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 산책

[논어 명언명구] 호지불여락지(好之不如樂之) - 좋아함을 넘어 즐김으로

라라와복래 2015. 6. 24. 13:14

[논어 명언명구]

호지불여락지(好之不如樂之)

좋아함을 넘어 즐김으로

몰입하는 사람이 아름답다.

몰입은 삶의 권태와 고통을 넘는 일이기에.

 

사람이 무슨 일을 시작해서 끝까지 매듭을 짓기가 어렵다. 책을 사도 끝까지 읽기가 어렵고, 연초에 금연과 다이어트 등 여러 가지 결심을 해도 중도에 그만두기가 쉽다. 그래서 ‘처음은 있지만 끝이 없다’는 ‘유시무종(有始無終)’이 널리 쓰이고 있다. 무언가를 시작할 때 누구나 다들 ‘처음도 있고 끝이 있다’는 ‘유시유종(有始有終)’ 또는 ‘유종지미(有終之美)’의 주인공이 되려고 마음먹었을 것이다.

일을 끝까지 하려고 했지만 도중에 그만두는 이유를 대라면 참으로 많을 것이다. “사정이 바뀌었다”, “마음이 달라졌다”, “건강이 나빠졌다”, “근무 여건이 조정되었다”, “생각하지 못했던 일이 생겼다” 등등 사람마다 자신의 까닭을 내놓을 것이다.

공자도 자신의 가던 길을 중도에 포기하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았을까? 지금까지 걸어왔던 길이 억울해서 그냥 앞으로 갔던 것일까? 아니다. 그는 한순간도 멈출 수 없는 에너지를 품고 있었기에 그만둘 수 없었다. 그 힘은 도대체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논어> 옹야(雍也)편 20장

— 141번째 원문

무엇을 아는 것은 좋아하는 것만 못하고,

무엇을 좋아하는 것은 즐기는 것만 못하다..

知 : 지(知)는 알다, 느끼다, 깨닫다는 뜻이다.

之 : 지(之)는 가다는 동사로 쓰이지만 여기서 타동사의 목적어를 나타내는 대명사이다. 이 대명사는 특정한 대상이 아니라 불확정한 대상을 가리킨다.

者 : 자(者)는 사람, 놈, 것의 뜻으로 쓰이지만 여기서 명사절을 이끄는 용례로 쓰이고 있다.

樂 : 樂은 음이 3가지나 된다. 음악, 풍류의 뜻으로 쓰이면 ‘악’으로 읽고, 즐기다의 뜻이면 ‘락’으로 읽고, 좋아하다의 뜻이면 ‘요’로 읽는다. ‘요’는 많이 쓰이지 않고 오로지 ‘요산요수(樂山樂水)’의 용례에만 쓰인다.

從 : 종(從)은 좇다, 따르다, 받아들이다의 뜻이다.

‘좋아함’과 ‘즐김’은 어떻게 다를까?

누구나 한 번쯤 들어봄직한 공자의 이 명구에 대해 한 가지 의문이 떠오른다. “좋아하는 것과 즐기는 것 사이에는 별 차이가 없는 거 아닌가?” 이 명구에서 앞부분은 타당하지만 뒷부분은 불필요한 것으로 보인다.

옛날 주석가들도 이런 의문을 품었던 모양이다. 그들도 다들 좋아하는 것과 즐기는 것의 차이를 밝히고자 했다. 그중 한 사람의 사례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북송의 학자 장식(張栻, 1133-1180)은 곡식을 먹는 것에 비유하여 설명하고 있다. ◀북송의 학자 장식. 공자가 말하는 아는 것, 좋아하는 것, 즐기는 것을 곡식에 비유하여 설명한다. 출처: 중국역대인물 초상화

곡식에 비유하자면 (譬之五穀.)

아는 사람은 어떤 것이 먹을 수 있는지 식별할 수 있다. (知者, 知其可食者也.)

좋아하는 사람은 어떤 것을 먹고서 입맛에 맞는 것을 찾을 수 있다. (好者, 食而嗜之者也.)

즐기는 사람은 입맛에 맞는 것을 찾아서 배불리 먹을 수 있다. (樂者, 嗜之而飽者也.)

