨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샐비어와 향꽃무우가 그 속에서 자란다. 생트 살자 대성당은 기독교의 사원이었다. 그러나 빈틈으로 들여다볼 때마다 우리들에게 전해 오는 것은 소나무와 시프레가 무성한 언덕들, 혹은 20미터에 걸쳐 그 하얀 강아지들을 뒹굴게 하고 있는 바다―一 이 세계의 음악뿐이다. 생트 살자를 떠받들고 있는 언덕은 그 등성이가 편편해서 옛 사원의 돌기둥들 사이로 바람은 더욱 드넓게 분다. 아침 햇살 아래 위대한 행복이 누리 속에서 균형을 잡는다. (pp.13~16)

정오가 조금 못 되어 우리는 폐허를 지나 바닷가의 조그만 카페로 돌아온다. 태양의 징소리와 온갖 색채로 쩌르릉쩌르릉 울리는 머리에는 그늘이 짙게 들인 홀과 얼음같이 차가운 초록빛 박하냉차 한 잔의 환영이란 얼마나 신선한 영접인가! 밖에는 바다, 그리고 먼지로 불타는 듯 뜨거운 길, 식탁에 앉아서 깜박거리는 속눈썹 사이로 뜨겁게 백열하는 하늘의 갖가지 아롱지는 빛을 붙잡아보려 애쓴다. 땀에 젖은 얼굴, 그러나 입고 있는 가뿐한 천의 옷에 감싸여 서늘한 몸으로 우리들은 이 세계와의 결혼 하룻날의 나른한 행복을 한껏 펼친다. [pp. 18~19]

티파사에서는 ‘나는 본다’라는 말은 ‘나는 믿는다’라는 말과 같은 값의 뜻을 지닌다. 그리하여 나는 내 손이 만질 수 있고 내 입술이 애무할 수 있는 것을 부정하려고 고집하지 않는다. 나는 그것으로 무슨 예술 작품을 만들어보고 싶은 욕심은 조금도 없고 다만 그것에 대하여 그냥 이야기나 해보고 싶은 마음뿐이다. 그 두 가지는 서로 다른 일이다. 나에게 티파사는 이 세계에 대한 어떤 관점을 간접적으로 암시하기 위하여 사람들이 그려 내놓는 무슨 극중 인물들 같아 보인다. 그 인물들처럼 티파사는 증언한다. 그것도 씩씩하게. 티파사는 오늘 나의 인물이다. 그 인물을 쓰다듬고 묘사하노라면 나의 도취감은 끝이 없을 것만 같이 여겨진다. 사는 시간이 따로 있고 삶을 증언하는 시간이 따로 있는 법이다. 그리고 창조하는 시간도 따로 있다. 그건 좀 덜 자연스러운 행위이다. 나는 오직 내 몸 전체로 살고 내 마음 전체로 증언하면 된다. 티파사를 살고 그것을 증언할 일이다. 예술 작품은 그 뒤에 올 것이다. 거기에 바로 자유가 있는 것이다. (pp. 19~20)

티파사를 사랑한 카뮈의 문학 기념비

이제 나무들마다 가득히 새들이 깃들였다. 대지는 어둠 속으로 잠겨들기 전에 천천히 숨을 내쉰다. 잠시 후 첫번째 별이 뜨면 밤의 장막이 이 세계의 무대 위로 내릴 것이다. 대낮의 찬란하던 제신(諸神)은 그들 날마다의 주음으로 되돌아가리라. 그러나 또 다른 신들이 찾아올 것이다. 더 많은 어둠을 위하여 그네들 황폐한 얼굴들이 그 사이에 대지의 심장 속에서 되살아날 것이다.

