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 산책

[실학, 조선의 르네상스를 열다] (3) 실학자들의 신분제 개혁론

라라와복래 2015. 8. 1. 20:04

[실학, 조선의 르네상스를 열다]

실학자들의 신분제 개혁론

“모두 양반이 되면 양반이 없어진다”

실학은 18세기 한국 역사를 이해하는 중요한 키워드이지만, 여전히 실체와 환상이라는 상반된 시각 속에서 실학을 바라보고 있다. 실학은 실패한 개혁의 꿈인가? 아니면 조선의 르네상스를 열고자 했던 학문이었던가? 이 질문에 대한 해답을 찾아 17명의 전문가들이 다양한 시각으로 개혁사상이자 문화사조로서 실학을 조명해본다. ‘실학, 조선의 르네상스를 열다 ―기획: 실학박물관

 

양반이 증가하고 노비가 감소하는 세상

조선후기 신분제 동요와 사회 계층 간 이동은 여러 요인에서 촉발되었다. 농업 생산력의 발전에 따라 농민층 가운데 경제적으로 성장하는 계층이 생겨났고 양반층도 분화를 거듭하였다. 중앙 벌열(閥閱)의 관직 독점이 심화되던 상황 하에 신분적 지위를 유지하지 못한 채 몰락하여 ‘잔반(殘班)’이라 불렸던 하위 양반도 나타나고 있었다.

사회계층 내부의 분화가 진행되던 추이 하에 양반 인구의 급격한 증가는 신분제의 동요를 촉발하였다. 양반층이 끝내 군역(軍役)의 부담을 지지 않게 되자, 과중한 양역(良役)을 피해 평민들은 적극적으로 신분 상승을 기도하였다.

이러한 추이 하에 ‘거짓으로 유학(幼學, 벼슬을 하지 않은 유생)으로 불리는 양반’의 수는 19세기 중엽 호적대장에 의하면 50% 이상을 점유할 정도로 증가하고 있었다. 수많은 하층민이 신분을 상승시켰고 이는 양반 인구의 높은 증가율에 영향을 미쳤던 것이다. 또한 이러한 양상은 지배 신분으로서 양반의 권위와 희소가치를 점차 하락시켰다.

노비제의 운영 방식도 17세기 이래 큰 변화가 있었다. 노비 소유주는 노비 노동력을 이용하기보다 고공(雇工) 층을 활용하는 것을 선호하였다. 노비의 입장에서도 노동 생산성이 높아진 상황에서 노동력의 대가를 지불하는 것이 한층 유리하였다. 18세기에 이르면 노비들은 독자적인 자기 경영을 하면서 보다 자유로운 생활을 영위하였다. 이리하여 조선후기 노비 인구는 급격히 감소하면서 노비제는 분리 해체되어 갔다.

반계서당, 전북 부안군 보안면 우동리 128-1. 실학박물관 제공

양반 세습제를 비판한 반계 유형원

실학자의 신분제 개혁론은 이러한 조선후기 신분제 변동의 추이를 반영하며 전개되었다. 실학자들은 조선사회가 직면해 있던 현실에 대한 성찰을 기반으로 일련의 사회개혁안을 전개했다. 봉건사회 해체기에 처해 있었던 당시 사회구조에서 불평등을 야기하는 신분제도의 모순점을 지적했고, 능력에 입각한 분업을 통해 조선사회를 개혁하고자 하였다.

이들 실학자들은 사람을 평가하는 데 개인의 능력보다 문벌을 중시하는 신분적 차별을 조선사회가 전개되면서 형성된 잘못된 인습으로 바라보았다. 이에 그들은 인재의 광범위한 등용과 하위 신분층의 불만을 해결하기 위해 사회 분업적 개념을 신분제 개혁의 기준으로 삼았다.

반계 유형원(1622-1673)은 양반 세습제의 개혁을 위해 새로운 학교제도의 운영 방식을 제안했다. 과거제도의 폐지와 공거제(추천제)를 통한 새로운 관리 선발의 방식을 구상한 유형원은 읍학(邑學, 중앙은 四學)→영학(營學, 中學)→태학(太學)의 새로운 학제 하에 능력에 따라 학생의 선발과 그 지위를 유지 또는 퇴출할 것을 주장하였다.

“학교에 들어간 자는 내사(內舍)와 외사(外舍) 모두 나이에 따라 서열을 정하도록 한다.”

