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 산책

[논어 명언명구] 일단사일표음(一簞食一瓢飮) - 대그릇의 밥과 표주박의 물

라라와복래 2015. 7. 23. 19:45

[논어 명언명구]

일단사일표음(一簞食一瓢飮)

대그릇의 밥과 표주박의 물

비슷한 삶은 안정적이다.

도전의 삶은 불안 속에 의미를 찾는다.

 

예나 지금이나 부모는 자식의 미래가 궁금해서 장래 희망을 묻곤 한다. 과거에는 대통령, 장군 등 권력이 있거나 ‘사’ 자가 들어가는 전문직이 되고 싶다는 사람이 많았다. 요즘에는 프로선수, 연예인, CEO 등 돈을 많이 벌거나 고용이 안정된 공무원이 되겠다는 사람이 많다. 명예보다는 돈을 더 중시하는 방향으로 커다란 변화가 생겼다고 할 수 있다.

공자는 제자 안연의 생계를 걱정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안연은 경제적 안정을 찾지 않고 스스로 의미 있다고 생각하는 삶을 살았다. 그는 가난한 삶의 고통을 모르는 철부지도 아니고 의미 있는 삶의 겉멋에 도취된 바보가 아니었다. 그는 의미 있는 삶이 자신에게 주는 기쁨을 느껴서 중도에 그만둘 수 없었던 것이다. 공자는 안연에게서 자신의 젊은 모습을 발견했기 때문에 다른 어떤 제자보다 반겼을 것이다.

<논어> 옹야(雍也)편 11장

— 132번째 원문

참으로 훌륭하구나, 안연은!

대그릇에 담은 밥 한 그릇을 먹고

표주박에 담긴 물 한 모금을 마시면서

달동네에 살고 있구나.

아마 내로라하는 사람들도

그런 생활의 고통을 참고 견디지 못할 터인데

오히려 안연은 그 생활의 즐거움을

바꾸려들지 않는구나.

참으로 훌륭하구나, 안연이여!

賢 : 현(賢)은 뛰어나다, 어질다의 뜻으로 사람의 일반적인 재능을 나타낸다. 특히 도덕적 재능에 한정해서 쓰이기도 한다.

哉 : 재(哉)는 호격과 감탄사 뒤에 쓰이는 어조사로서 뜻이 없다.

回 : 회(回)는 돌다, 돌아가다의 뜻이지만 여기서 안연(顔淵)의 이름으로 쓰였다. 연(淵)은 안회(顔回)의 자이다.

簞 : 단(簞)은 대로 만든 광주리를 가리킨다.

食 : 밥을 뜻하면 ‘사’로 읽고, 먹다를 뜻하면 ‘식’으로 읽는다.

瓢 : 표(瓢)는 박으로 만든 바가지로 표주박이라 부른다.

陋 : 누(陋)는 좁다, 변변찮다의 뜻이다.

巷 : 항(巷)은 거리, 복도, 마을을 뜻한다. 누항(陋巷)은 달동네, 슬럼가처럼 가난한 사람들이 밀집해서 사는 동네를 가리킨다. 오늘 고층 아파트가 즐비한 서울의 몇몇 지역은 과거에 달동네로 널리 알려진 거주 지역이었다.

堪 : 감(堪)은 견디다, 뛰어나다의 뜻이다.

憂 : 우(憂)는 근심하다, 걱정의 뜻이다.

改 : 개(改)는 고치다, 바뀌다, 뜯다의 뜻이다.

공자와 안연

<논어>는 다양한 개성을 가진 주인공이 등장하는 문학 작품이나 드라마로 볼 수도 있다. 이렇게 볼 때 공자를 비롯하여 여러 사람의 관계가 작품의 전개를 구성하는 이야기가 될 것이다. 공자와 제자의 관계라면 공자와 안연, 공자와 자로, 공자와 자공의 관계가 사람들의 관심을 끌 만하다.

자공은 알고 싶은 것이 있으면 공자에게 끝까지 캐묻는 스타일이다. 특히 그는 공자가 죽은 뒤에 다른 제자들이 삼년상을 마치고 고향으로 돌아갔지만 홀로 스승의 무덤을 삼 년 더 지킨 뒤에라야 고향으로 돌아갔다. 자로는 공자가 나쁜 소문을 들을까봐 가장 염려한 제자였다. 그는 직선적이고 다소 과격한 성격의 소유자였던 탓에 공자에게 대들기조차 했다.