- <사서집주(四書集註)>

장식의 풀이는 나름 일리가 있다. 일단 제주도의 고사리갈치조림이나 인도의 난(naan) 등 어떤 음식이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먹어도 볼 수 있다. 음식이 있다는 걸 알아도 먹어보지 않으면 입맛에 맞는지 알 수 없다. 많은 음식을 먹어보고서 그중에 어떤 것이 먹을 만한지 아닌지 나누게 된다. 그렇게 먹을 만한 음식의 메뉴가 정해지더라도 그중에서 즐겨 찾는 것이 생긴다. 어떤 음식을 즐기게 되면 어떤 상황에서 그 음식을 먹으려고 하게 된다. 그걸 먹지 못하면 음식을 먹어도 먹지 않은 느낌이 드는 것이다.

장식의 풀이에 바탕을 두면 지(知), 호(好), 락(樂)은 공통점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나’와 밀착도에서 차이가 난다. 지(知)는 ‘나’와 일정한 거리를 두고서 그것의 객관적 특징을 찾아내는 것이다. 이 지(知)에는 이름과 존재를 아는 것에서부터 여러 가지 특성을 알아차리는 것이다.

‘컴퓨터’라는 사물이 있다는 것을 알고 그것으로 무엇을 할 수 있다는 것을 아는 것이다. 현대인이 아니라면 컴퓨터가 있다는 것을 안다고 하더라도 좋아한다거나 즐긴다는 반응이 생길 리가 없다.

호(好)는 지(知)를 바탕으로 하여 일정한 방향성이 생긴 것이다. 무엇을 좋아하는 호(好)는 ‘내’가 그것과 가까이 있으려고 하고 그것의 가치를 긍정하는 마음의 움직임이다. 그 반대도 있다. 싫어하는 오(惡)이다. 오(惡)는 그것과 멀리 떨어져 있으려고 하고 그것의 가치를 부정하는 것이다.

스마트폰의 신제품이 나올 때마다 사려고 애쓰는 사람이 있고 대수롭지 않게 신경 쓰지 않는 사람이 있다. 전자는 지금 쓰고 있는 스마트폰에 만족하지 못하고 신제품을 좋아하기 때문에 무리를 해서라도 내 것으로 만들려고 한다. 반면 후자는 신제품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기 때문에 굳이 가지려고 하지 않는다.

락(樂)은 ‘내’가 그것과 늘 같이 있으려고 하고 그것과 함께 있으면 편안하고 유쾌한 감정을 느낀다. 반대로 그것이 없으면 ‘나’는 허전하게 느낀다. 이런 점에서 즐기는 락(樂)과 좋아하는 호(好)의 차이가 있다.

좋아하는 호(好)는 언젠가 싫어하는 오(惡)로 변할 가능성을 부정하지 않는다. 물론 이런 변화는 뚜렷한 이유가 있을 수도 있고 ‘그냥’으로 말할 때처럼 별다른 이유가 없을 수도 있다. 락(樂)은 반대 상태로 바뀔 수 없다. 즉 락(樂)은 그 자체로 만족스러운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작심(作心)과 기심(起心)의 차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선뜻 몸을 일으켜서 시작을 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시험공부를 하려고 하는데 엄마가 “시험이 코앞인데 여태 뭐하고 있냐?”라고 한마디 하면 공부하려던 마음이 저 멀리 달아나버린다. 여기서 ‘내가 무엇을 하려고 스스로 일으키는 마음’과 ‘외부의 요인에 의해 강요를 받아서 먹게 되는 마음’의 차이가 중요하다. 전자가 ‘기심(起心)’이고 후자가 ‘작심(作心)’이다.

작심(作心)은 글자 그대로 마음을 만든 것이다. 이전에 없던 마음을, 어떤 일을 계기로 새롭게 먹는 것이다. 예컨대 중간고사에 시험을 망친 학생이 집에 돌아와서 부모님의 꾸중을 듣고서 “다가오는 기말고사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어야지!”라고 결심을 했다고 하자. 학생은 원래 좋은 성적에 대한 마음이 없었는데, 부모님의 질책을 듣고서야 비로소 그런 마음을 가지게 된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왜 작심이 삼일과 연결되어 ‘작심삼일(作心三日)’의 말이 생겨났는지 그 의미 맥락을 이해할 수 있다.

