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 산책

[논어 명언명구] 박시제중(博施濟衆) - 자기 것을 널리 나누어 사람을 돕는다

라라와복래 2015. 8. 1. 19:46

[논어 명언명구]

박시제중(博施濟衆)

자기 것을 널리 나누어 사람을 돕는다

혼자 우뚝 서는 삶은 아름답다.

함께 가는 삶은 더 아름답다.

 

“왜 다른 사람을 도와야 할까?” 이타심이 넘치는 사람이라면 당연한 도와야지 왜 돕는 이유를 묻느냐고 반문을 할 것이다. 아무런 근거 없이 행동을 하는 것보다 근거를 말하며 행동하는 것이 인간답다. 근거가 있으면 지금까지 하던 행동을 금방 그만두는 식의 좌충우돌을 하지 않기 때문이다. 당연히 도와야지 생각하지만 그 근거나 이유를 대라고 하면 대답하기가 쉽지 않다.

같은 1000원이라도 나에게보다 다른 사람에게 훨씬 더 값어치가 있을 수 있기 때문에 도울 수 있다. 내가 평소에 다른 사람을 도와야 내가 도움이 필요할 때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을 수 있기 때문에 도울 수 있다. 같은 사람이므로 사람으로서 최소한 삶의 질을 누려야 하기 때문에 도울 수 있다. 이에 대해 공자는 뭐라고 했을까? 그는 “다른 사람을 돕는 것이 결국 나 자신을 돕는 것과 같다.”라고 생각했다. 그의 생각을 따라가보자.

<논어> 옹야(雍也)편 30장

— 151번째 원문

자공이 물었다.

“예컨대 누군가가 백성들에게 널리 나누어

많은 사람들을 구제한다면 어떻습니까?

그 사람을 평화의 사도라고 할 수 있습니까?“

공자가 대답했다.

“어떤 인(사랑)의 차원에서 일삼겠는가!

반드시 성(거룩함)의 차원일 게다!

요임금과 순임금과 같은 위대한 왕들도

그런 면에서 오히려 부족하다고 생각했을 터이다!

무릇 인(사랑)이란 자기가 서고 싶은 대로 주위 사람을 세우고,

자기가 이르고 싶은 대로 주위 사람을 이르게끔 한다.

가까운 일상에서 유추를 끌어낼 수 있으면

그것이 인(사랑)으로 가는 방향이라고 일컬을 수 있다.“

施 : 시(施)는 베풀다, 나누다, 함께하다의 뜻이다. 은혜를 베풀다는 시혜(施惠)가 이러한 의미의 대표적인 용례이다. ‘베풀다’가 일방적인 느낌을 전달하므로 ‘나누다’는 대등한 관계를 나타내므로 오늘날 번역에서 후자가 낫다.

濟 : 제(濟)는 건너다, 풀다, 건지다의 뜻으로 문제 상황에서 벗어나서 안정을 찾는다는 맥락으로 쓰인다.

事 : 사(事)는 일의 명사로 많이 쓰이지만 여기서 일삼다, 목표로 간주하다의 뜻이다.

病 : 병(病)은 아픔, 근심, 문젯거리의 명사로 많이 쓰이지만 여기서 괴로워하다, 어려워하다의 뜻이다. 요임금과 순임금이 왕으로 해결해야 하는데 해결되지 않은 상태로 스스로 그 문제를 풀기에 부족하다고 느낀 것이다.

譬 : 비(譬)는 견주다, 깨우치다, 알아차리다의 뜻을 나타내고 비유(譬喩)로 쓰인다.

인자(仁者)와 성인(聖人)의 차이

자공과 공자의 대화를 읽다보면 두 사람이 인(仁)에 대해 서로 다르게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 원인은 인(仁)의 범위를 어디까지 정하느냐에 있다. 두 사람 사이에 이런 불일치가 왜 생겨나게 되었을까?

인(仁)의 가장 기본적인 의미에서부터 논의를 시작해보자. ‘사랑’은 인의 가장 기본적인 의미이다. 같은 사랑이라고 해도 아이에게 젖을 물리는 엄마의 사랑에서부터 세상의 모든 생명체를 돌보는 종교적 사랑에 이르기까지 그 범위가 커다란 차이를 보일 수 있다. 자공은 사랑의 범위를 최대로 넓혀서 모든 사람을 포괄하려고 한 반면 공자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공자는 <논어>에서 인(仁)을, 사람을 사랑한다는 뜻의 ‘애인(愛人)’으로 풀이한 적이 있다. 이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기본적으로 나와 나랑 어울리는 주위 사람의 관계에서 출발한다. 즉 인(仁)은 나와 아무런 관련이 없는 사람, 어디에 있는지 모르는 사람, 죽을 때까지 만날 수 없는 사람까지 사랑하라는 의미로 볼 수는 없다. 바로 이 지점은 인(仁)과 성(聖)이 구별되는 중요한 차이라고 할 수 있다. 인(仁)은 자연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나와 관련을 맺고 있는 사람들과의 관계망을 중시하는 반면 성(聖)은 나와 관계를 갖지 않은 낯선 사람을 포괄한다.

