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 산책

별을 굽다 - 김혜순

라라와복래 2015. 3. 25. 07:38

 

별을 굽다

김혜순

사당역 4호선에서 2호선으로 갈아타려고

에스컬레이터에 실려 올라가서

뒤돌아보다 마주친 저 수많은 얼굴들

모두 붉은 흙 가면 같다

얼마나 많은 불가마들이 저 얼굴들을 구워냈을까

무표정한 저 얼굴 속 어디에

아침마다 두 눈을 번쩍 뜨게 하는 힘 숨어 있었을까

밖에서는 기척도 들리지 않을 이 깊은 땅속을

밀물져 가게 하는 힘 숨어 있었을까

하늘 한구석 별자리마다 쪼그리고 앉아

별들을 가마에서 구워내는 분 계시겠지만

그분이 점지하는 운명의 별빛 지상에 내리겠지만

물이 쏟아진 듯 몰려가는

땅속은 너무나 깊어

그 별빛 여기까지 닿기나 할는지

수많은 저 사람들 몸속마다에는

밖에선 볼 수 없는 뜨거움이 일렁거리나 보다

저마다 진흙으로 돌아가려는 몸을 일으켜 세우는

불가마 하나씩 깃들어 있나 보다

저렇듯 십 년 이십 년 오십 년 얼굴을 구워내고 있었으니

모든 얼굴은 뜨거운 속이 굽는 붉은 흙 가면인가 보다

출전 : <당신의 첫>(문학과지성사)

시를 배달하며

지하철을 타고 다니다보면 무수한 익명의 얼굴들을 만나는데요, 그 얼굴들이 '붉은 흙가면' 같다는 생각! 왜 시인들은 남다른 상상을 하는 걸까요? 그것은 심미적 이성의 눈을 뜨고 세계를 바라보기 때문이지요. 지하철에 만나는 사람들의 얼굴을 보고 '얼마나 많은 불가마들이 저 얼굴들을 구워냈을까'를 상상하는 게 그렇지요. 그 얼굴들은 아침마다 눈을 뜨고 역동하는 하루를 맞는 사람들의 것이지요. 우리가 볼 수 없는 곳에 '저마다 진흙으로 돌아가려는 몸을 일으켜 세우는 불가마'가 하나씩 깃들어 있는지도 모릅니다. 아침이면 벌떡 일어서서 간밤에 불가마에서 구워낸 제 얼굴을 쓰고 거리로 뛰쳐나오는 것이겠지요.

문학집배원 장석주

김혜순(1945~ )은 경북 울진에서 태어났다. 1979년 문학과지성을 통해 문단에 나왔다. 시집으로 <나의 우파니샤드, 서울>, <불쌍한 사랑 기계> 등이 있다.

낭송 선정화 배우. 연극 <김영하의 흡혈귀>, <아 유 크레이지> 등에 출연

음악 Backtraxx - Soap Lovers Guitar / 애니메이션 제이 / 프로듀서 김태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