“공경의 자제도 서인이 될 수 있으며 귀천을 세습하지 않는 것이 옛날의 도이다” —《반계수록》 권 10, 공거사목(貢擧事目)

따라서 능력이라는 기본원리에 입각해 새로운 관료 충원 방식을 구상했던 유형원은 양반 신분 세습제의 철폐를 지향하고 있었다.

또한 유형원은 17세기 당시 변화하고 있던 노비제도의 개혁안을 제시했다.

“우리나라는 노비를 재물로 여기는데 대저 같은 사람이면서 어찌 사람을 재물로 삼을 이치가 있겠는가?” —《반계수록》 속편, 노예(奴隸) ▶《반계수록(磻溪隨錄)》, 유형원이 통치 제도의 개혁안을 기록한 책. 실학박물관 제공

유형원은 노비제도에 대한 단계적 철폐 방안을 구상했다. 그는 갑자기 모든 노비를 없애는 것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므로 우선 노비종모법을 시행하여 노비 신분의 세습을 줄이고, 여러 관청의 노비가 입역(立役)을 하면 급료를 지불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날짜를 정해 그 이전 출생자만을 주인이 관청에 신고해 문서를 만들어 보관하고 이후에는 일체 들어주지 않도록 하였다. 노비제 폐지 이후의 대체인력을 중국과 마찬가지로 노동 대가로서 급료를 지급하는 고공(雇工) 제도의 운영으로 해결하고자 하였다.

양반도 농사를 지어야 한다

성호 이익(1681-1763)은 《성호사설》에서 나라를 좀먹는 여섯 가지 병폐로서 과업(課業)ㆍ벌열ㆍ기교(技巧)ㆍ승니(僧尼)ㆍ유타(遊惰)ㆍ노비를 들었다. 당시 놀고먹는 양반층이 크게 증가하여 사회적 폐단을 양산하던 추이 속에 이익은 양반을 농업에 종사시키자는 ‘사농합일론(士農合一論)’을 주장했다.

“만약에 사(士)와 농(農)을 하나로 합하여 법으로써 지도하고 교화시켜 마치 고기가 물에 헤엄치고 새가 숲으로 돌아가는 것처럼 한 다음, 그중에 재덕(才德)이 있는 자를 초야에서 뽑아 올려 자천하기를 기다리지 않게 한다면, 백성들이 장차 농사에 종사할 것을 자기 본업으로 생각하여, 눈으로 보고 손으로 익혀 각자가 그 업에 안정될 것이다.” —《성호사설》 인사문 육두(六蠹)

농민을 사대부의 선발과 충원하는 토대로 삼아 능력에 따라 등용하고자 하였다. 이를 위해 역전과(力田科)라고 하는 농민을 위한 별도의 과거 실시도 필요하다고 하였다.

이익은 귀천을 가리지 않고 군포를 징수하는 호포제(戶布制)에는 반대하였다. 사농합일을 실현하여 신분 세습이 되지 않는다는 전제하에, 자신의 능력으로 관원이 된 사람에게 군역을 부담시켜서는 안 된다고 하였다. 관직자에게 군역을 지우지 않도록 한 것은 유형원도 마찬가지였다.

이익은 노비에 대한 동정적 입장 하에 그 신분의 세습과 매매를 반대했다.

“우리나라 노비의 법은 천하 고금에 없는 법이다. 한번 노비가 되면 백세토록 고역을 겪으니 그것도 불쌍한데 하물며 법에 있어서는 반드시 어미의 신역을 따름에 있어서랴!” —《성호사설》 인사문 노비

그는 앞서 유형원이 주장한 노비종모법을 시행하고, 개개인별 노비 소유를 100명으로 제한할 것을 제시했고, 나머지는 속전(續田)을 받고 천인의 신분을 면하게 하자고 하였다. 노비를 점차 양정(良丁)으로 돌려 군포를 징수함으로써 국가 재정의 부족분을 해결할 수 있다고 하였다. 이처럼 이익은 노비제도 자체의 폐지보다는 현실의 불합리한 관행을 개선하며 점차적으로 신분제도의 모순을 해결하려 하였다.

한편, 이익은 풍속의 타락으로 인한 향촌사회 신분질서의 동요를 효제의 사회윤리 회복에서 기대하고 있어 여전히 주자학의 명분론적 관념을 떨쳐버리지 못하고 있었다.

