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 산책

[논어 명언명구] 불치하문(不恥下問) - 묻는 걸 부끄러워하지 않다

라라와복래 2015. 7. 16. 17:43

[논어 명언명구]

불치하문(不恥下問)

묻는 걸 부끄러워하지 않다

질문은 앎을 향한 지름길이다.

질문 없는 사회는 죽은 사회이다.

 

사회가 느리게 움직이면 ‘경험치’가 중요하다. 경험이 많으면 무슨 일이 생겨도 잘 처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나이 많은 사람이 존중받는 사회의 꼴을 갖추게 된다. 사회가 바뀌는 속도가 점점 빨라지고 있다. 오죽 했으면 잠깐 외국에 나갔다 왔더니 건물이 새로 들어서고 상점이 바꿔서 “다른 곳에 왔나!”라는 생각이 들 정도라는 말을 하곤 한다. 주변 경관만이 아니라 사회를 움직이는 트렌드와 시스템도 빠르게 바뀌고 있다.

사회가 빠르게 바뀌다보니 경험보다 누가 지식에 먼저 접근하느냐가 중요한 의제가 되었다. 나이와 지식의 소유가 비례하지 않게 되었다. 이때 공자가 아랫사람에게 묻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지 말라고 주문하고 있다. 이 말은 당시 사회가 빠르게 바뀌고 있는 것을 시사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나이를 무기로 알려주기를 바라지 말고 알려고 나서라는 주문을 하는 것이다.

<논어> 공야장(公冶長)편 16장

— 108번째 원문

자공이 공자에게 궁금한 듯이 물었다.

“위(衛)나라에 공문자라는 사람이 있는데,

그이는 무슨 까닭으로 ‘문(文)’이라는

영광스러운 시호로 불리게 되었는지요?“

공자가 대꾸했다.

“이해력이 뛰어나고 학문을 사랑하며,

아랫사람에게 모르는 것을 물어보면서도

전혀 부끄러워하지 않았기 때문에

‘문’이라고 할 만하다.”

孔 : 공(孔)은 구멍, 매우, 심히의 뜻으로 쓰인다. 여기서는 김씨, 이씨처럼 성을 나타낸다. 공문자(孔文子)는 위나라의 고위 공직자인 대부(大夫) 공어(孔圉)를 말한다. 그는 평소 배우기를 좋아했던 덕분에 죽어서 문(文)의 시호를 받았다.

謂 : 위(謂)는 말하다, 이르다, 일컫다라는 뜻이다.

何以 : 하이(何以)는 무엇 때문에라는 이유, 까닭을 묻는 의문문 형태로 쓰인다.

恥 : 치(恥)는 부끄러워하다, 부끄럼의 뜻이다. 치는 수치심(羞恥心)의 단어로 가장 많이 쓰인다.

下 : 하(下)는 아래, 아랫사람, 내리다의 뜻이다. 하(下)는 상(上)과 대비해서 쓰인다.

是以 : 시이(是以)는 이렇기 때문에라는 접속사로 쓰인다.

시호(諡號), 영원히 사는 기술

고대 사회에는 독특한 문화가 있었다. 사람은 생장하면서 끊임없이 호칭을 바꾸었다. 태어나면 아명(兒名) 또는 초명(初名)이 있고, 성인이 되면 자(字)와 호(號)가 있고, 죽으면 시호(諡號)가 있었다. 자신을 적극적으로 알리는 현대 사회의 기준으로 보면 잦은 개명은 좋을 일이 아니다. 한 가지 이름을 기억하기도 쉽지 않은데, 외울 만하면 이름을 바꾸니 기억하기가 더더욱 어렵다.

고대 사회의 개명은 현대 사회의 기준으로 이해할 수 없다. 고대인들은 부모와 임금의 면전처럼 특수한 상황을 빼고서 자신의 이름이 불리는 것을 기피했다. 따라서 이름을 부르지 않는 것은 상대를 존중하는 일종의 문화적 표현인 것이다. 특히 임금처럼 존귀한 이름은 더더욱 함부로 발음하지 않았다. 그래서 유방(劉邦)이 천자가 된 뒤로 경전과 공문서에서도 ‘방(邦)’ 자를 쓰지 않고, ‘국(國)’처럼 비슷한 의미를 가진 단어로 바꿔서 기록했다. 이를 이름 부르는 것을 꺼린다는 뜻에서 피휘(避諱)라고 한다.