성인이 나무를 자르는 톱을 발명했다고 하자. 이 발명품은 나무를 이용하는 모든 사람에게 도움을 준다. 톱은 이전에 돌이나 칼로 나무를 자라는 작업과 비교할 수 없는 효율성을 가져다준다. 톱은 성인과 관련이 있는 사람만이 아니라 그것을 필요로 하는 모든 사람에게 도움을 줄 수 있다.

오늘날 빌 게이츠와 스티브 잡스도 누구나 쉽게 상용할 수 컴퓨터와 스마트폰을 만들었다는 점에서 성인이라고 할 수 있다. 컴퓨터와 스마트폰은 그들 주위 사람만이 아니라 세계인이 쓰면서 문명의 총아로 각광을 받고 있다. 이렇게 보면 성인은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골고루 자신의 욕망을 실현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반면 인(仁)은 가족 중에 아픈 사람이 있을 때 적절한 간호를 하는 일, 마을 사람이 공동으로 이용하는 다리가 홍수에 떠내려갔을 때 다시 다리를 놓은 일, 형제가 재산과 특권을 두고 강하게 대립할 때 내전으로 치닫지 않고 사태를 조정하는 일처럼 일상적으로 시공간을 공유하는 사람들 사이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다.

공자는 인(仁)의 의미 맥락을 분명하게 하기 위해 “기욕립이립인(己欲立而立人), 기욕달이달인(己欲達而達人)”에서 실천 방안을 제시하고 있다. “내가 어떤 자리에 서고 싶은데 다른 사람이 그 자리에 서고 싶을 수 있고, 내가 어떤 목표에 이르고 싶은데 다른 사람도 그 목표에 이르고 싶을 수 있다.” 이런 상황은 부모님이 자녀가 똑같이 원하는 선물을 하나만 사 왔을 경우로 바꿔서 생각해볼 수 있다. 내가 선물을 가지기를 원하는 만큼 상대도 선물을 가지고 싶어 한다.

두 사람이 모두 가지려고 하면 누구도 가질 수가 없다. 어떻게 해야 할까? 선물을 갖기를 더 강하게 바라거나 선물을 가지고 더 잘 활용할 만한 사람에게 우선권을 줄 수도 있고, 순서를 정해 이번에는 양보할 수도 있다. 내가 가지고 싶다는 욕망 자체로부터 한 걸음 물러나서 다른 사람의 욕망을 인정하고 우선권을 줄 수 있다면, 그것이 바로 상대를 사랑하는 실천 방법인 것이다. 이때 상대는 가상의 존재도 아니라 매일 나와 부대끼며 살아가는 이웃인 것이다.

공자의 일생을 그린 <공자성적도> 중 성문사과(聖門四科). 공자가 제자들을 덕행, 언어, 정사, 문학의 네 전공으로 나누어 가르쳤던 내용을 담고 있다. 공자는 이 제자들과 함께 사람 사이를 편하게 만들 수 있는 지혜를 탐구했다.

공자의 이상 사회

공자는 ‘박시제중(博施濟衆)’에 대한 두 가지 주장을 펼치고 있다. 하나는 ‘박시제중(博施濟衆)’은 인자(仁者)가 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선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성인이 ‘박시제중(博施濟衆)’을 할 수 있지만 당시 훌륭한 성왕으로 알려진 요와 순도 그것에 미치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박시제중(博施濟衆)’은 현실에서 실현하기가 결코 쉽지 않지만 실현하기를 바라는 목표라고 할 수 있다. 결국 공자는 ‘박시제중(博施濟衆)’을 자신이 이룩하고자 하는 이상사회의 모습으로 보고 있는 것이다.