안연은 자로나 자공 두 사람과 다른 개성의 소유자였다. 할 말을 다하는 자로와 달리 평소 말을 건네는 경우가 드물었고, 꼬치꼬치 캐묻는 자공과 달리 한 번 들으며 빙그레 웃으며 공자의 생각을 스펀지마냥 흡수했다. 이쯤 설명을 들으면 안연은 성격이 차분하고 공부 잘 하는 모범생으로 생각할 수 있다. 이런 추측은 나름 일리가 있다. 공자도 그렇게 생각했기 때문이다.

“내가 안연과 온종일 이야기를 나눴지만 한 차례도 의문을 제시하지 않아 바보처럼 보였다. 방을 나간 뒤 내가 이 사람이 생활을 어떻게 하는지 살펴보니, 내 말을 제대로 실현하고 있었다. 안연은 결코 바보가 아니다.” — ‘위정’편 9장 (<논어> 25번째 원문)

공자가 무슨 말을 하면, 안연은 이해하는 듯 웃기만 할 뿐 이의나 질문을 하지 않았다. 이런 상황을 자주 겪다보니 공자도 안연이 모르면서 아는 척하는 바보가 아닌지 의구심이 들었다. 그렇다고 공자는 수업시간에 안연에게 대놓고 자신의 말을 이해하느냐고 물어볼 수는 없었다. 공자는 하는 수없이 안연의 뒤를 밟으며 무엇을 하는지 살펴보았다. 공자는 안연이 사람을 만나거나 혼자서 하는 언행을 살펴보고서 자신의 의구심이 잘못이라는 걸 알았다. 안연이 자신의 말을 완전히 이해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생활에서도 그대로 실천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보면 안연과 공자의 사이도 어디 시트콤에 나올 한 장면처럼 보인다. 제자가 바보인지 의구심이 들어서 몰래 뒤를 밟으며 제자를 관찰하는 공자를 생각해보라. 얼마나 제자가 걱정이 되었으면 그렇게 했을까 이해가 되기도 한다. 반면 선생이 사립 탐정처럼 살금살금 다가가는 장면이 코믹하게 느껴진다.

이해했으면 알아들었다는 표현이라도 하지 알아듣고서도 아무런 말을 하지 않는 안연을 생각해보라. 선생의 말을 다 알아들었으니 질문을 할 게 없다는 안연의 입장도 이해가 되기도 한다. 반면 수업에 참여하고 있으면서도 입을 봉한 듯이 가만히 듣고만 있는 안연을 생각하면 웃음이 나오지 않을 수가 없다.

공자는 안연에 대한 오해를 푼 뒤에 안연에 대한 지도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특히 공자는 <논어>에서 가장 주목을 받는 ‘극기복례(克己復禮)’의 가르침을 안연에게 전했다. 당시 사람들이 자기 자신을 돌보는 일에만 관심을 가질 뿐 함께 가꾸어야 할 공공 영역을 도외시했다. 하지만 공공 영역에 대한 관심을 가지지 않으면 개인의 삶에도 위기가 닥쳐올 뿐만 아니라 안전한 공동체를 만들 수 없다. 오늘날 식으로 말하면 의학에서 돈이 되는 성형과 생명연장에만 관심을 둘 것이 아니라 감염과 예방을 다루는 공공의료에 관심을 기울여야 사람다운 세상이 된다는 것이다.

공자의 일생을 그린 <공자성적도> 중 ‘극복전안(克復傳顔)’. 공자가 안연에게 ‘극기복례(克己復禮’)의 가르침을 전한 내용을 담은 그림이다.

공자는 자신이 평생에 걸쳐서 찾아낸 진리를 안연에게 전수했던 것이다. 안연도 자신을 아끼는 공자를 아버지처럼 생각했을 뿐만 아니라 그만두려고 해도 그럴 수 없게 만드는 ‘욕파불능(欲罷不能)’의 리더십에 감동을 했다. 그래서 두 사람은 단순히 스승과 제자 사이를 넘어서 서로에게 무한한 사랑을 느끼는 연인 사이였을 것이다.

안연은 자신의 뒤를 이으리라는 공자의 기대와 달리 스승보다 먼저 세상을 떠났다. 공자의 슬픔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었다. 그는 “하늘이 나의 뒤를 끊어버리는구나!”(‘안연’편 9장 (<논어> 277번째 원문)라며 절망했다. 어떤 일을 겪어도 담담하던 공자도 안연의 죽음 앞에 무너지지 않을 수가 없었다. 공자는 평소 절제된 모습을 보였지만 안연이 죽자 애간장을 녹일 듯 통곡했다. 옆에 있던 제자들이 “너무 비통해한다”라며 만류를 할 정도였다. 그때 공자의 말이 압권이다.