동아시아의 이름 문화에서 시호는 그 나름의 독특한 점을 가지고 있다. 사람이 죽으면 그 사람의 평생 행적을 종합하여 한 글자 또는 두 글자로 새로운 이름을 부여했다. 이순신 하면 떠오르는 충무(忠武)가 바로 그러한 시호이다.

시호를 짓는 원칙이 있었다. 공야장편 16장에 나오는 “민이호학(敏而好學), 불치하문(不恥下問)”이 바로 문(文)이라는 시호에 어울리는 행적이다. 과거에 시호를 정할 때 왕이라고 해서 무조건 듣기 좋은 시호를 짓지 않았다. 예컨대 유왕(幽王)은 ‘어두운 왕’, ‘멍청한 왕’의 뜻이고 난왕(赧王)은 ‘얼굴 붉힐 왕’의 뜻이다. 이들은 죽은 뒤에 역사에 계속 ‘유왕’과 ‘난왕’으로 남아 있는 한 그들이 살아서 부정적인 일을 많이 했다는 사실을 그대로 알려주고 있다.

또한 시호는 동아시아 사람들이 영생(永生)의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 중의 하나이다. 유일신 문화에서 사람이 죽어 신의 구원을 받으면 영생을 누리게 된다. 동아시아 문화에서 영생을 심판할 그러한 신이 없다. 그 대신 동아시아 사람들은 역사의 법정을 마련했다. 이순신이 멸망의 기로에 선 나라를 지키다가 적탄에 맞아 비극적인 최후를 마쳤다고 하더라도, 역사에 긍정적인 평가를 받으면 죽지 않고 살아나게 된다. 이를 죽어도 죽은 것이 아니라는 ‘사이불사(死而不死)’라고 한다.

후세 사람들이 이순신을 닮아야 할 위인으로 평가하고 그의 뜻과 사적을 기리기 때문이다. 반면 연산군처럼 왕이 왕처럼 처신하지 않으면 죽어서도 조종(祖宗)으로 불리지 못하고 군(君)으로 낮은 평가를 받게 된다. 그가 살았을 적에 “하고 싶은 대로” 권력을 휘둘렀을지라도 죽어서 역사의 법정에서 불명예의 이름으로 남아 있다.

이렇게 보면 동아시아 문화는 천당(天堂)과 지옥(地獄)이라는 사후 세계의 문화에 익숙하지 않다. 대신에 역사의 법정을 마련하여 긍정과 부정 중 어떤 문맥으로 기록되느냐에 따라 존중받아야 할 인물인지 기피해야 할 인물인지 판정하는 것이다.

연산군과 그의 부인 신씨의 묘. 연산군은 폭군으로 평가를 받아서 죽어서 ‘조종’으로 불리지 못하고 ‘군’으로 불리고 있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묻는 만큼 안다

신은 호기심이 없으니 궁금한 것이 없다. 전지전능하기 때문에 하나의 원인이 나중에 어떤 결과로 이어질지 다 안다. 만약 신이 시험을 치면 당연히 만점을 받을 것이고 그 점수로 어디를 지원하면 당연히 합격할 것이다. 따라서 시험을 치기 전에 시험을 망칠까 두려워하지도 않고 시험을 치며 어려운 문제로 인해 골머리를 앓지도 않으며 시험을 친 뒤에 어떻게 될까 궁금해하지도 않는다.

인간은 신과 다르다. 지식과 능력에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교육과 훈련으로 지식과 능력을 키울 수 있지만 신과 같아질 수는 없다. 따라서 인간은 그 자체로 초월할 수 없는 한계를 가진 존재라고 할 수 있다. 그렇지만 사람은 완전한 지식을 향해 나아가는 노력을 그만둘 수 없는 것이다. 그 노력이 바로 인류가 이룩한 문명이다.