북학파의 신분제 개혁안

농암 유수원(1694-1755)은 이익과 같은 시대를 살았지만, 그의 생각은 많이 달랐다. 그가 목격한 현실은 이익이 경험한 농촌이 아니라 상공업의 중심으로 떠오른 서울이었다. 유수원은 이용후생의 실현을 위해 양반 문벌을 타파하고, ‘사농공상’의 평등과 균형적 발전 방략을 제시했다.

때문에 그의 사상은 18세기 후반기에 등장한 북학(北學) 사상과 매우 유사했다. 농공상의 균형적 발전과 관제 개혁을 통한 능력 중심의 정치체제 정착 그리고 부세 합리화를 위해 재산 정도에 따른 균분 균세의 방안이 그것이다.

유수원의 신분제도에 대한 생각은 ‘문벌의 폐단을 논함[論門閥之弊]’라는 글에 잘 나타나 있다.

“사(士)ㆍ농(農)ㆍ공(工)ㆍ상(商)은 모두 같은 사민(四民)이다. 만일 사민의 아들을 한 모양으로 행세하게 한다면 높고 낮을 것도 없고 저편이나 이편의 차이가 없어서, 물고기는 강호(江湖)에서 서로를 잊고, 사람은 도술(道術)에서 서로를 잊듯이 결코 허다한 다툼이 없어지게 될 것이다.” —《우서》 권 2 ◀《우서(迂書)》, 유수원이 사회개혁안을 기술한 책. 실학박물관 제공

유수원은 사민은 신분 고하의 차별이 없다고 보았다. “하늘이 재능을 줄 때 어찌 경향의 차이와 사대부와 서인의 차별을 두었겠는가?”라고도 역설하였다.

이어서 그는 사농공상의 구분을 능력에 따라 결정하자고 제안했다. 중국의 예를 들어 농민의 아들이 4~5세가 되면 숙사(塾師)에게 교육받도록 하여 그 자질을 보아 15세 이전에 사와 농공상을 결정해야 한다고 하였다. 학업을 하지 않는 양반들은 농업뿐만 아니라 상공업과 같은 생업에 종사시켜 사민의 균등을 실현하기를 주장했다.

노비제도에 대해서도 유수원은 사민일체의 개혁이 이루어진 후 철폐가 가능하다고 보았다. 서울의 도시적 환경 속에서 성장한 유수원의 개혁론은 성호 이익의 ‘분배정의’ 중심에서 한 단계 나아가 이용후생을 통한 ‘경제성장’을 위해 양반층도 상업에 종사시켜야 한다고 주장하였던 것이다.

홍대용, 박지원, 박제가 등 북학파도 놀고먹는 양반 및 신분 세습에 대해서는 매우 부정적이었다.

“우리나라는 명분을 중시하여 양반들은 굶주리더라도 팔짱을 끼고 앉아 농사를 짓지 않는다. … 사ㆍ농ㆍ공ㆍ상에 관계없이 놀고먹는 자에 대해서는 관청에서 벌칙을 마련하여 세상에 용납할 수 없도록 하여야 한다.” —《담헌서》 권 4, 임하경륜

홍대용(1731-1783)은 비록 공경(公卿)의 자제라도 재주와 학식이 없으면 적성에 맞추어 농업과 상공업에 종사하게 해야 하며 직업에 종사하지 않고 놀고먹는 자들은 처벌해야 한다고 하였다.

이에 대해 박제가(1750-1805)는 좀 더 적극적인 대책을 구상하였다. 놀고먹는 자들을 국가의 좀이라 인식한 그는 당시 늘어나는 양반층 문제의 해결 방안으로 양반의 상인화를 적극 추진하자고 제안하였다. 즉 육로와 수로의 모든 상업에 양반의 참여를 허락하는 동시에 국가에서 자본과 장비를 대여하여 점포를 개설하도록 하고, 그 성과가 우수한 자를 관직에 등용하자고 하였다. 국가에서 양반의 상공업 종사를 적극 지원하자는 주장이었다. 이런 방안이 실현되면 점차 양반 토호의 권세가 줄어들어 자연스럽게 다른 계층으로 옮겨갈 것이라 보았다.