작심은 원래부터 ‘내’가 스스로 그런 마음을 가진 것이 아니라 외부의 개입에 의해 억지로 또는 강제로 그런 마음을 가지게 된 것이다. 따라서 외부의 개입이 강하지 않으면 작심은 언제든지 그만둘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니고 있는 셈이다. 작심삼일(作心三日)은 이처럼 끝까지 지속되지 못하고 도중에 그만둘 수 있는 가능성을 나타내는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기심(起心)은 글자 그대로 마음을 일으키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병으로 아파서 누워 있다가 몸이 조금 나아진 뒤에 자리에서 일어나는 장면을 떠올리면 이해하기가 쉽다. 몸이 아프면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다. 밥 먹는 것도 노는 것도 다 귀찮다. 그래서 아예 잠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하지 않는다. 하지만 몸이 나은 뒤에 뭔가를 하려고 하면 제 힘으로 몸을 서서히 일으켜 세우지 않을 수가 없다. 이를 기신(起身)이라고 할 수 있다.

기심(起心)은 무엇이라도 전혀 하고 싶은 것이 없는 마음 상태에서 무엇을 해볼까라는 생각이 드는 마음이다. 이 마음은 하고 싶은 생각이 들어서 내가 “꼭 해야지!”라는 결심을 낳은 원동력이 된다. 기심(起心)이 들게 되면 귀찮던 일도 반기게 되고, 힘겹던 일도 즐겁게 되고, 지루한 일도 흥겹게 되고, 많은 남은 일도 서둘러 끝내고 싶은 일이 된다. 이로부터 기심(起心)은 일단 시작하면 웬만한 반대 작용이 없는 한 끝까지 진행하려는 내부의 에너지로 움직이게 된다.

시간과 관련해서 기심(起心)과 작심(作心)은 묘한 긴장 관계를 이룬다. 기심(起心)이 들려면 시간이 걸린다. 마음이 선뜻 동하지 않기에 다른 사람이 보면 꾸물꾸물 대는 것으로 보인다. 그리하여 작심(作心)의 강요가 끼어든다. ‘아직까지 뭘 하고 있는 건가?’ 또는 ‘이러다가 때를 놓치겠다’는 생각과 더불어 ‘작심’(作心)을 하게 되는 것이다.

‘작심삼일(作心三日)’의 말을 자주 한다는 것은 우리 사회가 ‘나’를 가만히 내버려두지 않고 계속 무엇을 빨리 하라고 요구하는 측면이 강하다는 것을 반영하고 있다. 사람이 스스로 움직이는 시간의 차이를 인정한다면 ‘작심삼일(作心三日)’의 말이 줄어들고 ‘기심불변(起心不變)’의 말이 더 늘어날 것이다.

몰입의 아름다움

후대에 공자를 두고 ‘성인(聖人)’이라고 평가한다. 하지만 그런 공자라고 해서 무더위에 지치지 않고 추위에 떨지 않고 실패에 가슴 아파하지 않았을까? 그렇지 않다. 그도 인간인 한 고단한 삶에 어깨가 축 늘어지고 희망이 보이지 않는 상황에 맥이 빠지고 자식과 제자들의 죽음에 살 의욕이 꺾이지 않았겠는가?

공자도 보통 사람들이 겪는 희로애락을 느끼면서도 분노에 사로잡혀 까닭 없이 타인을 미워하지 않았고 불안에 갇혀 발광을 보이지 않았다. 공자는 자신이 하고 있는 일에 몰입을 할 수 있었기에 자신을 온전히 지켜낼 수 있었고, 자신이 걸어가기로 한 삶을 그대로 버텨낼 수 있었다.