사람이 무지(無知)의 상태에서 유지(有知)로 바뀌는 데는 여러 가지 길이 있다. 체계적인 교육을 받는 것이 가장 유효한 길이다. 가르치고 배우는 과정 중에서 질문의 힘은 막강하다. 하지만 우리 현실은 문제 풀이와 주입식 교육으로 인해 수업과 강연에서 “질문이 있으면 뭐든 합시다”라고 이야기를 끄집어내면 일순간 정적이 흐른다. 이어서 사람들은 주위를 둘러보며 누가 손을 드는지 쭉 훑어본다. 질문이 쉬운 일이 아니라 만만찮은 일이라는 점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다.

“질문을 왜 하지 않느냐?”라고 물으면 “뭔가 알아야 질문을 하지요!”라는 항의성 대답이 되돌아온다. 맞는 말이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질문하지 않는 충분한 이유가 될 수 없다. 수업이나 강연에 참석할 때 참여자마다 지식의 상태는 각양각색이다. 하지만 언어를 매개로 이야기가 이어지는 만큼 말과 말 사이, 주장과 주장 사이에 많은 질문이 생겨날 수 있다.

처음 듣는 개념이면 그것이 무슨 뜻인지 재차 물을 수 있고, 논란이 되는 주장이라면 반대 주장이 어떤지 물을 수 있고, 아예 자신이 잘못 알아들은 부분이 있으면 다시 한 번 부연적인 설명을 바랄 수 있다. 이렇게 찾으면 질문할 것은 넘쳤으면 넘쳤지 없다고 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질문을 잘 하지 않은 이유는 다른 데에 있는 듯하다. 아마 우리는 질문을 “모르는 점을 알고자 하는 가장 단순한 언어 행위”가 아니라 “참여자들에게 뭔가 멋있게 보이는 일종의 공연 행위”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또 질문을 “군중에 묻혀 있지 않고 자신을 드러내야 하는 부담스러운 상황”으로 보는 경향이 있다. 사정이 이러하다 보니 궁금한 게 있어도 묻지 못하거나 말 잘하는 친구에게 대신 물어달라는 청탁을 하기도 한다.

질문은 수업과 강연의 물꼬를 새롭게 트고 활기를 불어넣는 사건이다. 일방적으로 진행되는 이야기가 질문으로 인해 다양한 목소리가 섞이고 이야기의 방향이 넓어지기도 하고 좁아지기도 한다. 이로 인해 사람들은 이전과 달리 수업과 강연 속으로 더 깊숙하게 빠져 들어가게 된다. 질문의 미덕이라고 할 수 있다.

질문의 미덕이 하나 더 있다. 질문은 모르는 것을 가장 빨리 그리고 정확하게 알 수 있는 지름길이다. 혼자서 찾으려고 하면 도서관에 가서 온갖 책을 찾아서 해당되는 곳을 헤매는 긴 시간을 보내게 된다. 하지만 전문가에게 물으면 묻는 순간 그 질문에 적실한 해답을 찾게 된다. 또 답을 하는 사람도 질문을 통해 모르고 있던 사실이나 놓치고 있던 요점을 되찾을 수 있다. 이렇듯 질문은 문제를 해결하는 역동적인 활동이라고 할 수 있다.

나이를 잊은 공자

우리는 아직도 사람을 만나면 나이를 따진다. 나이가 확인되면 그 다음 서로 상대를 어떻게 대우할지 명확한 기준이 생기게 된다. 평소 사이가 서먹서먹하다가도 술자리를 가지며 코가 삐뚤어지게 마신 뒤 서로 “형님” “동생” 하고 부르게 되면 부담 없는 관계로 바뀌게 된다. 이러한 나이에 따른 서열 문화는 한국인의 특성을 가장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문화이기도 하고 외국인이 적응하기에 가장 어려워하는 문화이기도 하다.

이렇게 나이를 따지는 것 자체는 좋다 나쁘다의 문제가 되지 않는다. 다만 나이로 인해 할 말을 제대로 하지 못하여 서로 어려운 관계가 되면 문제가 된다. 나아가 문제가 생길 때 오로지 나이에 의해서 사태를 해결하려고 하면 문제가 더 복잡하게 된다. 나이는 사람을 분류하는 수많은 기준 중에 하나일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로지 나이 타령을 하게 되면 나이가 사람 사이를 교통 정리하는 것이 아니라 교통 정체를 일으키게 되는 것이다.