‘박시제중(博施濟衆)’은 자신의 것이든 자신이 처분할 수 있는 것이든 널리 나누어서 사람이 겪고 있는 문제 상황을 도우라는 뜻이다. 그 의미가 추상적이어서 분명하게 전달되지 않는다. 다른 문장을 통해 공자의 속뜻을 더 들여다볼 수 있다. 공자가 제자인 자로, 안연과 자리를 함께 했을 때 두 사람에게 “각자 자신의 포부를 말해보라”고 말문을 뗐다. 자로는 자신이 가진 것을 친구들과 함께 쓰겠다고 말했다. 안연은 자신이 한 일을 자랑하지 않겠다고 말했다. 자로가 거꾸로 공자에게 같은 질문을 하자 공자는 이렇게 답했다.

“늙은이는 불편한 게 없고, 친구들은 서로 믿음을 갖고, 청소년은 따뜻한 보살핌을 받았으면 좋겠다.”(老者安之, 朋友信之, 少者懷之.) —<논어> 공야장편 27장 (119번째 원문)

공자는 ‘박시제중(博施濟衆)’을 어르신, 젊은이, 친구로 나누고 그들 각각에게 어울리는 방안을 제시하고 있다. 나이가 들면 이전과 달리 앞으로 어떻게 될지 몰라 불안의 강도가 더 커진다. 불안을 느끼지 않는다면 노년에서 맞이하는 최고의 행복이라고 할 수 있다. 젊은이는 자신의 능력을 개발하여 사회에 진출하고자 한다. 취업을 못하면 젊은이는 사회로부터 환영을 받지 못하고 버림을 받았다고 생각하게 된다. 사회로부터 환대를 받는다면 젊은이는 자신이 갈고 닦은 기량을 맘껏 펼치게 될 것이다.

친구는 인생의 긴 여행을 갈 때 없어서는 안 될 소중한 존재이다. 서로 의지하는 친구로부터 배신을 당하면 그 어떠한 일보다 고통스러운 일은 없다. 친구끼리 서로 믿고 의지할 수 있다면, 앞으로 닥칠 그 어떠한 일도 두려움을 주지 못할 것이다. 공자는 늙은이와 젊은이 그리고 친구 사이가 어떠해야 하는지를 말함으로써 ‘박시제중(博施濟衆)’의 사회가 어떻게 구체화될 수 있는지 나름의 청사진을 제시했다.

공자의 이상을 공감하는 사람들은 이후에도 이상사회의 모습을 한층 더 분명하게 그리려고 노력했다. <예기>에 나오는 ‘대동(大同)’은 후대에 가장 많은 영향을 끼친 이상사회의 틀이 되었다. 그 일단을 살펴보자.

“능력과 실력 있는 사람을 선발하고 서로 신뢰와 화합을 일군다. 사람들은 자신의 부모만을 가까이하지 않고 자신의 자식만을 아끼지 않는다. 늙은이는 생애를 편안히 마치고, 청장년은 자리를 잡아 실력을 발휘하고, 어린이는 잘 자라도록 보살핌을 받는다. 홀어미와 홀아비, 고아, 독거노인, 환자들도 모두 사회의 보살핌을 받는다.” —<예기> ‘예운’(禮運)

‘예운’에 나오는 ‘대동(大同) 사회’는 동아시아 이상사회를 말할 때 꼭 빠지지 않고 언급되는 내용이다. 기원을 따지고보면 대동 사회의 내용도 공자가 말했던 ‘박시제중(博施濟衆)’의 사회에서 살을 보태면서 발전해 온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박시제중(博施濟衆)’과 ‘대동(大同)’은 공통적으로 사회적 약자까지도 사회의 따뜻한 보살핌을 받아서 그 누구도 버림을 받지 않고 따뜻하게 환대받는 공동체를 가리킨다고 할 수 있다.

우리나라의 최초 서양식 병원이 1885년 4월에 오늘날 헌법재판소 자리에 세워졌다. 병원의 이름은 처음에 ‘광혜원(廣惠院)’이었다가 2주 뒤에 ‘제중원(濟衆院)’으로 바뀌었다. ‘박시제중(博施濟衆)’의 의미가 병원의 이름에 오롯이 들어 있다고 할 수 있다.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식 국립병원 제중원. ‘박시제중(博施濟衆)’의 의미가 병원의 이름에 오롯이 들어 있다고 할 수 있다

‘홀로 우뚝’ 대 ‘다 같이 함께’

우리 사회는 대중교통을 이용할 때 사회적 약자를 배려하려고 한다. 나이 많으신 어르신, 다쳐서 거동이 불편한 사람, 임신부 등에게 앉을 자리를 우선적으로 권하자는 것이다. 나이 드신 어르신에게 자리를 양보하면 여러 가지 반응을 보인다. 어떤 경우 그냥 앉는 경우도 있고, 고맙다는 인사와 함께 자리에 앉기도 한다. 어떤 경우 괜찮다고 사양하는 경우도 있고, 가볍게 화를 내며 자신은 두 발로 서서 버틸 수 있다고 말하는 경우도 있다.