박제가 초상. 실학박물관 제공

또한 박지원은 사농공상은 모두 성인(聖人)에게서 나온 것이라는 인식하에 사대부의 역할을 강조하였다. 사대부는 학문으로 농ㆍ공ㆍ상을 지도하는 위치에 있는데 오늘날 실용의 학문을 하지 않아 산업이 피폐하게 되었다고 하며 ‘실학’의 연구를 촉구하였다.

평등사회를 지향한 다산 정약용

다산 정약용(1762-1836)은 모든 사람은 기본적으로 평등한 관계임을 주장했고 양반에게 주어진 과도한 특혜로 여러 가지 문제가 대두된다고 보았다.

“하늘은 그 신분이 사대부인가 서민(庶民)인가를 묻지 않는다.”

“바라는 바가 있는데 온 나라 사람들이 모두 양반이 되었으면 한다. 사람들이 모두 양반이 되어버린다면 나라에 양반이 하나도 없게 된다.”

이러한 인식하에 정약용은 《목민심서》에서 모든 사람을 9개의 직업으로 나누어 배치해야 한다고 하였다. 《주례》를 원용하여 그가 제시한 직업은 사ㆍ농ㆍ공ㆍ상과 함께 과일과 채소 재배, 베와 비단 짜기, 목재 등 자재 관리, 가축 기르기, 산나물 등을 캐는 일 등의 9개이다. 종래 직역에 대한 신분적 파악에서 사회적 분업에 따른 직능적 파악을 한층 세분화하였다. ▶정약용의 초상. 실학박물관 제공

또한 정약용은 《경세유표》에서 부농과 상공업자 등 신흥 서민 계층을 관료체제에 흡수하는 방안을 제시하였다. 이를 위해 우수한 농민과 공인을 행정직에 발탁하는 직업별 과거제를 주장했다. 아울러 양반 사족은 학생 교육 외에 농업에 대한 연구, 기구의 발명, 원예와 목축에 대한 교육 등 실용적 학문을 수행할 것을 요구했다. 이러한 생각은 앞서 박지원에서도 나타난 것으로 이를 실학이라 하였다.

다만 정약용은 자유로운 직업의 선택보다는 공동체의 필요에 의해 직업을 국가에서 배정하도록 하였고, 정치의 담당자는 양반임을 내세우는 고정된 신분관을 벗어나지 못해 신분제 개혁 논의에서 미진한 점이 있다.

안민부국의 이상 속에서 신분제의 모순을 바라보다

결국 실학자들은 신분제도의 불합리성에서 오는 현실적 모순을 실현 가능한 범위에서 개혁을 모색하였다고 할 수 있다. 그들은 노비제가 점차 폐지되던 추이 속에 격증하는 양반층이 야기하는 사회적 문제 해결에 관심의 초점을 두었다.

유형원 이래 양반 세습제를 부정적으로 바라보고 놀고먹는 양반층을 도태시키려는 주장은 이후 실학자들에 의해 구체화되었다. 18세기 이익은 양반을 농업에 종사시키자는 사농 합일론을 주장했고, 유수원은 여기에서 한 단계 더 나아가 사농공상의 신분적 차이를 부정하고 양반들이 상공업에도 종사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개혁사상의 북학파와 정약용에 이르러 이용후생의 증대를 위해 농공상을 발전시키고, 사대부들은 실용의 학문에 종사할 것을 주장하였다. 양반 사족이 종래의 체제 교학의 범위를 넘어서서 근대적 실용학문, 응용학문의 길로 들어서기를 주장한 것이다.

다만, 실학자들은 신분제의 전면적인 철폐를 주장하는 데 이르지는 못했다. 사회 신분제도 자체를 인습적 관념에서 바라보는 데는 반대 입장을 가지고 있었지만, 만민평등의 원리를 이론화하는 데 이르지는 못했다. 그들에게는 유교적 계층 관념이 아직 남아 있었고, 또한 자신들이 모두 양반 사족 출신이라는 한계도 드러내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의 주장은 조선의 신분제가 완전히 철폐되어 가는 역사적 흐름 속에서 당시의 시대상을 반영했던 주장이었다고 할 수 있다.

조준호 l 실학박물관 학예연구사

출처 : 네이버캐스트>주제 전체>역사>한국사>조선역사  2015.07.14

http://navercast.naver.com/contents.nhn?rid=134&contents_id=94121&leafId=134