특히 우리가 나이에 사로잡히면 공자가 말하는 ‘불치하문(不恥下問)’도 일어날 수가 없다. 나이 많은 사람이 나이 적은 사람에게 모르는 것을 묻고 싶어도 그 놈의 나이라는 체면 때문에 좀처럼 “이것 좀 알려줄래!”라는 말을 하지 못한다. 괜히 말을 빙빙 돌리며 “알아서 해주길 바라지만” 상대도 모르면 뒤에서 혼자서 서운해하게 된다. 반대로 나이가 적은 사람도 나이 많은 사람과 소통을 시도하지도 않고 아예 통하지 않은 사람으로 선을 그으면 그것도 바람직한 관계 설정이라고 할 수 없다.

한국 사람이 외국에 가거나 한국에서 외국 사람을 만날 때 어색해 하는 상황이 있다. 미국인은 사람을 만나서 통성명을 하고 나면 무조건 이름을 부른다. 상대의 나이가 나보다 많은지 적은지 아무것도 중요하지 않다. 우리는 이름보다 직함과 직위로 호칭을 대신한다. 그러다보니 나이를 불문하고 이름 부르는 호칭에 낯설 수밖에 없다.

나이는 경험에 의존하던 농경 시대에 통용되던 삶의 형식을 반영하고 있다. 정보화 시대이므로 그에 상응하는 호칭의 변화가 필요하다. 우리는 이미 사이버공간에서 타인의 나이를 확인하지 않으면서 서로 “님”으로 부른다. 나중에 알고보니 초등학생과 아저씨 관계로 밝혀지기도 한다.

이제 오프라인상에서도 “나이가 문제가 되지 않는 관계”를 만들어 갈 때가 되었다. 그렇게 될 때 ‘불치하문(不恥下問)’만이 아니라 여성에게 묻는 것이 부끄럽지 않은 ‘불치여문(不恥女問)’, 아이에게 묻는 것이 부끄럽지 않은 ‘불치아문(不恥兒問)’, 어르신에게 묻는 것이 부끄럽지 않은 ‘불치노문(不恥老問)’의 사회가 될 것이다. 질문이 많은 사회가 발전을 향한 끊임없이 움직이는 곳이다. 반면 지시를 받아 적는 사회는 문제가 생기면 침묵이 지배하는 곳이 된다.

공자는 알고 싶다는 욕망 앞에 나이만이 아니라 모든 것을 내려놓을 수 있는 사람이다. 나이로부터 자유로웠기 때문에 공자는 나이가 들지만 젊음을 유지하는 사람이 될 수 있었다. 육체는 노화를 피할 수 없었지만 정신은 노화를 뒤로 늦출 수 있었던 것이다. 나이를 떠나면 이렇게 많은 선물을 받게 된다. 공자는 바로 그것을 실증했던 것이다.

신정근 성균관대 동양철학과 교수. 서울대학교 철학과를 졸업한 후 서울대학교 대학원에서 석ㆍ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성균관대 동양철학과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주요 저서로는 <마흔, 논어를 읽어야 할 시간>(2011), <인문학 명강, 동양고전>(공저, 2013), <불혹, 세상에 혹하지 아니하리라>(2013), <신정근 교수의 동양고전이 뭐길래?>(2012), <논어>(2012), <어느 철학자의 행복한 고생학>(2010)> 등이 있고, 역서로는 <소요유, 장자의 미학>(공역, 2013), <중국 현대 미학사>(공역, 2013), <의경, 동아시아 미학의 거울>(공역, 2013) 등 30여 권의 책이 있다. 앞으로 동양 예술미학, 동양 현대철학의 새로운 연구 분야를 개척하고, 인문학과 예술의 결합을 이룬 신인문학 운동을 진행하고자 한다.

출처 : 네이버캐스트>주제 전체>인문과학>철학>동양철학  2015.0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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