힘이 드실까봐 양보하는 것인데, 반기기도 하고 거절하기도 하니 약간 당혹스럽기도 하다. 만약 힘이 들어 자리를 양보해 달라고 말할 경우 양보를 한다면, 자리 양보로 인한 문제는 없어질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아직 자신의 의사를 주장하는 것보다 알아서 배려하는 것에 익숙하다. 이러한 사고의 밑바닥을 쭉 따라가 보면, 우리는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 있으면 그 사람이 원하든 원하지 않든 도와야 한다.”는 배려(配慮)의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나아가 우리는 “나 혼자서만 앞으로 갈 것이 아니라 가급적이면 주위 사람과 함께 보조를 맞추면 나아가야 한다”는 동행(同行)의 사고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배려와 동행의 사고는 우리가 앞에 살펴본 ‘박세제중(博施濟衆)’, ‘대동(大同)’의 사회 이상과 겹치는 점이 많다. 힘겨워서 넘어지는 동료, 실의로 인해 좌절한 친구, 병으로 신음하는 가족이 있으면 모른 채 하지 않고 함께 보듬고 나아가는 것이 인간다운 사회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동아시아 사회는 ‘박시제중(博施濟衆)’을 이상으로만 여기지 않았다. 장자는 어느 날 길을 가다가 웅덩이의 물이 말라 물이 남은 곳에 물고기가 서로 달라붙어서 입에서 거품을 내며 서로 적셔주는 장면을 보았다(<장자> ‘대종사(大宗師)’). 아마 공자가 이 장면을 보았다면 서로 돕고 서로 의지하는 아름다운 광경이라고 보고, ‘박시제중(博施濟衆)’의 한 장면이라고 여겼을 것이다. 하지만 장자는 물고기가 드넓은 강과 호수에서 서로 부대끼지 않고 서로 누가 있는 줄 모르고 사는 ‘상망강호(相忘江湖)’를 바람직하다고 생각했다. 장자는 오늘날 프라이버시를 존중해야 한다는 사고에 동의할 것으로 보인다.

공자는 장자와 같은 사람을 두고 세상 바깥에 사는 사람이라는 뜻으로 ‘방외지사(方外之士)’라고 했다. 그렇다면 공자는 세상 안에 사는 ‘방내지사(方內之士)’라고 할 수 있다. 세상살이가 아무리 힘들고 끝없이 실패를 겪는다고 하더라도 사람은 세상에 적응하는 존재가 아니라 하늘-대지가 다 할 수 없는 일을 떠맡아서 완수하는 주인공이기 때문이다.

<공자성적도> 중 ‘송일벌목(宋人伐木)’. 송나라 사람들이 나무를 쓰러뜨려 공자와 그 일행을 해치려고 하는 장면이다. 공자는 세상이 자신을 따뜻하게 환대하지 않고 살해하려고 했지만, 고통을 겪고 있는 사람들의 문제를 풀고자 하는 열망을 내려놓지 않았다. 훗날 유학자들은 공자의 이러한 지칠 줄 모르는 열망을 이어받고자 했다.

신정근 성균관대 동양철학과 교수. 서울대학교 철학과를 졸업한 후 서울대학교 대학원에서 석ㆍ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성균관대 동양철학과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주요 저서로는 <마흔, 논어를 읽어야 할 시간>(2011), <인문학 명강, 동양고전>(공저, 2013), <불혹, 세상에 혹하지 아니하리라>(2013), <신정근 교수의 동양고전이 뭐길래?>(2012), <논어>(2012), <어느 철학자의 행복한 고생학>(2010)> 등이 있고, 역서로는 <소요유, 장자의 미학>(공역, 2013), <중국 현대 미학사>(공역, 2013), <의경, 동아시아 미학의 거울>(공역, 2013) 등 30여 권의 책이 있다. 앞으로 동양 예술미학, 동양 현대철학의 새로운 연구 분야를 개척하고, 인문학과 예술의 결합을 이룬 신인문학 운동을 진행하고자 한다.

출처 : 네이버캐스트>주제 전체>인문과학>철학>동양철학  2015.07.22

http://navercast.naver.com/contents.nhn?rid=2886&contents_id=95150&leafId=288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