공자의 일생을 그린 [공자성적도] 중 ‘방락장홍(訪樂長弘)’은 공자가 주나라에 갔을 때 장흥에게 풍류를 물었다는 일화를 그린 것이다. 이처럼 공자는 다른 나라를 방문할 때마다 학술만이 아니라 예술인과 교류를 했다. 공자가 제나라에서 순임금의 국가였던 소를 들었던 일도 이전부터 해오던 관행의 일종이었지만 예기치 않게 커다란 감동을 받았던 것이다. 출처: 국립중앙박물관

공자가 세상을 떠돌아다니다가 제(齊)나라에서 군주의 모델로 여겨지는 순(舜) 임금 시절에 국가(國歌)로 연주되었던 소(韶)를 듣게 되었다. 그는 소(韶) 음에 얼마나 심취했던지 석 달 남짓 고기 맛을 몰랐다고 한다.공자는 그 감동을 이렇게 말했다.

“소(韶) 음악을 감상하다가 이렇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구나!”

(曰: 不圖爲樂之至於斯也!)

— <논어> ‘술이(述而)’편 14장

여행객은 처음 일상을 벗어났다는 사실에 기쁨을 감추지 못한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가면 객지 생활에서 맛보는 즐거움도 권태롭게 된다. 슬슬 집에 돌아갈 생각을 하게 된다. 하지만 돌아갈 곳이 없는 나그네라면 사정이 다르다. 새 우는 소리에도 고향 집이 떠오르고 길가에 까르르 웃는 아이의 웃음소리에도 가족이 보고 싶어 미치게 된다.

공자도 15여 년에 이르는 기나긴 시간 동안 타국을 떠돌았다. 시름이 깊어 “그만 집으로 돌아가고 싶다!”라는 독백을 할 만하다. 하지만 공자는 제나라에서 소(韶) 음악을 들은 뒤에 근심 걱정이라고는 털끝만큼 없는 아이마냥 즐거워했다.

소(韶) 음악을 듣고서 느낀 즐거움은 한때 흥분해서 소리치는 것이 아니었다. 그 즐거움은 공자의 영혼을 촉촉이 적셔서 다른 것을 생각하지 못할 정도로 감동이 강했고 한 계절이 바뀔 때까지 지속될 정도로 깊었다. 이것이 바로 공자가 불운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지키는 ‘몰입’의 시간이다.

공자는 몰입의 시간을 가졌기 때문에 역설적으로 자신을 더 단단하고 더 굳건하게 벼릴 수 있었다. <주역>의 말로 하면 “스스로 굳건하게 벼리면서 한 순간도 멈추지 않는다”라는 ‘자강불식(自强不息)’이라고 할 수 있다. 이로써 공자는 시운(時運), 환경, 타인에 의해 슬퍼하고 기뻐하는 단계를 넘어서서 온전히 자신의 열망으로 자신을 태우는 ‘부도옹(不倒翁)’이 된 것이다.

공자는 자신의 운명을 밀어내지 않고 사랑했기에 초인(超人)이 될 수 있었다. 우리는 공자를 성인이 아니라 초인으로 바라본다면, 나와 공자 사이에 놓인 막연한 거리감을 줄일 수 있을 것이다. 아울러 공자가 어떻게 불우한 환경을 스스로 극복해나갔는지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신정근 성균관대 동양철학과 교수. 서울대학교 철학과를 졸업한 후 서울대학교 대학원에서 석ㆍ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성균관대 동양철학과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주요 저서로는 <마흔, 논어를 읽어야 할 시간>(2011), <인문학 명강, 동양고전>(공저, 2013), <불혹, 세상에 혹하지 아니하리라>(2013), <신정근 교수의 동양고전이 뭐길래?>(2012), <논어>(2012), <어느 철학자의 행복한 고생학>(2010)> 등이 있고, 역서로는 <소요유, 장자의 미학>(공역, 2013), <중국 현대 미학사>(공역, 2013), <의경, 동아시아 미학의 거울>(공역, 2013) 등 30여 권의 책이 있다. 앞으로 동양 예술미학, 동양 현대철학의 새로운 연구 분야를 개척하고, 인문학과 예술의 결합을 이룬 신인문학 운동을 진행하고자 한다.

출처 : 네이버캐스트>주제 전체>인문과학>철학>동양철학  2015.0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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