적어도 지금은 모래 위에 끊임없이 와서 부서지는 파도가 황금빛 꽃가루들이 넘실대는 저 공간을 건너 나에까지 밀려오고 있었다. 바다, 들판, 침묵, 이 땅의 향기, 이 모든 향기로운 생명으로 내 전신이 가득 차고, 나는 이 세계의 벌써 금빛으로 익은 과일을 깨물며, 그 달고도 강렬한 과즙이 내 입술을 따라 흘러내리는 것을 미칠 듯한 감동으로 느끼고 있었다. 아니다. 중요한 것은 나 자신도, 이 세계도 아니다. 다만 세계로부터 나에게로 사랑이 태어나 이어지게 하는 저 화합과 침묵이 중요할 따름이다. 나는 그 사랑을 오직 나 혼자서만 누리려고 탐할 만큼 약하지는 않았다. 태양과 바다로부터 태어나서 그의 단순성 속에서 위대함을 찾아낼 줄 아는 저 활력에 차고 멋을 아는 한 종족, 바닷가에 우뚝 서서 그네들 하늘의 눈부신 미소에 공모의 미소를 던져 보내고 있는 그 종족 전체와 사랑을 나누려는 의식과 그것을 사랑으로 삼는 자부심이 내게 있으므로. (p.22 마지막 문장)

알제리 지중해 연안의 항구도시 티파사는 BC 7세기경에 건설되었다. 카르타고의 쇠퇴 이후 1세기 중반부터 로마 제국의 식민도시가 되었으며, 로마인들은 카피톨리움 신전, 포룸, 공공목욕탕, 원형경기장 등의 건축물들을 건설하였다. 전설에 따르면 4세기에 이곳에서 성(聖) 살사가 순교했다고 하며, 이후 로마 가톨릭과 도나투스파가 서로 정통성을 주장하며 각축을 벌여 5세기 말에는 마을이 완전히 피폐화되었다. 지금의 마을은 1857년에 건설되었으며, 1982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알베르 카뮈(Albert Camus, 1913-1960). 1942년 소설 <이방인>의 발표와 함께 문단은 물로 광범위한 지식인 사회의 주목을 받으며 유례 없는 문학적 성공을 약속 받은 알베르 카뮈. 그는 <안과 밖>, <결혼 -여름> 같은 시적 산문집으로 많은 독자들의 사랑을 받기도 하고, <페스트>나 <전락> 같은 진지한 소설로 20세기 문학의 정점에 오른 작가로 평가를 받기도 한다. 그런가 하면 <시지프의 신화>, <반항하는 인간> 같은 철학적 에세이로 실존주의 문학의 대표적 작가로 지칭되기도 하며, <오해>, <칼리굴라>, <정의의 사람들> 같은 희곡으로 앙가주망 예술가로서 주목받는다. 그러나 자신은 “실존주의가 끝나는 데서 나는 출발하고 있다”면서 자신의 문학이 어떤 한정된 범주로 규정되는 것을 거부했다. 1957년 노벨 문학상을 수상하고 그가 계획한 대작 <최초의 인간>을 집필하면서 한창 기대를 모으던 어느 날 자동차 사고로 삶을 마감했다. "삶에 대한 절망이 없이는 삶에 대한 사랑도 없다." ―알베르 카뮈

결혼 - 여름

알베르 카뮈 지음

김화영 옮김

책세상

사막의 석가모니를 생각해보자. 그는 여러 해 동안 그곳에서 하늘로 눈을 들고 꼼짝도 하지 않은 채 웅크리고 앉아 있었다. 신들조차도 그 지혜와 그 돌의 운명을 부러워했었다. 내민 채로 굳어져버린 그의 두 손에 제비들이 둥지를 틀었다. 헌데 어느 날 제비들은 먼 고향의 부름을 받고 날아가버렸다. 자기 속의 욕망과 의지와 영광과 고뇌를 다 죽일 수 있었던 그이도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꽃들이 바위에 돋아나게 되었다. [<여름> ‘미노타우로스 또는 오랑에서 잠시’에서. (pp.103~104)

정리 : 라라와복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