“내가 그렇게 비통해했는가? 저 못난 사람을 위해 비통해하지 않으면, 도대체 누구를 위해 그렇게 할꼬?” — ‘선진’편 10장 (<논어> 278번째 원문)

복성묘(復聖廟)의 입구. 취푸(曲阜)는 공자를 기리는 공간이 있고 덜 알려져 찾는 사람이 적어 한적하지만 그의 제자 안연을 기리는 공간도 있다. 출처: ⓒ 신성빈

안연, 송나라 학계의 멘토

당 제국에는 유교보다 도교와 불교가 성행한 시기였다. 예를 들자면 도교의 사원을 도관(道觀)이라고 하는데, 당시 도관은 거의 모두 주에 건립되었다. 황족 등이 기증한 경우를 제외하고도 약 2천여 개의 관립 도관과 15,000여 명의 도사가 활동하고 있었다. 또 헌종(憲宗)은 819년에 부처의 사리를 궁중에 특별히 보관하고자 했다. 부처의 사리가 왕실의 안정과 행운을 빌어준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라.

이러한 상황에서 한유(韓愈) 등은 유교의 가치를 사회적으로 확산시키려는 ‘유교 부흥 운동’을 일으키게 되었다. 한유는 “부처의 뼈를 논한다”는 <논불골표(論佛骨表)>라는 글을 발표하여 헌종의 기도를 강하게 비판했다. 불교가 외래 종교일 뿐만 아니라 중국에 전래된 뒤로 사회적으로 좋은 영향을 끼치지 않았다는 주장을 펼쳤다.

한유 등이 불을 지핀 ‘유교 부흥 운동’은 송나라의 건국과 더불어 한층 더 활발하게 진행되었다. 춘추전국시대에 다양한 사상가들이 등장하여 사상의 자유 공간을 개척했다. 그것이 바로 제자백가의 출현으로 나타났던 것이다. 송나라 학술 여건은 춘추전국시대와 달랐다. 당시 사상가들은 유교만이 아니라 불교와 도교를 두루 공부했다. 이때 유교가 두 사상에 비해 깊이가 얕다고 여겨져서 많은 사람들이 유교보다 불교와 도교에 기울어져 있었다. ▶한유의 초상화. 유교보다 도교와 불교가 성행했던 당 제국 시대에, 한유는 유교의 가치를 사회적으로 확산시키고자 했다. 출처: ⓒ <동양의 고전을 읽는다>

이러한 상황에서 주렴계, 정호와 정이, 장재 등 일군의 사상가들이 등장해서 유교가 불교와 도교에 비해 결코 뒤떨어지지 않았다는 점을 설파하며 ‘유교 부흥 운동’을 일으켰다. 이러한 운동이 훗날 주희에 의해 ‘도학(道學)’으로 정립되면서 오늘날 성리학, 주자학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고 있다.

유교 부흥 운동을 일으킬 때 두 가지 주제가 각광을 받았다. 첫째, 유교가 불교와 도교에 비해 깊이가 결코 얕지 않다는 점을 밝혀야 했다. 오늘날 철학의 주제로 보면 존재론 또는 형이상학의 문제였다. 당나라 이전에 사물은 모두 기(氣)의 조합과 비율에 의해 생성된다고 보았다. 기(氣)는 사람이 어떠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양보할 수 없이 꼭 지켜야 하는 이치, 구성원들의 가치가 충돌할 때 우선순위에 두어야 할 이념을 설명할 수 없었다. 기(氣)는 더위와 추위와 같은 기후가 나타나고 키가 크고 작은 차이를 설명할 수 있지만 무엇이 다른 것보다 절대적으로 옳다는 점을 제시할 수 없었다. 송나라의 유학자들은 기(氣)를 리(理)로 대체하며 사람과 공동체가 지켜야 할 가치와 이념의 지위를 굳건하게 만들었다. 그래서 송나라의 유학을 리학(理學)으로도 부르는 것이다.

또 하나는 어려운 여건에서도 학문을 지속할 수 있는 힘에 대한 이야기였다. 사람은 하고 싶은 것과 할 수 있는 것 사이에서 고통스러워한다. 하고 싶은 것을 하려니 여건과 능력이 받쳐주지 않고, 할 수 있는 것을 하려니 성에 차지 않아 불만스럽다. 그래서 많은 사람은 ‘가지 않은 길’에 대한 원망과 후회를 안고 산다. 안연은 형편으로 보면 당연히 돈을 벌어야 한다. 그는 하고 싶은 길을 가면서 겪는 고통을 그대로 껴안았다.

송나라 정이(程頤, 1033-1107)는 안연이 도대체 무슨 학문을 좋아했는가라는 해답을 찾는 <안자소호하학론(顔子所好何學論)>이라는 글을 지었다. 공자의 제자가 3000명으로 알려져 있는데, 그중에 유독 배움을 좋아한 안연이 송나라에서 ‘유교 부흥 운동’을 일으킨 사람들의 멘토가 되었던 것이다. 안연은 배움을 통해 평범한 사람이 거룩한 사람이 거듭날 수 있는 길을 개척한 사람으로 존중을 받았다.

안빈낙도(安貧樂道)와 자발적 가난

누항(陋巷). 춘추시대 안연이 안빈낙도의 삶을 살았을 거리로 추정되는 취푸(曲阜)의 거리이다. 출처: ⓒ 신성빈

가난과 부유한 삶의 길 중 하나를 선택하라고 하면 어떻게 될까? 많은 사람들은 부자의 길을 선택할 것이다. 가난은 불편하고 부자는 풍요로운 삶을 살 것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삶의 만족도 또는 행복도를 조사하는 결과를 보면 우리나라 사람들은 우리보다 경제적으로 못사는 나라의 사람들에 비해 늘 뒤쳐진다. 부를 위해서 하고 싶은 많은 것들을 희생하고, 또 지금의 부를 지키느라 더 많이 노력을 하므로 행복을 누릴 사이가 없기 때문이다.

에른스트 슈마허의 <자발적 가난>을 보면 가난이 불행의 동의로서 극복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고 항변한다. 덜 풍요로운 삶이 오히려 더 행복하고, 부를 위해 희생하지 않고 단순하게 사는 것이 사람들에게 많은 여유를 가져온다고 본다. 이에 따라 슈마허는 역설적으로 가난을 배우자고 제안하고 있다.

안연의 삶은 ‘자발적 가난’의 가치를 외치는 슈마허의 이야기를 그대로 실천하는 삶이라고 할 수 있다. 과거에 안연은 가난에 편안해하며 제 가치를 즐기는 안빈낙도(安貧樂道)의 삶을 살았다고 보았다. 안연이라고 해서 물질적 욕망이 조금도 없다고 말할 수 없다. 그는 가난하여 내일을 걱정하지 않을 수 없지만 배움을 통해 다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희열을 느꼈던 것이다. 그 희열은 하고 싶은 공부를 하며 겪는 삶의 고통을 이겨내는 원동력이 되었던 것이다.

오늘날 ‘일단사일표음(一簞食一瓢飮)’했던 안연의 삶을 돌아본다고 해서 가난 자체를 예찬할 수는 없다. 물질적 성취 때문에 자신이 간절히 바라는 것의 가치, 자신이 하면서 가슴이 뛰는 일의 소중함을 도외시하는 성과주의에 포로가 된 나를 돌아보지 않을 수가 없다.

신정근 성균관대 동양철학과 교수. 서울대학교 철학과를 졸업한 후 서울대학교 대학원에서 석ㆍ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성균관대 동양철학과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주요 저서로는 <마흔, 논어를 읽어야 할 시간>(2011), <인문학 명강, 동양고전>(공저, 2013), <불혹, 세상에 혹하지 아니하리라>(2013), <신정근 교수의 동양고전이 뭐길래?>(2012), <논어>(2012), <어느 철학자의 행복한 고생학>(2010)> 등이 있고, 역서로는 <소요유, 장자의 미학>(공역, 2013), <중국 현대 미학사>(공역, 2013), <의경, 동아시아 미학의 거울>(공역, 2013) 등 30여 권의 책이 있다. 앞으로 동양 예술미학, 동양 현대철학의 새로운 연구 분야를 개척하고, 인문학과 예술의 결합을 이룬 신인문학 운동을 진행하고자 한다.

출처 : 네이버캐스트>주제 전체>인문과학>철학>동양철학  2015.07.15

http://navercast.naver.com/contents.nhn?rid=2886&contents_id=94608&leafId=288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